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村의 詩 0015> 퇴계의 도산매화첩 -幽居
오늘은 입춘이다. 날씨가 따뜻하니 어디 꽃망울이 터지지 않을까 싶다. 우리 조상들이 梅蘭菊竹을 사랑하고 桃李花歌를 즐겼지만 요즘은 벚꽃이 대세인 것 같다. 그렇지만 섬진강 매화와 지리산 산수유는 새봄의 傳令으로 우리 가슴을 설레게 한다.
500년 전 陶山書院에도 매화를 사랑한 退溪 선생이 계셨다.
幽居
깊은 거처의 일미는 한가히 일이 없음인데
남들은 한가한 생활을 싫어하나 내 홀로 사랑하네
동헌에 술이 있으니 성인을 뵈온 듯 하고
남국에서 매화를 얻으니 신선을 만난 듯하네
바위에서 솟는 물 벼루를 적시고 구름은 붓에서 피어나고
산월은 침상에 비치며 이슬은 책에 뿌려지네
병이 있어 때로 독서에 게으를 수 있지만 방해되지 않고
그대 미소를 좇으니 배가 부르네
기태완 譯註 이광호 監修 『매화시집(보고사)2011』에서
아마 원문을 더듬어 보면 이 느낌이 새로울지 모르겠다. 일곱자씩 끊어져있으니 중국음은 아닐지라도 최소한 음수율의 단정함은 있지 않겠는가...
幽居一味閒無事 유거일미한무사
人厭閒居我獨憐 인염한거아독련
置酒東軒如對聖 치주동헌여대성
得梅南國似逢仙 득매남국사봉선
巖泉滴硯雲生筆 암천적연운생필
山月侵牀露灑編 산월침상로쇄편
病裏不妨時懶讀 병리부방시라독
任從君笑腹便便 임종군소복편편
조금 더 새겨보자...幽居는 ‘속세를 떠나 깊숙하고 고요한 곳에 묻혀 외따로 삶’인데 ‘幽’는 ‘山’ 안에 골짜기 좌우로 ‘幺’가 들어있다. ‘居’는 ‘尸’ 안에 ‘古’가 들어있다...‘幺’나 ‘古’나 音이라고 보고 幽居가 ‘산속에서 저승처럼 죽은 듯이 사는 것’이라면 너무 나간 것인가?!
一味는 ‘첫째가는 좋은 맛’인데 ‘그 이상은 없는 절대적인 맛’으로 보면...라고 하면 실감이 날 것이다.
無事는 '사고가 없어서 편안함'으로 매일TV사고뉴스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의 뉴스 트라우마를 연상해보면 실감이 날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孤立 - 孤獨’을 두려워하는데 詩人은 號(退溪) 그대로 人迹 드문 시냇가에 홀로(幽居) 살겠다고 한다.
그러나...
술을 聖人 마주하듯 하고, 梅花를 神仙 보듯 하면서 붓과 벼루를 곁에 두고 침상에 달을 불러 함께 책을 읽어가는 데, 몸을 앓는 것조차 독서의 吟味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그대(君)’의 미소를 따라 웃는 미소에 배가 부르다는 ... 詩人!
그 ‘그대’는 달도 매화도 책도 될 수가 있다. ... 그를 에워싸고 있는 만유가 생명이요, 미소요, 봄인 듯하다.
이 詩를 대하고 보니 우리 집에도 매화를 심었고 친구 집에도 매화 화분이 있다(退溪는 盆梅의 詩도 썼다.). 우리 집에도 달도 뜨고 볼펜도 있고 책도 있는데 왜 이 마음이 이렇게 허전한 것일까?!
매화를 바라보는 눈이 달랐던 것은 아닐까?!
梅實은 술도 되고 장아찌도 되고 진액으로 입맛을 돋우기도 한다. 설중매는 선비의 지조요 아낙의 정절을 상징한다. 달빛 아래 氷雪의 자태를 뽐내고 그믐밤에 몸을 숨기고 香내를 뿜는다...교토에서 이른 봄 퇴근길에 일본인들의 각별한 매화사랑이 인상에 남는다. 淸水寺 가는 길엔 우메보시를 파는 가게들이 櫛比했고...
退溪[1501년(연산군 7) - 1570년(선조 3)]의 매화사랑은 자별하여 詩를 짓고 판각을 하여 그 탁본이 帖으로 묶여 나에게도 1부가 있다. 이름하여 ‘陶山梅花帖’인데 무려 62題 91首가 실려 있다고 한다. 매화를 사랑한 교분도 함께 들어있다.
이 梅花詩가 근자에 번역되어 책으로 묶여졌다. 올 해는 도산서원에서 매화를 감상해보는 것도 어떨지?!<*>
왼쪽 햇빛이 든 부분이 위에 소개한 幽居의 원본 板本.
도산매화첩 표지...퇴계의 詩는 약 500년 전에 지어진 것이다.
이 帖의 말미에 기대승의 도산기문에 대한 跋이 첨부되어 있다.
근자에 91수의 퇴계 매화시를 원문과함께 번역한 매화시첩이 번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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