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촌가는길

慶州(경주)의 宮城(궁성)은 어디에...[지도에서 보는 신라 육촌을 찾아서]

양효성 2012. 1. 19. 23:25

 

            慶州(경주)의 宮城(궁성)은 어디에...

                                          [지도에서 보는 신라 육촌을 찾아서]

 

  朴赫居世가 나라를 연 지 21년만에 城을 쌓아 金城이라 하고 26년에 宮城을 지었다 하니 결론적으로 궁성이 제대로 처음 선 것은 대략 BC30년 쯤이다. 왜 外敵을 막는 城을 먼저 쌓았을까? 성을 쌓기 10餘年 前 혁거세 8년에 왜적이 침범했다는 기록[倭人行兵欲犯邊聞始祖有神德乃還]이 三國史記에 남아 있다. 평화롭던 이 땅의 사람들이 왜 갑자기 연합을 서두르게 되었을까?

 

長安에 도읍을 한 前漢의 孝宣帝五鳳元年에 朴赫居世가 서라벌의 居西干으로 옹립되었는데 그 혁거세는 고허촌의 소벌도리가 양산 기슭 나정에서 큰 알을 발견하고 그 알을 사람으로 키워 인물이 만들었기 때문인데 그 고허촌이 육촌 가운데 하나이다.

당연히 혁거세 즉위 이전 이 마을의 여러 곳에 부락을 이루며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그 사람들을 三國史記(이하 史記)에서는 ‘朝鮮의 遺民’이라 했고, 三國遺事(이하遺事)에서는 이 땅을 辰韓 또는 秦韓이라고 부른다면서 진시황의 폭정으로 떠나온 사람들을 馬韓(마한)이 그 나라 동쪽을 떼어주었다는 토박이의 말을 인용한 後漢書의 기록과 함께 그들은 燕나라 遺民이라는 최치원의 설도 함께 소개하고 있다. 아무튼 이들이 移住民이라는 논리에는 異見이 없다.

 

혁거세를 세운 여섯 마을의 사람들은 로마의 건국신화와 매우 닮았는데 왜 세월이 지나고 이들이 모여 왕을 추대하고 나라를 열게 되었을까? 혁거세 8년에는 倭人이 침범했고 19년에는 卞韓이 나라를 들어 항복했고, 21년 金城을 쌓을 때에는 高句麗의 동명왕이 나라를 열고, 30년에는 樂浪이 침범했고, 38년에는 瓠公을 馬韓에 파견하여 외교에 힘쓰고, 40년에는 백제가 개국을 했고, 53년에는 東沃沮의 사자가 말20匹을 바쳤다고 史記는 전하고 있다. 이런 주변 정세는 모두 신라가 승리하는 분위기로 서술되고 있는데 이 기록들이 慶州(경주)에 기반을 둔 一然 스님이나 7세기 신라의 覇權을 염두에 둔 王家의 史臣이 혹 결과론에 입각한 선입견을 가진 것은 아닐까?

 

  재위 26년에 지었다는 혁거세 당시의 궁성은 오늘날 그 자리는 알 수 없지만 遺事에 新羅가 한참 융성했을 때 王京에는 17만8천936戶라고 적혀 있다. 1가구 5인으로 대략 90만이었다는 추정을 하며 학계에서는 말이 많았다. 약 1천년 뒤 영조 때에 조선8도 인구가 700만, 서울이 17만 쯤 이었다는 구체적 기록으로 미루어 분명 단층이 주조를 이루었을 당시의 주거를 연상하면 무리가 있어 보인다. 단순 비교는 금물이지만 영조 때 어엿한 대도시였던 慶州府에 17,210戶, 남자 29,313, 여자 41,578명으로 모두 7만이 살았다면 그 감소는 수긍하기 어렵다. 영조 당시와 비교하여 강역이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 지금 경주의 인구는 2009년 기준으로 106,571가구에 272,331명으로 영조 이래 150년 사이에 5-600%의 증가율을 보이는 셈이다.

