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빠진 놈 (2)
환갑 기념으로 얼빠진 놈이라는 글을 썼는데 누가 이렇게 물어왔다. 그는 황우석 사건과 시험관아기 카톨릭의 견해 질량불변의 법칙 온갖 책을 섭렵한 인물이었다. 그는 대뜸 이렇게 물었다.
‘그렇다면 너는 얼을 보았느냐?’
그래서 나는 즉각 대답했다.
‘그렇다! 그리고 지금도 보고 있다.’
‘그럼 그 얼이 어떻게 생겼느냐?’
나는 황당했다. 보이는 것은 보이는 것이지 글로 묘사하거나 말로 설명할 수는 없다. 하늘에 떠 있는 별을 묘사하거나 설명하면 별은 묘사하거나 설명하는 그만큼 크기밖에 되지 않는다. ‘사랑’이라는 단어나 사람의 이름도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사실은 훨씬 크다. 할 수없이 나는 大小-質量-形狀 등을 모두 생략하고 있는 그대로 이렇게 말했다.
‘그 물체의 생김생김만큼 크다!’
‘????’
‘예를 들면 너의 얼은 네 몸집만 하다는 말이다.’
그는 자신의 몸을 몇 번 휘둘러보았는데 아마 반짝거리는 구두와 그림자만 보았을 것이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그는 엉뚱한 소리를 했다.
‘그러면 얼은 내 몸뚱이처럼 자라기도 하는가?’
그는 얼의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시간개념을 적용한 듯 했다.
‘그렇지! 갓난아기 때는 작지만 너처럼 크다가 늙으면 쪼그라들기도 하지!’
‘허허! 웃기는구먼! 그렇다면 늙어 죽으면 얼도 죽어 없어지겠구먼!’
‘그렇지 않지! 지난번에 이야기한 것처럼 얼은 죽지 않아!
생명속에 들어왔다가 생명속으로 돌아가는 것이지!
움직이면서 움직이지 않고 때 묻으면서 때 묻지 않고 커지지도 않고 줄지도 않아!’
‘그건 또 무슨 소린가?’
‘비유하자면 어린아이가 엄마의 자궁 속에 있을 때 얼은 양수처럼 그 아이를 감싸고 있다가 달이 찰수록 그 아이에게 스며들지 - 마침내 탯줄을 끊고 세상에 나오며 으앙! 하고 우는 것은 그 얼이 이 생명에게 드디어 작동한다는 신호지! 아이가 성장하면서 얼도 꼭 그만큼 늘어나고 쪼그라들면서 얼도 그만큼 적어지지! 탯줄을 끊고 젖을 떼고 나면 이것도 비유지만 이제부터는 햇빛과 달빛을 통해 얼을 받아들이지! 마침내 숨을 거두면 얼은 더 이상 그 몸에 머물지 않지! 사람들은 숨을 쉬지 않으면 금방 죽으면서도 나와 대기를 구분해서 나는 -대기를 呼吸한다-라고 끊어서 생각하거든! 대기가 나를 호흡할 수도 있지 않은가?’
내 이야기가 길어지자 그는 얼을 보려고 하지 않고 자꾸 말을 씹으며 말을 만들어내려고 했다.
‘그러면 움직이면서 움직이지 않는다는 말은 무엇인가?’
‘얼은 움직일 수 있을 뿐 스스로 움직이지는 않아! 자네라는 형상을 통해 얼을 움직이는 것이지! 자네가 잠들면 얼도 잠들지! 자네가 꿈을 꾸면 얼도 꿈을 꾸는 거야’
‘때 묻으면서 때 묻지 않는다는 말은 무엇인가?’
‘그거야 자네가 때를 묻히면 자연히 때가 묻어있을 것 아닌가! 그건 자네 탓이지! 자네가 숨을 거둘 때는 얼은 때 묻은 자네를 벗어나 본래의 상태로 돌아가지! 요즘 생태환경이니 하지만 그건 사람들끼리 이야기지! 사람의 얼이 아닌 얼빠진 놈들끼리 어질러 놓고 ..’
그러면 사람들이 그 얼을 볼 수 있을까?
글쎄 얼은 존재하는 것이니까 볼 수도 만질 수도 소유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 대상을 대신할 수 있다면 말로 표현할 수 있겠지만...문제는 사람이 그 얼의 실체를 너무 늦게 본다는 것인데 공자가 人之將死其言也善이라는 말이 있으니까...
얼마 후 친구가 이런 글을 보내왔다.
薔薇香氣는 바람을 타고와
내 肺腑에 스민다.
이슬은 빛을 담는 그릇
공기보다 가볍고 수은보다 맑고
바람이 없어도 흔들리고
벼락이 쳐도 움직이지 않는
노함도 슬픔도 기쁨도 없는 내 벗이여!
내 삶의 존재
흔들어도 깨지지 않고
세월이 흘러도 늙지 않는 내 넋이여!
꽃은 향기를 담는 그릇
솔바람은 향기의 傳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