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나무 – 귀촌일기[배롱나무 겨울가지...]
시골로 돌아가 농사를 짓거나 노후설계를 한다?! 歸農이나 歸村이나 도시를 떠나 자연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간다든지, 농업으로 생계를 걱정하거나 낯선 생활을 어떻게 이어갈지 크게 보아 근심이 없는 사람은 없다. 다른 경우가 있다면 아무 생각 없이 시골생활에 뛰어드는 경우인데 아무래도 나는 後者인 것 같다.
본적까지 옮겨놓고 재산이라고는 모두 한 곳에 모은 지 벌써 네 번째 겨울이지만 萱堂의 故居를 헐어 새로 지었으니 어림잡아 4半世紀- 이 골짜기에 첫발을 디딘 1989년은 기억해두어야겠다. 1988년에 서울올림픽이 있었고 그 덕에 여행의 족쇄가 풀려 이듬해 여름 뮌헨에서 천안문사태를 안타까워하는 ‘生命’이라는 포스터를 마주친 것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도시에 직장을 두고 홀어머니를 모신 것[사실은 어머니가 억지로 시골집을 마련한 것이지만...]도 그리고 그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것도 또 그 자리로 돌아온 것도 모두 이곳이다.
시골에 살려면 터를 마련하고 창고를 먼저 지어 캠핑하듯 피난살이를 하면서 토목공사를 염두에 두고 부엌, 거실, 침실의 三間집을 一字로 지어 살면서 사방으로 형편 따라 증축을 하는 것도 한 방도가 아닌가 싶다. 처음에 대지와 밭 두 필지 300평으로 만족했던 땅이 늘어난 것은 오로지 이웃들의 등쌀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돌이켜 보니 처음 산 집도 주인이 이장을 그만 두고 도시의 아들을 찾아 떠난 때문이요, 다음에 사정사정 억지로 떠맡은 밭도 도시의 아들 셋집마련을 위한 것이고 마지막 한 필지 사들인 것도 형편이 좀 낳은 지주가 더 좋은 아파트를 마련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결국 2필지가 다섯 필지가 되고 300평이던 땅은 800평이 되면서 300평 이상의 농지를 보유해야 가능한 영농인(농업경영인 등록을 해야 농협의 조합원이 될 수 있다.)이 되고 높낮이가 다르고 경계가 들쭉날쭉한 땅을 여러 번 포크레인으로 뒤집어 밭 비슷한 모양이 되었는데 20년 일한 돈이면 차라리 포크레인을 사는 것이 나을 뻔 했다.
아무튼 무엇보다 매일 메모형식의 일기를 써둔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이 마을 노인들의 평균학력은 초등학교 중퇴이니 80고령에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하거나 계약서 같은 것을 쓰는 경우는 거의 없고 돈을 꾸어 쓰거나 갚을 때 숫자를 적어두는 것 정도가 기록물이라 할 것이다. 아무튼 지난 몇 년간 고추, 마늘, 백태, 서리태, 무, 배추, 오이, 호박, 가지, 참깨, 들깨, 당근, 생강, 아욱, 마늘, 대파, 쪽파, 부추, 고구마, 감자, 옥수수, 방풍나물 등등 생각해보면 식물도감을 밭에 옮겨 놓은 것이 아닌가 싶다. 씨앗이나 모종을 사고 어느 계절에 어떤 간격으로 얼마의 깊이로 심어야하는지는 옆집 밭을 보고 어림대중으로 하거나 품을 얻기도 했다.
밭이 제법 틀을 갖추자 이제야 겨우 겨울이 왔구나하는 실감이 난다. 하늘에는 별이 뜨고 눈은 하늘에서 내린다는 것을 눈여겨본다. 그리고 소나무와 달리 어떤 나무는 겨울에 잎을 떨구고 앙상한 가지만 남아있다는 것도...집을 짓는 다는 것은 첫째 추위와 도둑으로 부터의 피난처요 다음으로 衣食을 해결하는 공간이요 그 다음이 휴식이다. 休息- 나무에 등을 기대고 숨 좀 쉰다는 것!
