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빠진 놈
말의 靈魂과 대화하는 Horse Whisperer라는 영화를 보았다. 다리를 잘린 딸과 愛馬가 交感할 수 있다는 본능적 확신을 가진 어머니가 돋보였다. 인간이 쳐놓은 時間과 空間이라는 그물만 제거할 수 있다면 인간이나 짐승이나 돌이나 꽃이나 서로 交流하고 終局에 合致할 수 있을까?
돌을 먹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되지만 돌틈에서 나오는 물(石間水)을 첫손가락에 꼽는 것을 보면 우리는 돌을 씻어서 마시는 것이고 究竟 돌을 먹는 것이다. 마치 어떤 生鮮은 국물이 더 맛있는 것처럼 말이다.
달걀의 흰자위처럼 얼이란 투과할 수 있는 물주머니 같은 것이다. ‘精’이란 漢字가 있는데 쌀눈(米眼)이 푸른빛을 띠어서 ‘靑’이란 音符가 붙은 것이다. 精子라는 말이나 卵子라는 말도 관련이 있다.
그 肉身의 주머니에 宇宙에 彌滿한 얼이 들락거리는 것이다. 얼이 내 주머니에 들어오면 눈은 빛나고 코는 벌름거리며 입술은 젖고 고막은 떤다. 어떤 때는 꽃향기가 어떤 때는 시냇물소리가 주머니에 들어오고 또 솔바람처럼 살갗을 스치고 빠져나간다.
얼주머니에 돈이 꽉 차면 더 이상 꽃향기를 담을 수 없다. 人間의 얼주머니는 그렇게 큰 것이 아니다. 꼭 인간만큼 담을 수 있으니까! 극복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눈이 멀리 볼 수 있고 발이 움직여 그 角度와 視野를 넓혀 內臟속에 썩은 얼을 뿜어내는 것이다. 그러면 코앞에 머물던 맑은 얼이 들어올 通路를 열 수 있다.
가끔 衝擊을 받으면 멍해질 때가 있다. 그때 누가 내 눈동자를 본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얼빠진 놈!!”
사람이 죽으면 얼이 빠졌다고 한다. 그리고 그 얼을 어떻게 해서든지 썩은 육신에 붙잡아 두려고 한다. 이미 그 얼은 더 신선하고 자유롭고 원대한 우주라는 집속에 安住하고 있는데 말이다. 그것을 집착과 욕심이라고 부른다.
얼은 無所不在하고 處染常淨하고 無邪無念하고 自由自在한다.
가끔 얼빠진 달을 본다. 그러나 그 삭막하고 자유로운 얼에 똑같은 인간이 득시글거린다고 생각해보라! 어찌 달이 神秘하고 아름답겠는가? 달에 옥토끼가 산다고 생각한다면 토끼가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얼이다. 아이들은 그 토끼를 보았고 또 본대로 그린 것이 아닌가? 얼빠진 놈은 그 토끼를 보고도 ‘달에는 토끼가 없다’고 말한다. 정말 얼이 빠진 줄도 모르는 놈이다. 이런 놈은 빨리 땅에 묻어야한다. 그러나 하느님은 관대하다. 삽질을 해서 이놈을 묻지 않고 그냥 大路를 闊步하게 한다. 이놈이 숨을 헐떡거리며 하느님을 찾을 때까지_
얼빠진 놈에게 얼빠진 것처럼 보이는 그것이 달의 本相이요 달의 참얼이다.
이것을 한자로는 攝理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