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재봉틀-사람은 옷을 입고 산다.

양효성 2012. 12. 30. 20:17

             

           재봉틀-사람은 옷을 입고 산다.

                         너희가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두려워 마라

 

시골로 이사를 하고 두 번 겨울을 맞이하며 옷장을 정리한다.

삶은 점점 어려워지고 산업화 사회의 오르막에서 나는 그만 샛길을 찾아 내려가고 싶다.

 

옷!

태초에 우리는 무엇을 입었을까? 인류사박물관에 가보면 원시인들의 몸에는 토끼나 멧돼지처럼 온몸에 털이 나있다. 이 시대의 인류는 유골로만 남아 있고 살가죽은 남아 있지 않아 그림 그대로인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또 다른 태초의 모습은 아담과 이브의 그림인데 모두 나뭇잎을 떼 내면 지금 아마존에 살고 있는 사람들처럼 아무 것도 걸치지 않고 있지만 피부에는 짐승의 털로 뒤덮여 있지는 않다. 열대지방에도 밤이면 서늘할 텐데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살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우리들도 여름에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해수욕을 즐기지 않는가? 잎사귀를 끈으로 묶은 이브의 수영복도 있지만 곳곳에 누드해수욕장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다 안다.

 

그러나 내가 사는 땅은 여름에는 벗고 겨울에는 입어야만 한다. 나는 무엇을 걸치고 살아왔는가?

 

뜨개질 : 어머니는 아버지의 셔츠를 손수 만들어 입히셨다고 한다. 그 옷이 얼마 전까지 남아 있었지만 아쉽게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태우셨는지도 모르지만 다행히 흐릿한 흑백 사진에 그 옷의 그림자는 남아 있다.

어머니는 초등학교 5학년 때 벌써 뜨개질을 즐기셨다는데 내 어린 시절에 베레모나 윗옷을 손수 떠서 입히셨다. 궁핍이 극에 달하던 초등학교 시절 사무실에서 퇴근 하시면 뜨개질로 삯을 받고 남은 털실로 장갑이나 양말 그리고 때로는 털 자켓을 짜 주시던 어머니의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나는 그 옆에서 숙제를 하고 일기를 쓰고 잠들고 어머니의 뜨개질은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팔순에 이르러서도 그 뜨개질은 멈추지 않았고 그 뜨개바늘은 지금도 이 글을 쓰는 책상의 필통에 꽂혀있다.

 

사람은 무엇을 입고 사는가?

모시 : 피난으로 먼 남도에 이르렀을 때 내 나이는 여섯 살이었다. 마을 아낙들은 삼[麻]껍질을 벗기며 겨울밤을 지새우곤 했다. 돌이켜보면 여름 철 하늘을 가리며 곧게 자란 삼은 낫으로 베어져 木棺(목관)처럼 긴 통속에서 삶아지고 그 삼대를 아낙들은 허연 허벅지에 올려놓고 무딘 칼로 껍질을 벗겨내고 그 껍질을 다시 이빨로 갈래갈래 죽죽 찢어 한 올 한 올 긴 머리카락 같은 실을 만들어 나갔다. 그 실들을 묶어 타래가 되고 또 몇 번 물에 들어가고 길들이고 다듬어져 베틀에 올라가게 된다. 한 해를 쉴 틈 없이 다듬어진 베틀에서 찰칵거리며 씨줄 날줄 북이 스치는 모습은 오승윤의 織女圖(직녀도)에서 여실히 부활된다. 그 영상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그 정지된 화면에서 베틀이 움직이고 등잔의 그을림이 황토벽에 그림을 그리는 율동과 찰칵거리는 소리가 벽에 울려 들려온다. 자장가처럼...

 

무명 : 툇마루에는 물레가 있었다. 간디의 물레가 아니라 증조모의 물레였다. 어디인지 목화가 피어나면 말 그대로 솜꽃이었는데 여린 꽃송이는 어린 잎속에서 상큼하게 녹아내리곤 했다. 꽃들은 하얗게 구름처럼 두둥실 피어나고 파란 하늘을 우러러 보면 솜이불에 푹신하게 누어 하늘에 흔들리는 어린 나를 보게 된다.

솜꽃들은 송이송이 할머니의 앞치마에 쌓이고 씨아로 그 씨를 뽑아내 물레로 자아내면 통통한 실 꾸러미가 하나 둘 소쿠리에 쌓여간다. 그 실 꾸러미가 또 베틀에서 찰칵거리면 戰線을 지키는 남정에게 보낼 솜옷을 짓는 아낙의 詩 한 구절이 떠오른다.