 

물론 徐羅伐의 공간적 범위를 어느 정도로 보느냐는 문제이지만 ‘1천360坊 55리里와 35개 金入宅(대저택)’을 추적해 본다면 합리적 해석이 나올 법하다. 중국의 인구는 20세기에 들어 4-5억 하다가 21세기에 들어 14억을 상회하고 있는데 영토가 별반 달라지지 않은 漢나라 때, 그러니까 우리의 四國時代[고구려-백제-가야-신라]에 약 5천만으로 지금 남한 인구와 비슷했는데 혹 비교연구로서 가치가 있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지금 천마총 앞에는 ‘新羅王京道’라는 한 장의 지도가 걸려 있다. 이 지도를 살펴가며 遺事가 지시하는 대로 혁거세 당대 6부의 유래를 더듬어 봄으로써 알 수 없는 왕궁의 자리가 어디쯤일까 각자 상상해보기로 하자.

 

    

사진 1의 중심에 첨성대가 있고 왼쪽에 형산강, 상단에 가로지르는 북천이 보인다.

 

사진2의 중앙에도 첨성대가 보이고 정북에 백률사와 금강산이 보인다. 다섯째 가리촌과 연관이 있다.

 

약 200년 전의 경주 지도에도 역시 첨성대가 보이는데 보이는 것은 온통 고분들이다.

중요한 것은 지금도 일부가 남아있는 읍성인데 동서남북의 누문이 있고 정방형으로 되어 있다. 

 왼쪽 강에 다리가 놓여 있는데 이 다리를 지나 김유신 묘를 지나는 내륙의 통로가 열린다. 

 

 

 

 

 

   첫째는 알천양산촌(閼川楊山村)이니 그 남쪽은 지금의 담암사(曇嚴寺)다. 촌장(村長)은 알평(謁平)이니 처음에 하늘에서 표암봉(瓢嵓峰)에 내려왔으니 이가 급량부(及梁部) 이씨(李氏)의 조상이 되었다(弩禮王 9년에 部를 두어 及梁部라고 했다. 고려高麗 태조太祖 천복天福 5년 경자庚子(940)에 중흥부中興部라고 이름을 고쳤다. 파잠波潛 · 동산東山 · 피상彼上의 동촌東村이 여기에 소속된다).

* 曇嚴寺는 경주시 탑동의 오릉(五陵) 남쪽에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농경지로 변하였으나 당대에는 전불칠처가람(前佛七處伽藍)의 第 7가람으로 서청문에 있었다. 五陵은 遺事에 혁거세의 五體를 갈라 장사지낸 능으로 기록되어 있다. 지도의 7시방향에서 ‘오릉’을 찾으면 그곳에 바로 표암봉과 李氏 시조를 모시는 숭덕전이 있다. 인터넷에 그 사진들이 나와 있다.

   둘째는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인데 촌장(村長)은 소벌도리(蘇伐都利)다. 처음에 형산(兄山)에 내려왔으니 이가 사량부(沙梁部 : 梁[liáng]은 道[dào]라고 읽고 涿[zhuō, zhuó]으로도 쓴다. 그러나 역시 道라고 읽는다) 정씨(鄭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남산부(南山部)라 하여 구량벌(仇梁伐) · 마등오(麻等烏) · 도북(道北) · 회덕(廻德) 등 남촌(南村)이 여기에 소속된다(지금이라고 한 것은 高麗太祖 때에 설치한 것이다. 아래도 이와 같다).

 

 

* 형산은 이 지도의 12시 방향 흐릿한 강줄기에 있는데 바로 포항을 지나 동해로 빠지는 형산강 하구를 가로막는 산이다. 경주에서 7번 국도를 타고 형산강을 따라 드넓은 들판을 지나며 포항시로 들어서면 강은 갑자기 칼로 자른 듯 협곡 사이로 빨려 들어간다. 협곡의 남쪽을 형산(兄山), 북쪽이 제산(弟山)으로 이 둘을 모아 兄弟山이라 한다는데 여기 경순왕의 유명한 전설이 있다. 형제산이 끊어지기 전에는 남천과 북천, 기계천의 물이 안강 일대에 모여 호수를 형성했고 범람하면 경주까지 그 피해를 입었는데 형산포구를 가로막은 형제산을 끊어 동해로 흐르게 해야 한다는 무당의 말을 듣고 경순왕이 神力으로 산맥을 끊었다고 한다.

