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彌勒寺址石塔 : 廢寺址의 斷想[3] -위로는 正法을 넓히시고 아래로는 ...

양효성 2010. 11. 22. 00:32

 

             彌勒寺址石塔 : 廢寺址의 斷想[3]-

                          위로는 正法을 넓히시고 아래로는 그 法을 敎化하게 하소서...

 

전북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97번지에는 千年 전 백제 무왕[600-641]의 시절에 佐平인 沙乇積德의 딸이자 왕후가 세운 웅장한 절이 있었다. 뒤로는 430m의 미륵산이 있고 그 산에는 고조선의 마지막 왕인 준왕이 위만에게 왕위를 빼앗긴 후에 남쪽으로 옮겨 와서 마한의 근거지가 된 箕準城[기준성]이 있다. 이 산성에서는 돌화살촉, 포석환 등 유물이 출토되기도 했고 뒷날 왕건이 후백제의 신검과 견훤을 쫓을 때 이곳 마성에서 신검의 항복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길이 1,822m, 높이 4~5m에 폭이 5m나 되는 대규모의 성이다.

 

전시장에는 1915년의 흑백사진이 확대되어 있다. 산 아래 몇 채의 초가-그리고 무너진 돌무더기...그 돌무더기를 주어모아 시멘트로 지지하여 한 모서리만 세운 상처투성이의 탑은 마치 온몸을 붕대로 칭칭 동여맨 서있는 미이라와 다름이 없었다. 의 모습과 것이 전시되어 있다. 1962년 419와 516을 거친 이듬해다. 그해 겨울 12월 20일에 이 탑은 국보 11호로 등록되었다는데 나라의 주목을 받는데 그렇게 긴 시간이 걸렸을까?

 

아무튼 지금도 당간지주가 서있고 그 뒤에 거대한 목탑이 서있었고 좌우에

9층의 석탑이 균형을 이루고 있었는데 왼쪽에 6층을 일으켜 세운 돌무지가 14.24m였다니 거의 5층의 높이다. 돌을 다듬어 그 높이를 그 시대에 쌓아 올렸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비행장처럼 텅빈 폐사의 터에서 여기 저기 미륵산을 등지고 솟아오른 절집을 재구성하는 상상에는 한계가 있다. 전시장의 장난감같은 복원 모형을 확대하고 수습된 유물을 여기 저기 놓아 보고 또 사람들이 불경을 외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그들의 말씨는 지금 방영되는 근초고왕과 비슷했을까?

 

지금 그 돌들은 모두 해체되어 땅에 길게 누었다. 대신 동탑을 재현하여 놓고 서쪽에서 해체 복구 작업을 하고 있는데 오히려 그 현장을 볼 수 있다는 것이 탑이 세워지는 과정을 볼 수 있는 기회인지도 모른다.

 

基壇은 목탑과 같이 낮게 1단을 쌓고 塔身은 1층 몸돌에 각 면마다 3칸씩을 나누어 중앙에 문을 만들어서 사방으로 출입할 수 있게 되었다. 탑 안의 중앙에는 거대한 사각형 기둥을 세워 위층을 받치게 했다. 1층 몸돌의 네 면에는 모서리기둥을 세웠는데, 위아래가 좁고 가운데가 볼록한 목조건축의 배흘림기법을 따르고 있다니 목탑에서 석탑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충실하게 보여주는 중요한 문화재라는 말에 수긍이 간다.

 

기둥 위에도 목조건축에서 栱包 등을 받치기 위해 平柱 위에 건너지르고 창방 위에 얹히는 가로재인 平枋과 昌枋을 본떠 설치하였다는데 아무튼 목조건물의 지붕국조를 연상하면 된다. 지붕돌은 얇고 넓으며, 네 귀퉁이에 이르러서 살짝 치켜 올려져 있다.

 

석탑 舍利孔에서 금동사리호와 함께 발견된 靑銅盒 6점을 열어보니 그 가운데 뚜껑에 백제 고위 관리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것도 있었다고 한다. 上部達率目近이라고 날카롭게 새겨진 글은 ‘상부’에 사는 ‘달솔’(백제 16관직의 두 번 째) 벼슬인 ‘목근’이라는 의미로 다수의 사람들이 공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금으로 만든 구슬 370여점을 비롯해서 고리, 소형판과 유리구슬 등 4800여점에 이르는 유물들이 수습되었다고 한다. 이 모두는 기록이 아닌 당시의 실물들로 천년 전의 생활을 직접 볼 수 있다는 데에 의미가 있다.

 

 

이 절에서 왕궁리의 석탑은 5Km 정도로 10리 남짓이다. 마을이 형성되기 전에는 차도에서 이 탑들이 뚜렷이 보였었다. 여기서도 신라를 거쳐 고려와 조산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기와들이 출토되고 거기에 연호와 장인들의 이름이 새겨지기도 했다. 이 절이 시대가 바뀌어도 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백제가 스러지고 고구려의 왕손 안승이 금마에 주둔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 금마와 이곳은 어떤 관계가 있었을까? 신라가 망할 때 신검과 왕건이 자웅을 겨룬 곳도 여기였다는데...

 

마차의 휘갑쇠[輨]가 완벽한 모양으로 출토돤 것도 눈길을 끌고 중국식으로 유약을 흘린 토기도 눈에 뜨인다. 무기도 있고 꺾쇠도 있고 그릇도 있다.

 

누가 만들었는가? 금판에는 佐平인 沙乇積德의 딸인 왕후가 세웠다고 되어 있다. 왜 세웠는가? 大王陛下年壽與山岳...대왕께서 산처럼 오래 사시고... 그리고 上弘正法下化蒼生 위로는 바른 법을 넓히시고 아래로 만물을 敎化하시기를 바라면서... 어느 고위 공직자가 부임하면서 계층간, 세대간, 종교간 등등 모든 갈등을 치유하고 소통하는 것이 국정목표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올바른 法- 즉 哲學이 중요한다는 것은 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매 한가지다. 이 절을 지은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가? 일본 나라[奈良]에 목탑이 이와 닮았다고 한다. 그러니 그  한 갈래는 알 수가 있다.

 

 

430m의 미륵산을 배경으로 세 基의 탑이 서있었다는데...

 

동쪽에 새로 세워 본 동탑

 

당간지주로 보아 절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는데...

 

해체 복원 과정을 볼 수 있는 것이 오히려 기회

 

해체된 석재들...

 

6층만 남았던 석탑의 축소 모형

 

기와에는 인물상도 있고...

 

글이 새겨진 기와...

 

고려시대의 기와

 

갑옷과 편자 화살촉 등...  

 

쇠못과 ...

 

청동거울 빗치개

 

도자기와 茶문화

 

石簡과 토기의 문자

 

마차의 휘갑쇠

 

벼루와 유약이 흘러 내린 도기

 

사리를 담은 壺

 

사리발굴현장 사진 왼쪽 아래 왕후의 이름이 새겨진 金板이 보인다.

 

금판의 내용

 

서해안의 탑들...

 

 

 

  전시관에는 서해안의 옛절과 탑들이 소개되어 있다. 자세히 보면 527년 法興王 보다 앞서 384년 枕流王 때 백제에 들어온 불교의 전파 과정을 그려볼 수 있다.

  언제 다시 미륵산에 올라 산성을 둘러보고 아래로 왕궁리의 들판을 굽어 본 뒤 다시 이 절에서 고려 때에 스님 일연이 薯童 이야기를 이곳에 빗대었다는데 왜 그랬는지 다시 생각해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