羅州 新村里 金銅冠 - 나주이야기[2]
광주시 북구 매곡동 산83-3에 있는 국립광주박물관 2층에는 국보 295호인 羅州 新村里 金銅冠이 전시되어 있다. 아마 나주에 2012년인가 고분군 옆에 국립박물관이 들어서면 그곳으로 자리를 옮겨야 할 것이다. 어느 세력가의 금으로 만든 모자와 우리 고대사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우선은 전문가들의 연구를 나름대로 풀어가며 문화재청의 자료를 一瞥해보자. 이 금동관은 나주 반남면 신촌리 9호 무덤에서 발견되었는데 높이 25.5㎝이고 금과 동으로 만들어졌다. 9호 무덤은 1917∼1918년 사이에 일본이 먼저 발굴했으니 거의 100년 전 일이다. 이 금동관은 삼국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外冠과 內冠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말은 아마 宕巾처럼 머리에 직접 닿는 부분과 장식용 겉 테두리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그렇다면 의식에서 한번쯤은 실제 착용한 것이 아닐까?
외관은 나뭇가지 모양의 장식 3개를 머리에 두른 띠 부분인 大輪에 꽂아 세웠으며, 내관은 반원형의 동판 2장을 맞붙여 머리에 맞게 만들었다. 기본 형태는 신라 금관과 같으나 머리띠에 꽂은 장식이 신라관의 ‘山’자 모양이 아닌 복잡한 풀꽃 모양을 하고 있어, 양식상 더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내관인 모자는 전북 익산 입점리(사적 제347호)와 일본 구마모또[熊本]에서도 비슷한 것이 출토된 바 있어 백제와 일본과의 문화 교류관계를 살피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는데 이는 이 유물말고도 방증의 자료가 많다.
금동관의 주인은 당시 이곳을 지배하던 세력의 최고 지도자였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다만 이 금동관이 현지의 토착 세력에 의해 제작된 것인지 백제로부터 하사받은 것인지에 대하여는 미상이다.
문제는 뎅그마니 박물관 유리상자를 통해 보는 그 모습이 아니라 이 관을 썼던 사람의 생활반경, 즉 주거지와 死後의 무덤이다. 나는 그 장소가 무척 궁금했다. 이 관은 여러 번 보았지만 이렇게 관심을 둔 것은 얼마 전의 일이다. 아무튼 그 무덤이 사적(史蹟) 제77호로 지정되어 있다니 우선 그곳에 가보고 싶었다.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다가 또 푸른 하늘이 보이는 이상한 霜降에 나주로 차를 몰았다. 문화해설사인 金志勳 씨가 안내를 도맡았다. 우선 자미산성에서 바라보는 이 분지가 대단했다. 서해안의 낮은 지형을 勘案한다 해도 98m의 이 산에서 가까이는 영암 월출산과 멀리는 무등산이 보이고 이 원의 중심에서 분지는 광활했다. 영산강이 샛강을 거느리고 흐르는 흐름은 농경으로도 부족함이 없고 그 강은 목포로 굽이굽이 흐르고 있으니 당연히 완도의 청해진과도 먼 거리가 아니다. 청해진 이야기도 꼭 그 한 곳만이 무역의 거점이 아니라 다도해만큼 많은 중소상인이 산재했을 것이고 내륙으로 연계된 중소상인과 거간은 왜 또 없었겠는가? 이 對中對日貿易이 순조롭지 못했을 때 倭寇 혹은 海賊이라는 이름으로 數千年 史書를 어지럽게 만들었던 것 아닌가?