아무튼 이 지도의 왼쪽에 세로로 북쪽으로 흐르는 물이 남천이자 형산강의 상류요 명활산성에서 왼쪽으로 가로지른 것이 오늘의 북천으로 이 두 물이 포항으로 흘러간다고 보면 좀 수월할 것이다. 아마 先祖가 처음 형산(兄山)아래에 터를 잡은 것으로 생각되는 村長 소벌도리(蘇伐都利)가 어느 날 蘿井옆에서 얻어 기른 아이가 바로 朴赫居世이니 그는 신라 시조의 父王이나 다름없다.

 

지난 10월 말 경부고속철도가 지나가는 경주시 내남면 덕천리 구간에서 고허촌의 유적이 대량 발굴되면서 이들의 정체 규명에 비상한 관심이 쏠리고 있다니 틈이 나면 이 유적지를 둘러 볼 일이다.

   셋째는 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이다. 촌장(村長)은 구(俱 : 仇라고도 씀) 례마(禮馬)다. 처음에 이산(伊山 : 皆比山이라고도 함)에 내려왔으니 이는 점량부[漸梁(梁은 涿으로도 쓴다)部], 또는 모량부(牟梁部)로 손씨(孫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장복부(長福部)라고 한다. 여기에는 박곡촌(朴谷村) 등 서촌(西村)이 소속된다.

* 지도의 10시 방향에 김유신 묘가 보인다. 지금 경주대학교 인근의 이곳에는 진흥왕, 무열왕 등등의 묘가 있고 또 영천을 지나 내륙으로 통하는 길목이다. 당연히 모량이라는 역참이 있었고 遺事에 ‘牟梁部’, ‘西村’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그 부근이 아닌가 싶다.

 

   넷째는 자산(觜山) 진지촌(珍支村 : 賓之 · 賓子 · 氷之라고도 한다)이다. 촌장(村長)은 지백호(智伯虎)로 처음에 화산(花山)에 내려왔으니 이가 본피부 최씨(本彼部崔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통선부(通仙部)라 한다. 시파(柴杷) 등 동남촌(東南村)이 여기에

소속된다. 최치원(崔致遠)은 바로 본피부(本彼部) 사람이다. 지금은 황룡사(黃龍寺) 남쪽 미탄사(味呑寺) 남쪽에 옛 터가 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최후(崔侯)의 옛집임이 분명하다.

* 지도의 중심에 분황사가 있고 그 아래 황룡사지가 있고 그 남쪽에 味呑寺가 있는데 一然 당시에 이미 폐사가 된 듯하다. 지금 삼층 석탑이 밭 가운데 있고 분황사에서 멀지 않으니 이곳이 東南村으로 移住한 진지부의 중심이 분명하다.

다음의 카페에 고향을 사랑하는 사람의 이런 글이 있다.

“지금의 외동읍 지역인 진지촌(珍支村)은 토함산 ‘새등이’(동쪽 등성이)에서 흐르는 ‘몰개내’와 ‘가내고개’에서 흐르는 ‘알내(謁川)’의 상류 유역과 지금의 외동읍 일대를 포함한 넓은 지역이었다. 지금의 낭산 일부와 인왕동 일부지역까지도 이 촌에 속해 있었다.”

 

그의 기사에서 눈에 뜨이는 것은 이곳의 별칭이 樂浪郡이었다는 것인데...史記에 ‘낙랑의 침범’이 자주 등장하여 漢水 이북의 낙랑이 어떻게 지리상으로 먼 金城을 공격했느냐는 의문이 있는데 만약 이 별칭이 오래 전에도 있었다면 이웃한 부족 간의 다툼으로 있을 수 있는 이야기다. 잠시 그의 글을 좀 더 인용해 둔다.