 

명주 : 봄이면 뽕나무에 파릇파릇 새순이 돋는다. 누에는 여러 번 잠을 잔다. 나는 아직도 그 때도 몇 번 잠을 자는지 누에는 어떻게 태어나는지도 모른다. 꿈틀거리는 누에 – 톱자국을 만들며 뽕잎을 갉아먹는 누에의 사각사각 거리는 소리...

가을일까? 누에는 집을 짓고 하얀 관이 완성되면 그 녹아내릴 듯 부드러운 영원의 집안에 깊이 잠든다. 나는 누에의 장례식에서 그 영혼을 입안에 넣곤 했다. 증조할머니는 부르튼 손마디로 번데기를 집어 내 여린 혀 위에 올려놓으시곤 했다. 이마를 찡그리며 차마 그 손을 밀어내지 못하던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그 증조할머니가 돌아가시고 祭日도 아스라이 잊혀진 지금에야 나는 소주에 그 번데기를 씹어보곤 했다. 서울의 어느 골목에서 또 뼈를 얼리는 겨울 北京의 그 후퉁[胡同]는에서...

 

누에고치는 또 베틀에서 부드러운 明紬가 되고 중국상인들에 지워져 사막을 걷고 걸어 로마의 멋쟁이들은 황금을 주고 그 보드라운 제2의 피부를 감고 다녔다. 마루 건넌방은 두 칸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무명-명주-삼베를 짜던 베틀은 아마 컴컴한 뒷방에 있었던 것 같다. 도시로 나오면서 그 베틀과 작별을 한 것이 아니었을까?

 

한복 : 초등학교 3학년 때인가? 625의 전흔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전쟁중에 입학한 그 학교는 한 반이 100명을 넘었고 6학년까지 모두 8천명이 북적거렸었다. 기차는 연기를 뿜어내는 증기기관차였고 버스는 흙먼지를 일으키며 자갈길을 달리던 그런 시절이었다. 휴전협정으로 어정쩡한 평화가 찾아온 어느 늦여름 - 외할머니는 기차를 두 번 바꿔 타고 다시 버스를 타고 색동 요이불과 한복-바지, 저고리에 조끼와 두루마기에 두건까지 손수 지어 이시고 외손주의 학교로 1박2일[기차에서 여관에서 주무시며 그 보다는 더 걸렸을지도 모르겠다]의 여행을 하며 나타나셨다. 지금 생각하면 유난히 키가 작으셨던 그 할머니가 어떻게 8천명이나 되는 학생가운데서 외손자를 찾아낼 생각을 하셨을까?

 

추석을 지내고 나는 그 한복을 차려 입고 등교했는데 운동장의 모든 학생들이 내 주위를 하루 종일 맴돌았던 기억이 새롭다. 그리고는 오랜 동안 ‘*영감’이란 별명이 나를 따라다녔다. 연회색 명주바지와 연분홍 저고리에 연초록 조끼-아마 그랬을 것이다-그 모습도 한 장의 사진에 어딘가에 아직 남아있다.

 

나이롱 : 요즘 아이들에게 ‘너희들은 어떻게 옷을 구해 입니?’라고 물으면 ‘인터넷으로 사요!’이렇게 시큰둥하게 대꾸할지도 모른다. 무명-명주-삼베...이런 말들이 그리고 베틀이라는 이야기나 길쌈 바느질 그런 말들이 낯설지도 모른다. 그런 시대는 너무 쉽게 찾아왔다. 두루마기를 입고 영감이라는 별명을 얻은 그 이듬해 여름 우리 반 친구 한명이 稀罕한 남방셔츠를 입고 나타났다. 이 친구가 조리 돌리듯 운동장에서 에워 쌓인 것은 나이롱[Nylon]이라는 옷감덕분이었다. 입담 좋은 친구는 그 친구의 옷을 벗겨 시멘트에 박박 문질러 보이며 옷감이 강철처럼 질긴 것을 실험[?]해 보였다. 그걸로 부족해서 분수대에 세워놓고 옷을 흠뻑 적신 뒤에 옷을 벗겨 훌훌 털어 다시 입히고는 얼마나 빨리 이 옷이 마르는지 보여주었다. 처음에는 옷자랑하는 재미로 벗었다 입었다를 반복한 이 친구는 이튿날 때 아닌 콧물감기를 앓아야 했다. 베틀 안녕-그리고 나타난 화학섬유시대가 내 앞에 나타난 것이다. 이 나이롱은 한 시대의 유행어가 되었다. -치마-팬츠에 이어 마음대로, 제멋대로, 아무렇게나 등등의 경우에도 ‘나이롱이다.’ 이런 말들이 유행했다.