却說하고 이 땅은 분명 한 집단이 수 세기에 걸쳐 번성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자미산은 자매산 등등 비슷한 이름으로 전국에 散在한다고 하는데 城을 일컫는 ‘잣’과 山을 뜻하는 ‘메-뫼’가 어우러진 吏讀式 借字로 ‘잣뫼-山城’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또 테메식 산성으로[산허리를 감으면서 돌을 쌓아올리는 산성] 성터가 지금도 완연히 남아있다. 지명으로 말하자면 이곳에서 멀지 않은 장흥이 백제 때는 古馬彌知縣(고마미지현)이었는데, 757년(경덕왕 16)에 마읍현(馬邑縣)으로 개칭했다고 한다. 馬韓을 연상케 하는 馬邑도 문제지만 古馬彌知로 말하면 九州의 熊本과 발음이 같다. 이것은 영국의 York - 미국의 New York하는 식으로 이 지방 사람들이 달팽이처럼 지명을 짊어지고 이주했다는 방증이다. 熊本은 우리말로 ‘구마모또[くまもと]’정도로 읽고 있는데 발음이 꼭 같다는 논증은 생략한다. 다만 곰나루나 곰과 비슷한 지명이 首邑이라는 것은 이미 정설이라는 것만 밝혀둔다. 또한 內冠인 帽子는 전북 익산[이 지역이 또한 주의를 要한다.]를 ] 입점리와 日本 熊本縣 菊水町 江田船山古墳[웅본현 국수정 강전선산고분]에서도 비슷한 예가 출토된 바 있어 백제와 일본과의 문화교류관계를 살피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는 점이다. 菊水町까지 가보지는 못했지만 이 지방에서는 온천으로 이름이 나있고 도심에서 한국에 가까운 서북쪽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가까운 곳에 國見岳이라는 山도 있는데 그 의미를 나는 ‘(어머니의) 나라를 바라보는 산’으로 상상하고 있다.
나주에서 발굴되고 광주박물관 2층으로 이사온 국보 295호 금동관
박물관 리플렛에서 스캔한 금동관의 옆 모습 -
모자 구실을 하는 內冠과 테두리인 外冠이 뚜렷이 보인다.
금동관이 출토된 나주 반남의 9호분 - 그 규모가 보는 이를 압도한다.
9호분 주변에도 고분이 흩어져 있고 병풍처럼 두른 푸른 산자락이 영암 月出山
9호분 주변의 고분들[영암쪽]
9호분 주변의 고분들[광주쪽]
오른 쪽에도 논 가운데 고분이 보이고 산밑에 인가가 보인다.
9호분 주변
아내판의 공중촬영 자미산성 - 길을 따라 성벽을 쌓은 테메식 산성
지금 많이 무녀져 평평해졌지만 왼쪽에 성벽이 있었다.
지금은 구멍만 뻥 뚫린 산성의 우물터
사진으로 표현하기 힘들지만 분지는 광활하다[산성 정상에 본 반남]
산성 정상에 본 반남 -
오른쪽 솔가지 옆에도 고분이 보이고 영산강의 샛강이 구석구석 흐르고 있다.
산성 정상에 본 반남
산성 정상에 본 반남 - 길가 전신주 옆에도 고분
산성 정상에 본 반남의 고분-
마을 뒤 둔덕에 고분이 보인다
평지로 내려와 바라본 고분군 입구
나주시로 돌아오는 영산강 변의 논 위의 구릉도 고분으로 판명되어 발굴을 기다리고 있는데
아직은 이 지역 전체 고분의 규모가 밝혀지고 있지 않다.
통일신라에 매몰되어 상대적으로 우리의 삼한시대와 고분시대의 역사연구는 빈약하다.
기록이 없다는 것이 문제인데 이제 미술사학 민속학 인류학 고고학이 연합하여 나설차례다.
우선 자료를 훑터본 뒤 다시 찾아가 좀 더 정밀한 사진을 만들야겠다.
知己가 궁금해 해서 이 지역의 약 70餘基 고인돌과 이 고분의 고리를 풀어가는 것이 과제라는 것을 언급하면서 우선 이런 정도로 사진을 몇 장 올린다. 자미산성의 주위로 모여 있는 고분군[이 부근에 나주국립박물관의 터를 지금 닦고 있다.]은 馬韓을 비롯한 고대한국사의 열쇠를 쥐고 있다는 것만 우선 明記해둔다. 이것이 羅州에 초점을 맞추는 이유다.
이번 여행에 도움을 준 정신진, 박경중, 서양민 동문 그리고 나주문화원 金俊爀 사무국장과 尹芝香 박사에게 감사드린다.
<*2010년 霜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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