“...우리들의 고향 외동읍(外東邑)은 상고시대에는 진한(辰韓)의 12국중 사로국(斯盧國)에 속했으며, BC 57년 신라(新羅) 건국 당시에는 신라 6촌중 취산진지촌(약칭 진지촌)으로 출범하였다. 이후 진지촌(珍支村)은 6촌이 부제로 바뀌면서 진지부(珍支部)가 되었다가 신라 제3대 유리왕(儒理王) 9년에 본피부(本彼部)라는 이름으로 변경되었다.

65년 감알지가 국호를 계림으로 고치고, 307년 신라(新羅)로 국호가 바뀔 때에도 본피부(本彼部)로 남아있었다. 이후 고려태조 18년(935년)에 수도 금성(金城)이 경주(慶州)로 바뀌고, 987년에 동경(東京)으로, 1008년에 별칭인 낙랑군으로, 1012년에 경주(慶州)로, 1030년에 다시 동경(東京)으로, 1308년에 계림부(鷄林府)로 개칭될 때에도 우리들의 진지촌(珍支村)은 동반 이속하였다...”

 

 다섯째는 금산(金山) 가리촌(加里村; 지금의 金剛山 栢栗寺 북쪽 산)이다. 촌장(村長)은 지타(祗沱 : 혹은 只他)이다. 처음에 명활산(明活山)에 내려왔으니 이가 습비부(習比部) 설씨(薛氏)의 조상이다. 지금은 임천부(臨川部)라고 하는데 물이촌(勿伊村) · 잉구미촌(仍仇미村)·궐곡(闕谷) 등 동북촌(東北村)이 여기에 소속되었다.

* 지도 상단의 12시 방향에 백률사가 보인다. 또 다음의 두 번째 지도에도 백률사가 보이는데 그 뒤에 뚜렷이 금강산金剛山이라는 이름이 보인다. 이 지도에는 山이라고는 오직 하나 금강산의 이름이 보이고 남향으로 북천을 안고 있으니 화가의 의도에 풍수의 의식이 있었는지 궁금하다.

** 可里村은 ‘처음에 명활산에 내려왔다[初降于明活山]’고 하고는 강 건너 금강산으로 옮겼는데, 다음에 나오는 여섯 번째 명활산 고야촌은 처음에 금강산에 내려와서 명활산 고야촌을 이룩했으니 다섯째와 여섯째는 자리바꿈을 한 것인지 의아하다. 아무튼

 지도의 3시방향 명활산성의 해설은 이렇다.

경상북도 경주시 천군동과 보문동에 걸쳐 명활산에 있는 삼국시대 석축산성으로 사적 제47호. 둘레 약 6,000m. 축성연대는 알 수 없으나 〈삼국사기〉에 405년(실성왕 4) 4월 왜병이 명활산성을 공격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축성된 것이 분명하다. 축성방식도 신라 초기에 행해졌던 것처럼 다듬지 않은 돌을 썼다. 431년(눌지왕 15) 왜병이 이 성을 포위, 공격한 일이 있는 기록으로 보아 축성의 목적은 왜구의 침략에 대비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성은 수도 방어의 구실뿐만 아니라 임금의 거성(居城)으로 쓰던 곳이기도 했다. 473년(자비왕 16) 7월에 성을 개수하여 475년 정월에 왕이 이 성으로 옮긴 뒤 488년(소지왕 10)까지 사용했다. 당시 고구려의 남하정책에 대비했던 것으로 보인다. 554년(진흥왕 15)에 다시 돌로 쌓아 둘레가 1,906보였으며, 593년(진평왕 15)에 개축하여 3,000보가 되었다고 한다. 현재 이 성은 대부분 허물어져 몇 군데에서만 자연석으로 쌓은 옛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진평왕 때 개축한 부분으로 추측된다. 647년(선덕여왕 16)에는 상대등(上大等) 비담(毗曇)이 이 성에서 군사를 일으켜 반란을 꾀했다가 김유신에게 패한 사건이 전해지고 있다. 신라 주변에 나성의 기능을 가진 석축성 가운데 가장 먼저 축조된 명활산성은 선도산성(仙桃山城)· 남산성· 북형산성(北兄山城)과 함께 왜구로부터 수도를 방어하는 데 큰 몫을 했다.