 

그 나이롱 시대에도 나는 여전히 베틀옷을 입어왔다. 지금도 나는 무명옷이 좋고 솜이불이 좋고 모시저고리가 좋다. 나는 이름난 디자이너의 옷을 입어 본 일도 또 입어 볼 처지도 안 된다. 다만 좋아하는 광고 구절은 있다.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해 마라 백작 부인이 남편을 위해 만들었다는...’ 옷은 정성이다. 시골에 살면서 또 몇 년전에 죽령대로를 걸으면서 무명옷에 기름옷[합성섬유]을 덧입을 수밖에 없었다. 그 옷을 만든 부인은 아마 독일계 미국인인지도 모른다. 그 부인네의 옷에서는 말을 타고 양떼를 모는 유목민족의 강인함이 느껴진다. 그 옷에서도 남편을 들판으로 내보내야하는 여인의 정성이 느껴진다.

 

조선조 말과 21세기에 걸치면서 나는 삼베-무명-명주 등의 풀옷에서 기름옷으로 팔색조처럼 칠면조처럼 또는 이 세상의 눈치를 보며 보호색을 띠고 살아왔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이든...‘유행 속의 바보, 유행 밖의 바보’라는 말은 어느 선생님이 사춘기에 가르쳐주신 말씀이다. 그러나 이제 ‘유행 밖의 바보’가 되어 살아도 무탈한 노년이 되었다. 한 벌의 옷으로 살고 싶다. 2012년 올 겨울은 유난히 줍다. 경제민주화라는 말도 들린다. 이 그늘에서 ‘우울하다.’는 말을 하는 집사람에게 소일거리를 위해 재봉틀을 사주려고 한다. 할머니의 손재봉틀은 아무래도 고쳐 쓰기에는 너무 낡았다.

 

웰 드레서 : 어떤 옷이 가장 아름다운 옷일까? 그런 상상을 해본다. 세상에서 제일 옷을 잘 입는 사람? Well Dresser-Dandy-멋쟁이와 옷을 잘 입는 사람은 사촌 쯤 되는 말일까? 남자 가운데 그 한 사람을 꼽으라면 나는 서슴지 않고 마하트마 간디를 꼽고 싶다. 그가 독립운동을 시작하고 걸친 한 벌의 옷! 그 옷은 스님의 가사나 로마나 그리스 인들의 옷들과도 닮았지만 종교적인 냄새가 덜해서 내게 친근감이 있다. 單純이라는 아름다움-素朴함에는 그의 성스러움과 인자함이 그러면서 강인한 의지가 엿보인다. 역시 옷은 옷보다는 그것을 걸친 사람 그 눈빛에서 빛을 발하는 것이 아닐까?

 

여성들 가운데 멋쟁이를 꼽으라면 아무래도 아무것도 걸치지 않는 태초의 모습대로의 그 모습이 가장 아름답다고 할밖에...비너스를 다듬은 그리스의 조각가-보티첼리-보나르-모딜리아니 등등 당대의 화가들이 여인의 아름다움을 탐색하기 위해서는 여인의 옷을 한 꺼풀씩 벗기는데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야만 했었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옷장을 정리하면서 의외로 몇 벌 안 되는 옷들이 기억에 새롭다. ‘좋은 집은 살기에 편하지만 비싼 옷은 움직이는데 불편하다’는 말씀이 귀에 새롭다. 중국에 ‘남자들은 낮에는 비싼 옷을 사주려 힘들고 밤에는 그 옷을 벗기느라 힘들다.’는 말이 유행한다고 한다. ‘제수씨들 눈도 있는데 형님! 면도도 좀 하고 옷도 좀...’, ‘손자들 데리고 나가려면 옷 좀!’이런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면도를 하려다가 탐욕에 찌든 내 눈동자를 본다. 그렇다. 아름다움이란 – 멋있다는 것은 결국 눈동자를 통해 感知된다. 옷이 날개라면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다’는 말도 있고 ‘탐욕과 사치는 날개를 달지 않고 하늘을 난다.’는 말도 있을 수 있다.

옷을 정리할 것이 아니라 남은 옷들이 밭일로 닳고 헤질 때까지 입고 빨면서 풀 뽑고 나무를 쪼개고도 그래도 시간이 남으면 그 때 옷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련다. *

 

 

화투장보다 작은 이 사진의

모자와 털옷은 어머니가 밤을 지샌 .....

 

완쪽이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

그 셔츠도 어머니의 솜씨였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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