廢寺址의 斷想- 충남 서산 普願寺 터
우리의 古代史는 어디로 갔는가? 간 것은 세월이지만 가지 않은 것은 터다. 그 중간쯤에 있는 것이 풍속이다. 예를 들면 쌀밥이라든지 된장이라든지 文學이나 信仰이나 葬禮의 風俗 등이다. 이런 풍속이 바뀌는 순간의 계기와 진행과정을 추적하여 줄거리를 세우는 것이 歷史인지 모른다. 그 過程에 현재든 미래든 과거든 우리네 삶이 어정쩡하게 자리하는 것이어서 그 역사에서 지금의 座標를 두리번거리는 것이 또 衆生들이 歷史를 읽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한 곳의 폐사지에서 그 절을 세운 사람 그 절에 모인 사람 - 그 사람들이 옷을 입고 밥을 짓고 아랫목에 이불을 들쓰고 눕고 또 이웃과 더불어 이른바 사회생활을 하는 그런 모습을 복원하면서 오늘 내가 숨쉬고 있는 하루의 의미를 찾는 그런...
내 개인의 역사를 저 폐사지에 견주어보면 참으로 초라하기 그지없다. 오늘 아침 그 폐사지를 그려보면서 다짐하는 것은 내 역사는 저 절터처럼 거룩해서는 안 되겠다는 것이다. 더욱 초라해지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것이다.
원주의 법천사, 양주의 회암사, 여주의 고달사...보령의 성주사를 비롯한 九山禪門 등등 온 나라에 셀 수 없는 폐사지가 있거나 그 폐사지가 발굴되고 복원되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광주 신창동의 유적처럼 2천년 전의 한 마을이 고스란히 되살아나기도 한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내 발밑에는 어떤 역사가 있었는지 보도블록을 조심스럽게 밟아보는 것인데...
보원사는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龍賢里)에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아침저녁 法鼓가 울렸다고 한다. 백제의 미소로 널리 알려진 마애삼존불에서 걸어서 20분 남짓이면 이 절터에 이른다. 산 너머 수덕사 또 인근에 古刹의 운치를 간직한 개심사 등등 이 부근은 한 시절 불교의 성지가 아니었나 싶다.
지금 사적 제316호로 지정된 절터는 발굴 작업이 계속되고 있지만 산책하는데는 지장이 없다. 北魏 樣式의 6세기 중엽 금동불입상과 8세기 후반으로 추정되는 금동불입상이 출토되었다고 하는데 지금 절터에는 다섯 점의 보물이 건재하다. 자료는 블러거와 백과를 베껴서 정리해보자.
5층석탑(보물 제104호)·
당간지주(보물 제103호)·
석조(石槽:보물 제102호)·
법인국사보승탑(法印國師寶乘塔:보물 제105호)·
법인국사보승탑비(法印國師寶乘塔碑:보물 제106호)
또한 국립중앙박물관에 일제강점기에 옮겨진 철불 1구와 8세기로 추정되는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철불좌상도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절터에서 옮겨온 것으로 전하고 있는데 이곳에서 출토된 것으로 미루어 짐작하고 있다고 한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당간 지주, 공주 갑사에는 드럼통을 쌓아올리듯 支柱를 밭치고 올라선 장엄한 幢竿이 하늘을 찌르고 있다.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려가며 하늘을 바라본다. 그 곁에 목욕탕만한 石槽가 있는데 절의 규모를 상상하게 한다. 개울을 건너면 五層塔이 서있고 그 뒤로 대웅전의 주춧돌들이 드러나 있다. 절터의 뒤 쪽에 한 깨 이곳에 살았던 法印國師 坦文스님의 고 업적을 기린 碑石과 寶乘塔이 있다. 이 모두가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절터를 거닐어 본다. 千年의 역사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坦文은 900년 신라 효공왕 3년에 태어나 975년 고려 광종 26에 타계한 역사적 전환기의 스님이다. 교종의 입장에서 선종을 수용하여 교선융합에 이바지하셨다고 한다. 속성은 高氏. 자는 大悟. 廣州 출신. 일찍이 출가하여 鄕聖山의 옛 절터에 암자를 짓고 수년 동안 공부했다. 북한산 莊義寺 信嚴에게 華嚴經을 배우고, 15세에 구족계를 받았다.
戒行이 출중하여 고려 태조가 別和尙이라 불렀다. 926년(태조 9) 왕후가 임신하자 왕명으로 아들을 낳도록 기도를 드려 광종이 태어난 후 더욱 총애를 받았다. 九龍山寺에서 華嚴經을 강의할 때에는 새가 날아들고 범이 뜰에 엎드렸다는 말이 전해온다. 942년 鹽州와 白州에 메뚜기의 猖獗하자 大般若經을 강하여 물리쳤다. 혜종과 정종이 지극히 공경했으며, 광종은 王師로 봉하여 歸法寺에 살게 하고 弘道三重大師의 호를 올렸다. 974년(광종 25) 國師가 되어 가야산으로 옮길 때 왕이 왕후와 백관을 데리고 전송했다. 이듬해 3월 普願寺에서 가부좌하고 逝世했다. 그래서 여기 탑비가 섰는지 모른다. 꼭 1천년 전 이야기다.
탑호는 寶乘이며, 시호는 法印으로 이 이름이 지금의 보물이름이 된 것이다. 탑비는 법인국사가 입적한 3년 후인 고려 경종 3년(978)에 조성된 것으로 탄문스님의 생애와 왕실과 관련된 내용 등 총 5,500여자의 비문을 음각했다. 비신 높이 2.3m, 폭 1.15m.
전체적으로 귀부, 비신, 이수가 완전히 남아있는 전형적인 고려 초기의 양식이다. 귀부의 龜甲은 납작하게 조성하여 땅에 찰싹 엎드리고, 龜頭는 여의주를 입에 문 용머리로 조각하였고 귀갑면에 6각의 격자무늬를 조각했다. 烏石으로 된 비신의 앞뒤에 해서로 비문을 음각 하였는데 글씨의 크기는 직경 1.5cm이며 앞면의 題額은 직경 4cm의 전서로 각자했다.
이수부는 문양화된 구름을 가운데 두고 두 마리의 용이 머리를 들어 서로 마주보게 새겼다. 이수의 앞면에 '가야산, 보원사, 고국사제 중시법인 삼중대사지비'라 각자되었고 광록대부태승한림학사전내봉령 김정언이 비문을 짓고 유림낭사천대박사 한 윤이 비문과 전액을 썼다. 김승겸이 刻字했다. 원문은 조선금석총람에 있다.
당간지주- 철통의 주춧돌이 뚜렷이 보인다.
오층탑과 비석과 보승탑
당간지주에서 이 도랑을 건너 대웅전 터가 있다.
오층탑
답사에 나선...
S여대 사학과 학생들은 버스를 이용하여 마지막 여름을 보내고 있다는데...
비석의 전면
해서체 글씨는 잘 안보이지만 ... 流麗한 筆勢다.
측면
보승탑...
서까래와 추녀...
추녀를 우러르면 하늘이 펼쳐져...
정면
발굴중
저 산 너머 수덕사가 있다.
이 주변에는 온통 불교 유적
석조는 보물인데 규모가 크다.
전신주 끝에 '백제의 미소' 마애불이 있다.
서산공영버스터미널에서 운산행 시내/시외버스는 10-15분간격으로 운행되며, 40분 정도 걸린다고 한다. 자가용으로는 서해안고속도로 서산I.C에서 내려 마애삼존불 표지판을 따라가면 길은 외줄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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