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으로 돌아온 백제의 미소 - 백제인의 얼굴
이 마애불에 두 가지 뉴스가 있다. 나처럼 게으른 사람에게는 말이다.
먼저 전각에 갇혀있던 불상이 원래의 모습대로 자연에 노출 된 것-다른 하나는 오직 미소에만 고정된 시각을 벗어나 좀 더 가까이 부처님을 보자는 것-
지금처럼 서해안 고속도로가 뚫리기 전 흙길을 달려 이 부처님을 뵈러 가는 길은 매우 힘들었었다. 그리고 석굴암을 보수로 논란이 뜨겁던 시절 풍화를 피하기 위해 전각을 짓고 조명을 해서 뵙기에 여간 번거롭지 않았는데 이번에 우연히 들렀다가 자연으로 돌아온 부처를 보았다. 낙동강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적이 걱정이 되었다.
먼저 생각이 되는 것은 아침 이슬 같은 찰나의 우리네 인생이 時間의 흐름에서 永續性을 띤다는 계시다. 역사와 현실과 미래-즉 인도철학의 전통에서 부처가 태어나고 그 사상이 미래를 밝히리라는 희망의 돋을새김이라는 것!
먼저 맨 왼쪽의 보살 입상은 提和竭羅菩薩[제화갈라보살]이라는데 그는 석가가 善慧菩薩이라는 이름으로 수행할 때 연등불께 다섯 송이 연꽃을 바치고, 자신의 머리칼을 진흙길에 깔아 발에 흙을 묻히지 않고 지나도록 하였는데 이에 석가모니에게 미래에 부처가 되리라는 授記를 내려주었다고 한다. 그의 또 다른 이름은 普光佛, 錠光佛 등인데 이는 過去七佛과 함께 석가가 平地突出이 아닌 傳統의 所産이라는 뜻으로 내게는 다가온다. 요즘 첨단과학이라는 이름으로 과거가 모두 미개한 것으로 치부되는 세상에 이 역사적 축적의 의미는 내게 무겁다. 정작 백제의 미소는 이 보살에게서 아련히 피어나고 있는데 사람들은 모든 이의 소원에 미소로 대답한다고 믿는 모양이다. 요즘말로 疏通의 부처라고나 할까? 특히 冬至의 일출을 정면으로 마주보는 위치에 자리했다는 것도 경탄의 대상이다. 동지는 사실상 1월1일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현세에 우리가 그 사상을 숙고하고 실천해야할 중앙의 본존불이다. 그는 별다른 장식이 없는 민머리 형태의 소발[素髮]에 두툼한 볼과 약간 벌어진 입술, 짙은 눈썹과 큰 눈은 따뜻하고 부드러운 인상이다. 우러러 보는 것만으로 편안한 마음을 자아낸다. 두터운 법의는 발등까지 덮여 있고 발밑에는 홑임의 연꽃이 음각되었고, 광배에도 연꽃이 양각되어 있다. 그는 권위를 뜻하는 施無畏와 소원을 들어 준다는 與願의 뜻을 손가락으로 보여주고 있다.
우측의 보살 입상은 미래다. 머리에 삼산관을 썼고 얼굴은 약간 긴 편이며, 상반신은 벗고 치마는 길게 늘어져 있다. 발밑에는 이중으로 연꽃이 돋을새김 되어 있다. 두 팔은 손상되었지만 왼손을 발목위에 평치고 오른 솜이 봉을 가볍게 밥치고 있는 모습은 분명하게 보인다.
백제의 미소 백제인의 얼굴 : 이 부처의 모습이 과연 백제인의 심상에서 빚어진 그들의 이상형인가? 아니면 서방에서 이미 양식화된 부처의 답습인가? 유럽의 박물관을 돌면서 천인천색의 예수를 보고 그 모습이 모두 화가의 심성에서 샘솟는 것을 느낀 바가 있었다. 부처는 자신의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했고 그 우상은 정작 알렉산더가 끌고 온 그리스전통의 화가들에 의해서 간다라에서 만들어졌으니 이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다. 미소를 말하는 한 분명 그 모습은 백제인의 창조다. 공주 박물관에는 고궁박물관에서 복제해 온 백제 사신의 모습이 뚜렷하게 보인다. 두 장의 서로 다른 모습의 공통점은 신발을 비롯한 의관과 색조다. 옷깃은 오른쪽으로 여몄고 바지에 두루마기를 입고 있다. 인상은 서로 다르지만 모두 온화한 교양인의 인상이다.
