인천경향미추홀칼럼 2010.3.2(화)
교육개혁의 선행과제
양효성(梁曉星)
교육현장의 혼란은 부모의 과욕(過慾), 선생님의 목적의식 상실, 정책난맥의 합작품이다. 이 시나리오를 다시 쓰기 위해서는 평등(平等)과 획일(劃一)이라는 개념정립이 선결과제다.
평등이란 개성이 동등[Equality]하게 존중되며 기회가 공정하게 부여되는 것이다. 학생들을 최악의 조건에서 최선의 조화를 만드는 사람으로 강하게 키우는 것으로 공동선(公同善)을 삼아야한다. 선진국 사람들이 ‘차별’이 아닌 ‘차이’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도 연구해야 한다. 劃一의 첫 번째는 평준화요. 그 다음은 오로지 ‘대한민국1%’라는 외길에 줄지은 빗나간 욕망이다. 무엇보다 더 일하고 덜 얻는 것을 감내하는 ‘안분지족(安分知足)’과 희생(犧牲)이 더 큰 피자와 더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든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한다.
사교육비와 교육부의 구조조정
권력은 교육을 규정할 수 없다. 교육이 한 공동체의 문화적 전통의 집약이기 때문이다. 정책입안자들의 가장 큰 잘못은 자신들이 교육을 개선할 수 있다는 과신과 철학의 부재다. 한글전용으로 고등교육을 망치고 이제는 영어학교로 한국도 아니고 미국도 아닌 제3세계를 만들어 가는 현실도 그 하나의 예다. 영어교육 강화로 국가백년대계는 그만 두고 기러기 아빠가 줄고 있는지, 오히려 호주에 집을 사서 몽땅 이주하는 국민들이 늘어나는지?!
사교육비는 집값과 마찬가지로 정부가 나설 일이 아니다. 오히려 이 둘을 묶어 정부가 건축업자의 장단을 맞추는 것은 아닌가? 빈집털이가 늘어난다고 그 집에 24시간 경찰을 배치할 수 없듯이 공교육에 학원을 주상복합처럼 얹어놓으면 대통령도 퇴근 후에 청운중학교에서 분필을 들어야할지 모른다.
그러면 정말 대책이 없는가? 원칙을 지키는 일이다. 사립학교와 공립학교의 구분 그리고 의무교육과 전문교육을 엄격히나누어 정부와 국민이 스스로의 경계를 침해하지 말아야 한다. 선생님은 직무에 공정하고 글로벌스탠다드를 준수하며 학부모는 그 로드맵을 존중하고 교육행정가는 이것이 잘 지켜지는지 감시해야 한다. 무엇보다 고등학교는 의무교육이 아니라는 명제 아래 교육부의 구조조정이 중요하다.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초등-중등-대학으로 삼분된 조직을 의무교육인 공교육부와 고교이상의 전문교육부와 사회인의 교양 및 재취업을 위한 사회교육부로 삼분하는 것이다.
고등학교는 의무교육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학생의 장래를 좌우하는 9년간의 의무교육에 국가의 역량을 집중하고 고교에서부터 국공립과 사립을 엄격하게 구별하여 상호경쟁력을 유도하는 것이다. 전문교육은 독일처럼 학문과 기술의 두 방향으로 상호존중하며 최고의 경지를 추구해야 한다. 건국 60년이 되고 이제 모든 대학에 젊고 열정이 넘치는 교수들이 전진 배치되었다. 대학입시도 당연히 대학에게 완전한 자유를 주어야 한다. 사립대학에는 정원 외 졸업의 기여수강생을 허용해야 한다. 중국에는 빈공과(賓貢科)라는 것이 있었는데[최치원도 빈공과 출신이다] 북경대 정시 입학생들은 오히려 이들 학생이 많은 것을 학교의 브랜드가치로 여기고 있었다. 사림은 당연히 자립해야한다. 자립형 사립고를 급조하기 위해 국민의 세금으로 강당과 기숙사를 지어준다니 이것이 ‘自立’과 ‘私立’ 어디에 해당하는 것인가? 귀족학교(?)는 그들대로 가고 서민 우수학생은 그들끼리 모여 외인구단도 우승할 수 있다는 집념이 사회 정의에도 맞고 교육이란 열정만 있으면 이런 학교들이 훨씬 우수한 성적을 낼 수도 있다.
유급제도와 장학금도 의무교육 9년은 완전한 무상교육이 되었으므로 고교에서부터 상위 30%라든지 최소의 기준을 엄격하게 실시해야 한다. 실업계 고등학교와 전문대학 방통대 학점은행제 등등 모든 제도가 있음에도 꼭 브랜드 대학 오솔길에 한 줄로 서는 병목현상은 이런 원칙의 무시에서 비롯된다.
소수가 전체를 흔들어서는 안 된다. 시간과 원칙이 필요하다. 돌이켜 보면 알몸시위(?)든 여중생 포주든 모두 창의적인 것이 아니라 어디선가 배운 것이다. 그 까닭은 이 사회에 ‘선생님’이 사라진 것인데 대통령의 말씀에 ‘존경’이라는 단어가 오랜만에 등장했다. 계급사회인 군대에서도 장교는 사병에게 존댓말을 쓰도록 교육받고 있다. ‘내가 너를 뽑아 키워줬어! 애들 잘 키워야지!’ 이런 말투의 잠재의식과 ‘선생님을 모셔서 학생들이 어른스러워 졌습니다!’라는 말을 비교해보라! 교육처럼 인과응보(因果應報)가 분명한 분야도 없다. 교육정책 입안자들이나 교장 총장들이 비싼 돈을 들여 골치 아픈 공청회나 세미나를 할 필요도 없다. 그 돈으로 배낭을 메고 일본과 중국에 놀러가서 택시를 타고 라오스[老師]와 센세이[先生]라는 말이 어떤 대접을 받는지 겪어보는 것이 교육개혁의 지름길일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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