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적(符籍)- 치매(癡呆)의 키워드
막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다니 갑자기 시간이 느리게 간다. 무엇을 하더라도 차분해지고...어차피 학교는 서울에 있고 나는 100킬로 떨어졌지만 산골이라서 드문드문 주말이나 방학에나 그 아이를 볼 수 있을지 모른다. 아니! 이제 저도 클 만큼 커서 제 일이 있고(-기껏해야 숙제겠지만...), 친구가 있고(-그 친구도 학원에 가야하니 저하고 놀 시간도 별로 없겠지만...) 아니면 자기 시간이 필요하다고 할지 모르겠다. 지난 일주일 그 아이(?)는 실컷 놀다가 이제 입학준비 차 서울로 올라가셨다(?).
오늘따라 봄눈이 흠뻑 내린다. 물기를 머금은 가녀린 눈발은 하염없이 내려 쌓이고 또 쌓인다. 그래! 만주의 벌판 심양에서는 메마른 눈발이 북풍에 날려 영하의 도로 위엔 쌓일 눈이 없어 차들은 오히려 거침없이 달리곤 했었지...눈발은 시야를 가리고 앞산을 가리고 하늘을 가리고 장독대를 건너 뜨락의 잔솔가지를 덮고 밭고랑을 건너 목련의 솜털에 눈꽃을 피운다.
노인이 되면 그 꽃은 어떤 색일까? 저 금방 스러질 눈꽃을 닮은 매화(梅花) 아니면 목련(木蓮) 뭐 그런 하얀색이 아닐까? 산수유나 개나리 닮은 아가들의 노란색 보다는...그리고 청춘의 진달래 닮은 분홍은 아닐 테니까...특히 하얀색일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구름도 되고 눈도 되고 천지(天地)를 덮어 지난날의 기억(記憶)을 하얗게 지웠으면 하는 심사(心思)일지도 모른다. 나같이 거짓된 삶으로 곱이 낀 경우는 지우고 싶을 것이고 꽃다운 청춘을 간직한 사람은 그 하얀 이불속에 그 추억을 포근히 감싸 안고 싶어서일지도 모른다.
노인의 기억에 대한 집요한 사색의 실타래가 얽이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결국 아이에 대한 미련 때문일 것이다. 그 아이가 벌써 학교에 들어가다니...그렇지! 태어나고 내 무릎에 응가를 하고 방바닥을 기고 ‘ㄹ’ 을 거꾸로 쓰는- 참! 그 글자는 아직도 거꾸로 그리고 있지...그런 기억들의 틈새가 드문드문 끊어지고 자꾸 벌어져가면서 건망증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몽롱(朦朧)한 상태가 사이렌소리처럼 길게 여운을 만들며 지속된다.
치매(癡呆)! 그런 병(病)적인 망각(忘却)의 피안(彼岸)에 건망증은 오히려 차안(此岸)의 나른한 달콤함을 즐기는 항구의 벤치는 아닐까? 학창시절에 유난히 만년필을 자주 잃어버렸던 기억이 새롭다. 처음에는 그 비싼 만년필과 똑같은 만년필을 기를 쓰고 다시 사곤 했었지! 그냥 볼펜이나 연필을 잡히는 대로 쓰는 일이 익숙해질 때까지...그때는 이미 불혹을 넘긴 나이였었고...잃어버리지 않을 것 같은 안경을 매일 더듬는 것은 이미 나이가 들 때로 든 뒤였다. 옌징-眼镜[yǎnjìng]은 처음 배운 중국어였다. 줄에 걸린 돋보기는 지금도 다섯-여섯-일곱...부끄럽지만 여기저기...때로는 모두 한곳에 모아 두었다가, 어느 때는 또 더듬더듬...
환갑을 넘기고 심양에서의 네 계절! 기억을 지우고 살아본 경험이 내겐 소중하다. 낯선 거리 낯선 캠퍼스 낯선 언어! 낯익은 얼굴은 없다. 컴컴한 시멘트벽의 회칠은 벗겨지고...가로등도 실내등도 모두 희미한...철창을 열고 다시 현관철문에 열쇠를 아래 위 두 번 씩 돌려야하는 엘리베이터가 없는 아파트의 4층. 밖은 영하20도가 기본인 회색의 겨울외출을 하면서 呪文처럼 외웠던 쇼우지, 첸빠오, 야오스 즉 핸드폰-지갑-열쇠, 手机[shǒujī] 钱包[qiánbāo] 钥匙[yào‧shi]- 이 간단한 물건들을 맨날 잊어버려 현관문에 매직펜으로 써 붙여놓고 큰소리로 복창(復唱)하면서 문을 나서곤 했었다. 그 세 단어는 현대라는 울타리에 내 스스로를 가둔 키워드이기도 하다. 옛날 시골집에는 열쇠라는 것이 없었다. 별로 잃어버릴 것이 없었으므로...지갑! 지갑에 챙길만한 돈이 애초에 없었으니까...더구나 전화기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사람을 찾을 만큼 고독하지도 바쁘지도 않은 흑백의 시간이 망각처럼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었는데...현관문에 붙은 그 단어는 바로 나를 구속하는 부적(符籍)임에 틀림이 없었다. 나를 현대라는 감옥에서 탈옥시킬 암호-주문-키워드는 바로, 쇼지-야오스-첸빠오라는 주문(呪文)이다.
박속처럼 뇌수가 하얗게 말라가는 물리적 변화로서의 치매(癡呆 : Alzheimer's disease)가 나를 향해 걸어오는 것을 피할 생각은 전혀 없다. 그 순간이 되면 우리를 얽어온 ID니 암호니 은행에 넣어 둔 돈이니 돌아가야 할 집이니 모두 의미가 없어질 것이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면 손가락을 비틀던 열쇠는 손가락을 누르는 지문열쇠로, 지갑의 돈이나 전화는 음성인식으로 주문을 외우면 될 것이다. 바로 그 주문(呪文)에 걸려 갯벌을 향해 걸어가는 좀비가 되어 석양의 노을 향해 앞으로만 나아가는 자발성치매가 문제가 아닌가?! ‘적어도 나는 그 대열에 끼지 않는다.’고 ‘깨어있는 지성(知性)’을 자처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각성자 붓다이거나 아니면 물리적치매에 걸린 사람일 것이다. 올해 들어 ‘立春大吉’의 전통부적 옆에 한글로 ‘핸드폰-지갑-열쇠’라는 치매키워드 - 모던 부적을 스스로 써 붙였다.
‘그 열쇠로 문을 잠그고 나는 어디로 가려는 것이었을까?’ <*>
오늘은 춘설...물기를 머금은 눈이 흠뻑 내렸다. 2016년 2월28일 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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