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左右水營에서 다시 생각하는 충무공-疏通과 現地化 그리고 獨尊

양효성 2011. 3. 20. 23:16

         左右水營에서 다시 생각하는 충무공

                                  -疏通과 現地化 그리고 獨尊

 

疏通이 이렇게 절실한 시대도 드물다. 民主主義란 결국 對話로 이루어지는 공존의 생활방식이다. 알고 보면 敎育도 勞使도 政治도 經濟와 宗敎 및

 

獨尊이라는 말은 我田引水로 오해되는 경우도 있지만 價値觀이 定立된 者의 個性이라고 할 수도 있고 부분적으로 카리스마[charisma]와 상통하는 면도 있다. 唯我獨尊은 ‘자아를 깨달은’ 부처의 말로 알려져 있지만 그를 대한 당시 全羅道民의 마음에는 진정 부처의 현신이었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가 그런 통찰과 결단을 보여주었다는데 있지만 말이다.

 

통찰력이 있고 또 민중과 동등한 마음이 바탕에 있고 그들의 초개같은 생명을 위해 희생하는 용기가 있는 그런 지도자가 언제 나타날지 陸史는 ‘曠野’에서 목놓아 울었는지 모른다.

 

忠武公은 柳成龍의 천거로 지휘봉을 잡았고 西厓는 지도를 맨 처음 李如松에게 건네준 사람이요 汝諧 또한 지도를 잘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亂中日記에서 보이듯 조선명필의 한 분이다. 水軍의 경력이 없음에도 현지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또 따랐다. 백제 멸망 후 千年間 倭寇와 싸운 遺傳子를 받은 갯가 사람보다 더한 專門家가 어디 있겠는가?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인 것이 現地化의 成功이었고 또 카리스마를 지탱하는 힘이었을 것이다.

그 한마디가 바로 ‘湖南이 없다면 나라가 없다’는 絶句가 아니겠는가?

 

봄바람이 매서웠지만 봄기운은 어쩌지 못했다. 南道에는 벌써 매화가 피어있었고 진도 우수영의 물살은 몹시 울고 있었다. 좌수영의 객사는 텅 비었고 안온했지만 허전함이 가시지 않았다. 어제는 우수영 오늘은 좌수영 그렇게 잠시 거닐어 보았다. 歷史란 事實의 記錄이다. 그러나 기록에서 演繹되고 屈折되는 思惟와 行動은 多岐多樣하다. 그 당시에는 그래도 朝鮮八道가 온전했고 丙子胡亂을 겪은 뒤 崇禎乙丑 그러니까 肅宗11년 1685년 汝諧 沒後 거의 2백년이 지나 명량대첩비가 세워졌다. 그런 渦中에 黨爭과 外交가 있었다. 외교와 국정원을 겸한 당시 통신사의 보고와 그 조작된 보고를 확대 재생산한 무리 그리고 청태종 앞에서 明을 대신하여 목을 내놓은 꿋꿋한 외교관의 덕택으로 조선천지가 피바다가 되고 임금이 롯데백화점앞에서 머리를 풀고 땅바닥에 엎드린 당당한 自主外交가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庚戌國恥를 겪고 나서야 水營이 史蹟으로 보존되고 있다. 그리고 지금 우리 반 토막의 국토와 해안선을 지키는 水軍들은 어떤 충무공을 모시고 있는지?

 

 

울돌목을 바라보는 충무공

 

울돌목을 사이에 두고 충무공이 마주 보인다.

 

 

 

 

 

 

호남이 없다면 나라가 없다

 

 

1685년 세워진 명량대첩비 탁본

 

 

우수영 역사관에서 바라보이는 진도대교

 

진남관에서 발라본 여수항

 

진남관

 

 

일제는 임란 300여년 뒤 이 자리에 공립보통학교를 세웠다.

 

 

 '與敵同死'하리라던 충무공은 지금 우리 곁에 없다.

 

 

 

백과사전에는 좌우수영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전라좌수영은 성종 10년(1479) 순천 내래포에 수군절도영을 설치하고 수군절도사를 둔 이래 고종 32년(1895)에 혁파될때까지 400여년간 조선수군의 주진으로서 남해안 방어를 위한 전략적 요충의 수군영이었다. 전라좌수영은 성종 10년(1479) 전라도수군절도사영이 전라좌수영과 전라우수영으로 분리되면서 약 84년간 내려오던 내례만호진이 혁파되고 그 곳에 전라좌수영이 자리잡아 전라도서남해안 좌측의 해상방어를 담당하게 되었다. 특히 이곳은 임진왜란시에는 조선수군의 주력이었던 전라좌수군의 본영으로서 해상의병의 근거지였으며, 고종 32년(1895)에 혁파될 때까지 400여년간 조선수군의 주진으로서 남해안 방어를 위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설영될 당시 수군영의 대체적인 면모는 갖추었겠지만, 『난중일기』에 의하면 1591년에 충무공이 전라좌도수군절도사로 부임하면서 한층 체계적으로 제반 시설이 정비되었다. 그리고 1773년을 전후하여 절도사 이영수에 의한 성곽 및 관아의 대대적인 중창으로 영성의 면모는 한결 일신되었다. 헌종 13년(1847)의 『호좌수영지』에는 전라좌수영의 영성과 병력, 군미, 병기 등이 상당한 규모로 기록되고 있어서 조선후기까지도 여전히 중요한 수군영으로서 존속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고종 32년(1895)에 영이 혁파되고 1916년에 망해루 앞쪽의 해면매축으로 진남관을 제외한 성벽과 많은 건물들이 빠른 속도로 없어지게 되었다.

 

해남에서 부안까지의 서해안을 경비했던 전라우수영은 진도를 바라볼 수 있는 명량 해협과 해남의 남단 화원 반도에 접해 있고, 울돌목이 앞으로 펼쳐져 있다. 고려말 1377년(우왕3) 무안 당곶포에 수군처치사영이 설치된 뒤, 조선 세종 22년(1440)에 현재의 위치인 해남 황원관에 옮겼으며, 세조11년(1465)에 수군절도사영으로 승격ㆍ개편되었다. 당시 이곳은 해남현으로부터 서쪽으로 70리, 진도군으로부터 북쪽으로 30리 떨어진 현지에 위치하였으며 성종대(1479)에 순천 내례포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영이 따로 설치된 후 이곳은 전라우도 수군절도사영(약칭 전라우수영)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편 본영의 관할구역은 시대에 따라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으나, 임진왜란시 한때 전라우도 연해지역 14관을 관할하였을 만큼 전시에 있어서 군사적 규모와 역할이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1597년 정유재란때 본영의 수사 김억추는 통제사 이순신과 더불어 칠천량패전 이후 남은 소수의 병력과 영내의 남녀노소를 총동원하여 명량에서 서쪽으로 상륙을 시도한 일본군을 대파하였다. 이것이 바로 정유재란 중 최대의 전과를 거둔 명량대첩으로, 명량은 본영의 선창으로부터 불과 5리도 떨어져 있지 않은 급조류의 해협으로 천험의 관방을 이룬 곳이다.

城址는 해남군 문내면 선두리 산 1661번지라는데 여기까지 걸어보지는 못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