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마모또 이튿날 오후
미술관 : 인구 60만의 구마모또에 현립미술관이 들어선 것은 1976년 이제 30년이 넘었다. 이어 1992년에는 규모가 더 큰 분관이 성의 반대편에 세워졌다. 그 곁에는 전통공예관도 있다. 본관은 전시공간이 약 800평, 수장고가 300평, 교육장소가 150평, 사무실과 괸리실이 1,100평에 로비가 240평이니 모두 3천평 정도의 아담한 규모다. 3층이지만 지하와 중층을 두어 실제로는 5층의 효과를 낸다. 부르델, 로뎅의 조각이 전시된 홀의 유리문을 열면 공원과 구마모또 성이 한눈에 들어온다.
橫山大觀의 '구름은 흘러오고(1917)'
永靑文庫는 호소가와[細川]가문의 수장품이다. 별관 입장료는 260엔. 橫山大觀의 초상화는 1942년4월25일 ‘新喜樂’이라는 요정에서 安井, 小林, 梅原龍三郞 등 5명이 모여 그렸는데 모두 독특하다. 조선소녀를 그린 풍경화와 梅原의 장미도 볼만하지만 1917년에 橫山大觀이 그린 雲去來 10폭 병풍이 인상적이다. 병풍은 역시 앉아서 보아야 맛이 난다는 것이 이상하다.
백과사전을 비롯하여 두터운 洋書에는 지리와 물리를 공부한 사무라이의 손때가 묻어난다.
조선의 茶碗, 소동파의 친구였던 黃山谷의 글씨 등 일본중요문화재가 다수 눈에 뜨인다.
미술관을 환하게 만드는 것은 어느 나라건 아이들이다. 아이들은 ‘안녕하세요?’하고는 외계인의 반응을 살핀다. 처음 해본 외계어가 통할까라는 호기심으로 두 눈은 빛난다. 귀엽다.
왜 일본에 가는가? : 미술관을 나와 옹성을 돌아 다시 걷는다. 소녀들이 자전거를 끌고 지나가는 호국신사의 도리[鳥居]앞에 선다. 이 도리를 볼 때마다 원시인들의 경계표시인 선돌, 대문, 서까래를 받치기 위하여 기둥과 기둥 위에 건너 얹는 나무를 일컫는 우리말의 ‘도리’. 또 ‘鳥’에서 우리의 솟대를 연상한다. 왜 일본에 가는가? 이렇게 묻는 친구들이 많다. 영국과 함께 이 두 개의 섬나라는 대륙의 문화와 글자를 받아들이고 그 전통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다.
호텔KKR의 중국식당 : 다시 야구장을 끼고 돌자 인적이 드문 구마모또 박물관의 후문이 보인다. 박물관 정문이 바로 호소가와 가문의 형부저택... 뜰에서 처음으로 매화를 본다. 갑자기 집사람의 얼굴이 하얘진다. 집사람은 가벼운 당뇨로 매일 주사를 맞는다. 오늘은 거꾸로 허기를 못 참는다. 돌아보니 식당이라고는 없다. 대개 박물관이나 민속촌 부근에 먹을 것이 넘쳐나는 우리 풍속에 너무 길들여졌나? 공원에는 단 두 사람의 산보객! 한 사람은 다리를 건너라 하고 한 중년부인은 오른쪽으로 돌아가라는데 너무 멀다. 택시도 버스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자 부인은 산보하고 집에 가는 길이라며 우리를 태워주겠단다. 말이 통하지 않는데 어떻게 그런 의사소통이 이루어졌을까?
결국 부인은 공원을 반 바퀴 돌아 호텔KKR의 중국식당으로 데려가 메뉴를 해설하고 매니저에게 우리가 일본말을 모른다는 해설까지 붙여주었다. 그 친절이 지금도 고맙다. 1,000엔짜리 점심은 스프에다 네 개의 접시와 야채 등 코스요리 못지않았다. 스프를 마시고 화색이 돌자 집사람의 눈에는 창밖에 가득한 구마모또 성이 보이는 모양이었다. 이 ‘유리창그림’이야말로 구마모또의 절경이었다. 결국 성이 보이는 이집의 방에서 하루를 보낸 것은 일주일 뒤의 이야기다.