 

  여섯째명활산(明活山) 고야촌(高耶村)이니 촌장(村長)은 호진(虎珍)이다. 처음에 금강산(金剛山)에 내려오니 이가 습비부(習比部) 설씨 (薛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임천부(臨川部)라 하니 물아촌(勿伊村) · 잉구미촌(仍仇彌村) · 궐곡(闕谷)둥 동북촌(東北村)이 이에 속한다.

* 명활산과 금강산의 이야기는 위에서 이미 언급했다.

 

 

 

 

2011년 가을 - 김성기 교수도 역시 100년 가까이 되는 첨성대의 옛 사진을 들고 첨성대 옆에 섰다.

그의 先親도 젊은 시절 이 사진첩을 들고 이 자리에 서보셨다고 한다.

이 자리는 확실하다.

이 자리에서 좌우로 고도를 복원하고 외곽의 왕릉을 확정하고 역사적 사실을 재구성하면 고도의 모습이 드러날 것이다.

지금 서울도 4대문과 주변의 왕릉을 그려보면서 당대의 윤곽을 재구성할 수 있듯이 말이다.

다만 의식이든 무의식이든 定都 600년 하면서 백제 한성의 역사와 풍납토성이 묻혀있는 것은 좀 의심스럽다.

 

 

 

 

이렇게 천마총 주변의 집들을 허물어 가는 것은 ...

 

아마 서라벌의 궁성을 찾기 위한 노력일텐데...

 

파헤친 구덩이와 쌓아올린 흙더미에서 천년의 시간이 되살아나길 기대해 본다.

 

    

      

*** 走馬看山으로 훑어 본 신라의 六部 또는 六村은 이상과 같다. 경주는 과연 어느 강가에 어느 鎭山을 두고 어떤 포부를 갖고 그들의 세력을 뻗치려 했을까? 보통 背山臨水의 한국적 읍촌은 대개 남향인데 慶州하면 우선 떠오르는 것이 南山이다. 강은 보문단지의 북천이 포석정에서 흘러오는 형산강을 만들어 포항의 접경의 兄山과 第山을 지나 동해로 흘러든다. 山은 南山이요 江은 형산강이라면 山도 江도 모두 北向하여 都邑을 정했다는 것인데 좀 이상하다.

 

그러나 그리스의 도시국가처럼 六村이 각자의 鎭山을 의지하여 실개천을 바라보며 成築을 하고 드디어 聯盟을 이룩하고 척박한 환경에서 내륙을 향한 의지를 관철했다면 그 또한 가상한 일이 아닌가?

 

한 때 수도이전을 두고 말이 많았다. 본이라는 시골에 서울을 두고 반쪽 국가를 유지하던 서독은 그 빈약한 서울을 기반으로 민주화를 이룩하고 드디어 섬처럼 고립되었던 통일 독일의 수도 베를린을 되찾아왔다. 집안과 평양 한성과 공주와 부여, 개성에 이어 임시라는 딱지가 있지만 강화와 부산 그리고 상해까지 한민족의 의지는 역사와 함께 수도에 집중되어 있었다. 역사가 승자의 기록만을 전승하는 것이 목적이 아닐진댄 더구나 영원불멸의 승리란 인간의 각성을 제외하고는 진정한 역사에 기록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있다면 당연히 興亡盛衰가 있기 마련이겠지만 무너진 王道에서 善意의 意志를 찾아보는 것도 무의미한 일은 아닐 것이다. 지방자치를 부정하는 여론이 급등하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협소한 생각이 아닐까? 작은 정부에 건강한 지방정부가 보다 지성으로 충전된 현대인들에게는 공동체를 살지게 하는 이상적인 길이 아닐까? 그래야만 진정한 개성이 획일주의를 극복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마한의 56국을 비롯하여 시군구 그리고 마을단위에서 각성한 인간들의 역사의식이 새삼스러운 때다. 아직도 임금을 그리워하는 정치행태가 국민들의 뇌리에서 쉬 지워지지 않는 현실을 보면서 역사를 다시 생각하는 투표의 해가 되었으면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