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세기 전 영조시대 우리 마을은? [오동촌이야기7]
지금도 오곡리를 이곳 사람들은 오동촌이라 부른다. 200년 전에도 그 이름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1757(英祖33년)에 시작해서 1765년에 출간된 輿地圖書에는 목천현의 지도가 있는데 11시 방향에 東軒(동헌)이 있다. 그 왼쪽에 사신이 머물고 국가에 대한 충성을 맹세했던 客舍(객사)가 보인다. 동헌 뒤의 산이 성거산이고 객사 뒤에 黑城山[흑성산]이 보인다. ‘黑城’의 ‘검다’는 ‘黑’은 혹 단국이래 의 검-곰-감 등등의 곰(雄)과 관계가 없는지 의아하다. 동헌의 오른쪽을 흐르는 산방천은 아우내에서 병천천이 되어 흐르고 흘러 오늘 날 세종시에서 금강과 합류해 공주 부여를 거쳐 강경을 만들고 장항에서 황해로 흘러든다. 여기서 부터는 중국으로 가는 뱃길이 열린다.
동헌에서 동쪽으로 청주경계까지 19리, 西쪽으로 천안 17리, 南으로 全義 22리, 北으로 직산 19리인데 옛길과 당시의 里수를 정확히 알아야 그 옛날의 모습을 재현할 수 있다. 파발마들이 달리던 연춘역은 지도에 표시가 없는데 동헌에서 산방천을 건너 오늘도 어엿한 용화사 부근에 있었다. 충남 보령에 있는 水營까지는 210里 2日半 旅程이고, 南으로는 공주에 있던 監營이 100리로 1日程, 北으로 서울까지는 247里 3日程인데 참고로 지금 목천인터체인지에서 경부고속도로로는 서울까지 대략 100Km가 안 된다.
오동촌은 어디에?
당시에는 읍내면을 비롯해 근동면 원동면 등 동서남북의 여러 면이 있었는데 어엿이 복구정을 지나 냇가를 오늘도 천안시 동남구 북면인 그 北面이 보인다. 그 북면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을까? 2010년 천안시 통계에는 2,315戶 男 2698 女2472 합계5170 이 살고 있다고 한다. 면적은 58.5㎢에 행정구역으로 법정리 13개리에 행정리 23개리, 63개 반과 27개 자연마을이 있다고 한다.
그러면 200년 전에는 어땠을까? 합계 16里의 677戶에 男1,457 女1,359 모두2,816이 살았으니 그 증가율은 두 배에 못 미친다. 이에 비해 당시 서울이 19만2천이었다미 지금의 1천만에 비하면 약 50배, 또 조선 8도가 732만이었다면 지금 남북한 약 7-8천만을 잡더라도 약 10배...북면의 인구는 증가가 더디고 도시 집중은 그에 비해 20배가 넘는다.
북면 16개 리의 인구는 다음과 같다.
伏龜亭里 官門 7里, 71戶 男147口 女210口/ 晩止里 15戶 男27 女20/ 孝道里 41戶 男132 女129/ 銀石里 40戶 男91 女61 [1914년 통폐합으로 동지동, 채동, 은석리]/ 蔡洞 47戶 男93 女57/ 好德 27호 男41 女59/ 檜村 57 男152 女120/ 梅堂 49호 男99 女102/ 社倉 27 男40 女49 / 梧洞 [20리] 55戶 男210 女100/ 沙村 60戶 男130 女128/ 典谷 49戶 男91 女93/ 卞正 52戶 男113 女104/ 納安 53호 男131 女81/ 高澗 25호 男39 女40/ 軍丹 10호 男21 女15
지금 ‘오곡리’로 되어있는 우리 마을 ‘오동’은 관아에서 20里 떨어져 있고 남자 210명 여자100명으로 모두 55채의 집에 나누어 산 셈인데 남녀 비율이 남다르다. 만지-전곡-납안 등등 지금도 이 마을 이름을 거의 그대로 쓰고 있으니 세월은 멀고도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아무튼 당시의 오동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그 이야기를 자료가 닿는 만큼 다음에 이어가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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