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풀꽃
-凍土의 개나리
凍土(동토)를 우리말로 ‘얼음땅’이라고 해야 할까? 툰드라[tundra[는 극지대나 고산지대의 나무가 없고 평평하거나 기복이 완만한 땅인데 춥고 생명이 없는 죽음을 연상케 한다. 2006년 봄에 나는 중국 심양의 랴오닝대학에 지은 지 10년 쯤 되는 교수아파트를 빌려 객지생활을 시작했다.
‘추위가 걱정이네요!’
‘겨울보다 4-5월이 힘들겁니다. 난방이 꺼지니까요!’
그 7층짜리 아파트의 1층이 내 집이었는데 TV와 거실과 침실이 1개에 주방 겸 식탁이 있고 샤워시설이 있는 화장실 등등 책을 읽고 글을 쓰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한 집 건너 구멍가게에서 손짓발짓으로 광천수와 맥주와 담배를 사고 구내식당에서 세끼를 때우고 등등.
다만 견딜 수 없는 것은 역시 추위였다. 영하의 바깥 날씨는 해가 들고 바람이 멎으면 참을 만했다. 그러나 견디기 어려운 것은 마룻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였다. 시멘트 바닥에 마루를 깐 이 집은 벽에 붙은 주름 보일러가 가동되어 실내 공기를 데우면 대류현상 비슷하게 얼음땅의 냉기를 집으로 끌어들이는 묘한 구조였다. 바닥의 냉기는 발바닥을 얼구고 종아리를 감고 가슴에서 녹는가 하다가 숨을 쉴 때마다 입에서 하얀 솜사탕을 만들어 냈다. 시린 손을 찻잔으로 녹이면서 책장을 넘기는 밤이 지나고 이 얼음땅에도 봄은 왔다.
4월인데도 50년 만에 쌓인 눈은 쉽게 녹지 않았다. 교정의 눈산[雪山]은 묘한 산수화를 그려가며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커튼을 젖히면 창을 스치듯 가까이 등교하는 학생들의 옷차림도 한 겹 가벼워지고 어깨를 펴고 걷는 걸음도 한 템포 느려지고 재잘거리는 웃음소리는 한결 높아졌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창 앞에 한 여학생이 화단으로 들어와 고개를 숙이고 한참이나 엎드려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의 머리와 내 눈빛은 팔을 뻗으면 닿을 정도였다. 나는 처음에 열쇠든 볼펜이든 무엇인가 잃어버린 물건을 찾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 소녀는 꽃을 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아직도 그늘에 잔설이 남아있는 시점에 풀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손바닥만 한 화단에 꽃이 피어 있었던 것이다. 개나리! 그 가지는 더도 덜도 아닌 나무젓가락만하고 꽃잎은 달랑 두 개가 잎을 틔우고 있었다. 나무젓가락에 붙은 밥풀 같은 개나리!
한국의 담장에 폭포를 드리운 황금의 봄을 즐기던 나에게 동토의 개나리는 충격이었다. 이 소녀는 얼마나 봄을 간절히 기다려왔던가? 오히려 밥풀만한 개나리가 이 소녀의 가슴에 보석보다 더한 희망을 심어준 것이다.
봄은 빠르게 지나가고 더위는 그만큼 뜨거웠다. 100년 모란은 엑스포공원에 피었다 지고 끝없이 부는 바람은 녹음을 흔들어 교정을 파랗게 물들이곤 했다. 더구나 여기는 토질이 瘠薄(척박)하여 삽날이 휠 정도다. 일본도 그런 땅이 많다. 이에 비하면 우리는 ‘발목이 시도록 밟아보고 싶은’ 얼마나 기름진 땅위에 발을 디디고 사는가? 산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이 넓은 땅에 조물주는 또 얼마나 많은 초록을 감추어 두었는가? 이윽고 가을이 오고 은행잎에 노랑물이 들었을 때 학생들은 모두 그 잎을 밟으며 사진을 찍기에 바빴다. 그 은행조차 우리 은행에 비하면 ‘밥풀꽃’ 비슷했지만....
가을이 되면서 나는 ‘얼음집’을 벗어나 4층으로 이사를 했다. 회색의 겨울은 빨리 왔고 영하 30도로 내려간 수은주는 얼어붙었는지 움직이질 않았다. 다만 19도를 유지하는 실내는 산이 없어 태양이 그만큼 빛을 주는 낮이면 오히려 안온했다. 이 도시에 낯이 익자 북시장을 알게 되었고 櫛比(즐비)한 꽃가게에서 갓 피어난 난초와 장미 한아름을 사다가 ‘凍土(동토)의 봄’을 한껏 누릴 수 있게 되었다. 홀로 책상에 앉아 있노라면 황제의 온실에서 책을 읽는 느낌이었다. 오직 주머니도 표정도 도시도 어두운 이 도시에서 그 많은 사람이 한 송이 꽃을 사는 것을 본 뒤 나는 비로소 이 도시 창문마다 커튼을 열면 그들 마음에 겨울속의 꽃이 피어있음을 알게 되었다. <*>
* 2007년의 봄을 뒤늦게 회상하다. 201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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