그 토양 그 예술에는 화가의 후천성으로는 지워지지 않는 天稟이 있기 마련이다. 그저 한 인물을 존경과 예절로 우러르며 옷깃을 여미고 또 다른 고귀한 품성을 흠모하는 것이 우리네 서민이 품어야할 마음가짐이 아닐까?
부처가 지키는 길 : 또 다른 하나는 한각의 뱃길의 걸어가며 곳곳에서 보이는 마애불이었는데 그 부처는 사공과 상인들의 뱃길을 걱정하는 가족의 기도와 수호신의 가호가 깃들어 있었다. 물살이 급한 곳 등대와 산적이 출몰할 만한 곳에서 일종의 구난처와 같은 느낌이었다.
잊고 있는 백제의 전성기는 대중 데외의 무역과 교류가 활발했을 것이고 항구에서 육로로 그 중심부에 도달하는 驛站 또한 번성했을 것이다. 이 일대에는 여러 갈래의 물길이 있어 지금 보다 훨씬 내륙으로 바닷물이 들어왔었다. 부여로 가는 육로를 자세히 알 길은 없으나
당진, 태안, 해미 등등은 모두 중국과 이어지는 항로의 거점이나 경유지였을 것이다. 이 마애불 일대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절들이 세워지고 또 무너졌다. 그 절들에 대한 지표통계와 부여나 공주로 가는 길 등에 대한 연구가 이 부근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이 마애불만 놓고 접근해보면 대규모의 절이었던 것으로 추측되는 보원사지가 있는 용현계곡이 주제가 된다. 가야산 석문봉을 정점으로 한쪽은 옥양봉 한쪽은 일락산 그 사이의 틈새가 용현계곡이다. 바위로 이루어진 봉우리는 절리가 불균형을 이룬 커다란 바위로 덮여 있고 개울쪽은 단애를 이루고 있는데 마애불은 앞산 능선을 향하여 조금 돌출한 면석에 새겨졌다. 돌출한 면석 위로는 모자챙처럼 앞으로 불거진 바위가 있어서 비바람을 막아주었기에 이 부처는 천년의 미소를 잃지 않았다.
본존불은 2.8m로 인간에 비해 위엄을 갖추고 있지만 제화갈라입상은 1.7m, 반가사유보살상은 1.6m로 우리와 비슷하여 한결 친근감을 준다. 2007년엔가 전각에서 벗어나 자연으로 돌아왔다니 다행한 일이다. 앞으로 이 지역의 역사 재발견 또는 재해석을 통해 우리 생활의 주름을 펴는데 이 삼존불께서 힘을 보태실 것으로 고대해 본다.
동향으로 자리한 삼존불은 일몰까지 햇빛을 고루받으며 사바세계에 미소를 보내 평화를 구하고 있다.
장승 역할을 하는 강댕이 미륵불은 본래의 자리가 저수지로 수몰되면서 이곳으로 옮겨 왔는데
이 일대가 사찰이었다면 그만큼 국제교류도 활발한 길목이었을 것이다.
용현계곡에 축대가 없었을 때는 오솔길은 완연한 V자 협곡이었을 것으로
그만큼 마애불은 자유의 여신상처럼 길손에게 위안이 되었을 것이다.
개울을 건너는 다리는 새로 단장 되고...
불이문을 지나면 바로...
삼존불이 전각에서 벗어나 자연으로 돌아왔다. 벌써 2007년의 일인가?
미래불인 반가사유보살은 명상에 잠겨있다.
과거불인 提和竭羅菩薩
삼존불 모두 연꽃위에...
마애불은 약80도 앞으로 기울었고 또 그 위에 처마바위가 얹혀져 비바람을 자연스럽게 피할 수 있었다.
이 부처은 모습은...
백제 사신의 인상과 닮은 데가 있을까?[공주박물관]
백제사신의 모습[공부박물관 중국측 그림 복제품]
다행히 이 마애불에 대한 관심만큼 많은 블러거들이 좋은 사진과 훌륭한 글을 올려놓고 있다. 특히 <blog.daum.net/kelim ‘서산 용현리 마애삼존불’ >이 걸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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