호소가와 고택의 松無古今色 : 집사람이 기운을 차렸다. 우리는 다시 언덕을 올라 제자리로 돌아왔다. 니끼한 중국요리를 먹었으니 먼저 차 한 잔이 순서. 茶屋의 神壇에불변의 도리를 암시한 ‘松無古今色’이라는 禪句가 창연하다. 차모는 무릎을 꿇고 손님과 맞절을 하며 차를 권한다. 손님은 찻잔에 대해서 묻고 감상을 한마디 한다. 나는 그저 한국식으로 말차를 받아 마신다. 함께 차를 마시는 가와모또[川元] 부부와 필담을 하다가 기념사진을 찍는다. 한국문화가 일본에 전래되는 아득한 시대 이야기를 해본다. 日本繪手紙 전문가인 부인은 우리에게 구마모또성이 수놓인 찻잔받침을 선물한다.
호소가와저택의 정원엔 갈퀴질을 한 자갈길이 단정하다. 이집의 구조는 한나라 화상석에 보이는 저택과 너무 닮았다. 2천년의 세월을 느낀다. 구마모또에 分封된 호소가와의 3대가 刑部少輔로 부임하여 지은 것으로 된 이 집은 현관-홀을 지나 손님방과 서원을 지나 침실과 변소와 목욕탕이 딸려 있고 별채로 서재와 茶室이 있다. 우물을 지나 식당과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과 집사의 집무실도 보이고 행랑의 무기고와 별채의 수장고도 있고 담에 붙어 수위실도 있다. 겨울인데도 툇마루에 앉으면 햇살이 다사롭다. 건평만 300평이라는 이 집에서 책을 읽고 차를 마시고 손님을 접대하는 주인을 생각해본다.
호소가와 고택 외관
구마모또박물관 : 한국에 곰나루[熊津]라는 옛지명이 있다. 그 곰이 ‘고마’도 되고 ‘구마’도 되는데 단군의 신화와 함께 다닌다. ‘本’은 터[基礎]라는 말인데 일본에서 ‘마또’로 읽혀 日本이 ‘니뽄’도 되고 ‘야마또’도 된다. 결론적으로 熊本은 ‘구마모또’인데 우리말로 ‘곰터’-즉 신성의 땅이라는 의미가 되고 충청도 公州인 웅진과 사촌간이다.
중국에서 천하를 九州라 한다. 어느 肝이 큰 인간이 이 땅을 天下라고 불렀는지는 모르지만 그 포부가 대단한 망명객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지금 규슈에는 일곱 개의 큰 마을인 縣 즉 한국으로 치면 道가 있는데 말이다.
호소가와의 고택 앞이 바로 박물관인데 1층은 자연사 2층은 역사와 민속박물관이다. 내일 갈 우찌노마끼 온천은 휴화산위에 지어졌으니 끔찍하다. 사진을 보면 정말 무서운 폭발이 이 온천에서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왼쪽이 우찌노마끼 온천-오른쪽 가지의 오른쪽이 나까께로 지금의 화산
집사람이 전시장을 둘러보는 1시간 - 나는 박물관 관계자와 구마모또의 지명유래와 한국어어의 관계를 필담해본다. 오랜 과제였으니까...
그들이 쉽게 이해할 수는 없다. 나도 잘 모르는 말을 하고 있으니...이 사람 저 사람이 불려오고... 나는 폐를 끼친다. 그러나 이 일이 두 땅의 사람에게 모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부끄러움을 참는다. 퇴근 시간이 되었다. 돌아올 때 만나기로 하고 박물관을 나선다.
집사람은 걷자고 한다. 이 성의 둘레가 10리가 넘으니 오늘 10리는 족히 걸었고 집사람의 혈당을 떨어뜨리는 건강여행은 충분히 한 셈이다. 下通1丁目11-19번지의 ‘叶家’ 오가따[尾方] 사장에게 다시 들렸는데 집사람이 우동을 먹고 싶단다. 여주인은 두말없이 우리를 데리고 두 불럭을 걸어 손가락으로 ‘うどん’을 가리킨다. 그리고 주인에게 부탁을 하고 돌아간다. 국물이 필요한 집사람에게 변고가 생겼다. 그림을 보고 시킨 내가 잘못이지! 비빔우동이 있는지 몰랐다. 할 수없이 국물을 얻어 비빔우동을 국물에 말아먹었다. 이나리[유뷰초밥]도 1인분 시키고 또 오뎅[おどん]도 한 꼬치 먹었다.
상가를 산보삼아 걷다가 돌아와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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