집을 다 짓고 나면 막상 등기를 할 돈이 궁하기 마련이다. 우리 집은 당연히 담장도 대문도 없다. 그래도 발가벗은 집에 몇 그루 파란 것을 보기 위해 봄이면 유량동 산림조합 공판장까지 가서 몇 그루 묘목을 사기도 했는데 돌아오는 길에 동네 어귀의 수목원이 눈에 띄었다. 주인 할아버지는 기구한 인생살이를 했다고 했다. 원산에서 군함을 타고 월남해서 거제 포로수용소에서 누이를 잃고 전라선을 따라 여수와 전주에서 전전하다가 결혼을 해서 서울에서 살다가 속초에 사는 누이를 극적으로 邂逅하고 지금은 이 동네에 땅을 빌어 영산홍과 소나무 등등 조경수를 심어 자리를 잡았다고 했다. 나는 미모를 뽐내는 나무들보다 이 할아버지의 이야기에 더 끌렸고 할아버지는 돈보다는 이야기를 들어주는 내게 더 끌렸다. 그 자리에서 소나무와 영산홍을 몇 그루 샀다. 나무는 사기보다는 심는 것이 더 어렵다. 정원수는 생명이요 세월이요 정성이다. 기다릴 줄 모르는 사람은 나무를 심을 수 없다. 몇 차례 그 수목원에 들렸다가 기어코 백일홍을 한 그루 샀다.
배롱나무는 백일을 꽃피운다고 백일홍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 같은데 개심사와 송광사의 백일홍은 지금도 눈에 어린다. 이 백일홍을 떠올릴 때마다 절 마당에 왜 석탑을 쌓는지 나는 고개를 젓곤 한다. 불국사의 두 國寶를 다시 보게 되는 것도 그런 연유다. 오히려 절 밖으로 나선 신륵사의 전탑과 난쟁이 삼층석탑이 더 친근한 것은 무슨 까닭일까? 아무튼 이 백일홍은 삭막한 뜨락에 여름 내내 꽃을 피웠다. 할아버지가 짚단을 들고 와 정성스레 감싸주고 잔가지를 잘라주면 이제 겨울이 왔다는 신호가 되고 또 바깥일은 마쳤다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나무는 제 동네에 살던 나무를 옮겨야지 – 저 남쪽 나무를 심다보면 얼어 죽기 십상이지!’
우리 백일홍은 평택에서 이사를 해서 수목원에 머물다 왔으니 안심하라면서...
어머니는 꽃을 좋아하셨다. 평생 펜대와 꽃삽밖에 쥐어보지 못하시던 어머니가 이곳에서는 고추 배추 등등 야채도 심었지만 틈이 나면 작약, 철쭉, 영산홍, 채송화, 금잔화, 봉선화 등등 화단을 가꾸곤 하셨다.
‘온 산이 꽃나문데 울안에 웬 꽃을 심어유?!’
동네 사람들이 물으면 笑而不答하시던 어머니도 내게는
‘꽃도 療飢가 된단다. 눈療飢라는 말도 있잖니?!’
이렇게 넌지시 미소를 보내곤 하셨었다.
이제는 겨울을 나는 마른 백일홍 가지가 눈에 들어온다. 메마른 나뭇가지는 겨울잠을 잔다고 생각했는데 껍질을 벗겨보면 은은하게 생명을 기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오직 물기 하나로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고 또 잎을 틔워 꽃봉오리를 맺는 것이다. 그는 지금 봄을 꿈꾸고 있는 것이 아니라 봄을 키우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잠자는 것이 아니라 지금 忍耐하며 冥想하며 內空을 가다듬고 있는 것이다. 꽃만 보고 가지는 못 보는, 잎만 보이고 뿌리는 안 보이는 나는 어떤 사람일까? 어머니의 손맛만 기억하고 그 마음은 헤아리지 못하는 나는 어떤 사람인가? 그런 생각으로 이번 겨울을 보내야겠다. 배롱나무를 좋아 하시던 어머니! 그때는 틀이 잡힌 나무를 사드릴 여유가 없었었다. 꽃도 療飢가 된다 하시던 어머니를 그리는 마음이 지나쳐 꽃에 耽溺하다보면 꽃이 妖氣를 띨지도 모르니까?! <*>
모처럼 겨울날씨가 양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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