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村의 詩 0011> 한 해의 시작과 끝 - 농가월령가
날이 흐리다가 개었다.
겨울 속에 봄이 숨어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이렇게 봄날씨가 겨울옷을 벗고 당당하게 돌아다니는 것은 좀 이상하다. 그러다보니
이러다간 계절도 날짜도 잊어버릴 것만 같다... 농사일을 쉬고 이불속에서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는 걸 보면...
오늘은 更子年 元旦 - 새해다. 農事는 혼자 짓는 것이 아니라 天地自然과 함께 짓는 것이니, 당연히 농군은 차례(茶禮)를 땅을 굽어보고 하늘을 우러러 지내야 할 일이다.
천지가 개벽할 때 하늘에 해와 달이 걸렸다면, 인간의 태초는 양력과 음력에서 시작되었다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인생이란 자연이 허용한 공간 위에 자신이 시간을 수놓아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기가 태어난 곳의 위도(緯度) 경도(經度)가 0度 - 태어난 날이 기원 원년(元年)... 이런 것이 주체적인 삶 아닐까?! 우리들의 ‘生日’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들이 전 우주의 ‘原點’에 서는 날인 것이다.
한 송이 들꽃은 그 피어나는 날이 원점이고 농사꾼에게 땅은 얼음이 풀리는 날이 원점이다.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는 매월 농군의 업무(業務 ?)를 노래로 엮은 것으로 맨 머리에 서(序)가 붙어있다.
천지(天地) 조판(肇判)하매 일월성신(日月星辰) 비치거다.
일월(日月)은 도수(度數)있고 성신(星辰)은 전차(前次) 있어
일년 삼백 육십일에 제 도수(度數) 돌아오매
동지·하지·춘·추분은 일행(日行)을 추측하고
상현·하현·망(望)·회(晦)·삭(朔)은 월륜(月輪)의 영휴(盈虧)로다.
대지상(大地上) 동서남북(東西南北), 곳을 따라 틀리기로
북극(北極)을 보람하야 원근(遠近)을 마련하니
이십사(二十四) 절후(節侯)는 십이삭(十二朔)에 분별하여
매삭(每朔)에 두 절후가 일망(一望)이 사이로다.
춘하추동(春夏秋冬) 내왕하여 자연히 성세(成歲)하니
요순(堯舜) 같은 착한 임금 역법(曆法)을 창제(創製)하사
천시(天時)를 마련하야 만인(萬人)을 맡기시니
하우씨(夏禹氏) 오백년은 인월(寅月)로 세수(歲首)하고
주(周)나라 팔백년은 자월(子月)로 신정(新定)이라.
당금(當今)에 쓰는 역법(曆法) 하우(夏禹)씨와 한법(法)이라.
한서온량(寒暑溫凉) 기후 차례 사시(四時)에 맞아드니
공부자(孔夫子)의 취(取)하심이 하령(夏令)을 행하도다.
맨 첫 구절에 조판(肇判)이라는 단어는 ‘비로소 갈라지다’는 뜻이다. 즉 ‘태초의 창조’라는 뜻인데, 肇는 비롯한다(始)와 같고 ‘判’이나 ‘創’에는 모두 칼(刀 - 刂)이 들어 있다. 즉 나누다-가르다-분명(分明)하다는 뜻이 있다.
그렇다면 나머지 구절은 쉽겠다.
인월(寅月)은 대체로 입춘부터 경칩 사이에 있다고 하는데 이제 하(夏)나라의 역법(曆法)을 기준으로 춘하추동(節) 24기(氣)가 정해졌으니 우선 정월에 할 일을 따라가 보기로 하자...
정월(正月)은 맹춘(孟春)이라 입춘(立春) 우수(雨水) 절기(節氣)로다.
산중 간학(澗壑)에 빙설(氷雪)은 남았으나
평교광야(平郊廣野)에 운물(雲物)이 변(變)하도다.
어와 우리 성상(聖上) 애민중농(愛民重農) 하오시니
간측(懇惻)하신 권농(勸農)윤음(綸音) 방곡(坊曲)에 반포하니
슬프다, 농부들아 아무리 무지한들
네몸위해 고사(姑捨)하고 성의(聖儀)를 어길소냐.
산전수답(山田水畓) 상반(相半)하여 힘대로 하오리라.
일년풍흉(一年豊凶)은 측량하지 못하여도
인력(人力)이 극진(極盡)하면 천재(天災)는 면하리니
제각각 근면(勤勉)하여 게을리 굴지 마라.
일년지계(一年之計) 재춘(在春)하니 범사(凡事)를 미리하라.
봄에 만일 실시(失時)하면 종년(終年) 일이 낭패되네.
농기(農器)를 다스리고 농우(農牛)를 살펴 먹여
재거름 재워 놓고 한편으로 실어 내어
보리밭에 오줌치기 세전(歲前)보다 힘써 하소.
늙은이 근력(筋力)없어 힘든 일은 못하여도
낮이면 이엉 엮고 밤이면 새끼 꼬아
때미쳐 집이우면 큰 근심 덜리로다.
실과 나무 보굿깎고 가지 사이 돌 끼우기
정조(正朝)날 미명시(未明時)에 시험조로 하여 보세.
며느리 잊지 말고 소국주(小麴酒) 밑하여라.
삼춘(三春) 백화시(百花時)에 화전일취(花前*一醉)하여 보자.
상원(上元)날 달을 보아 수한(水旱)을 안다하니
노농(老農)의 징혐(徵驗)⑩이라 대강은 짐작느니.
정조(正朝)에 세배함은 돈후(敦厚)한 풍속이라.
새 의복 떨쳐입고 친척인리(親戚隣里) 서로 찾아
노소남녀 아동까지삼삼오오( 三三五五) 다닐 적에
와삭버석 울긋불긋 물색(物色)이 번화(繁華)하다.
사내아이 연날리기 계집아이 널뛰기요.
윷놀아 내기하니 소년들 놀이로다.
사당(祠堂)에 세알(歲謁)함은 병탕(餠湯)에 주과(酒果)로다.
엄(움)파와 미나리를 무엄에 곁들이면
보기에 신선하여 오신채(五辛菜)를 부러하랴.
보름날 약밥 제도 신라(新羅)적 풍속이라.
묵은 산채 삶아 내니 육미(肉味)를 바꿀소냐.
귀밝히는 약술이요 부름삭는 생밤이라.
먼저불러 더위팔기 달맞이 횃불켜기
흘러오는 풍속이요 아이들 놀이로다.
‘일년지계(一年之計) 재춘(在春)하니 범사(凡事)를 미리하라.’하였으니, 틈틈이 보일러도 손보고 아궁이도 살펴가며 농사계획을 잘 세워야겠다. 생각해보니 농기구 정리 - 퇴비준비 - 과일나무 한두그루지만 가지치기도 좀 해야하지 않을까?! 밭가운데 파가 그대로 있고, 연못가에 미나리도 한 움큼 있긴 한데 독미나리는 조심해야겠다. 햇미나리가 나는 계절을 ‘미나리가 입맛을 다툰다’는 ‘春根競味節’로 부르기도 한다.
이 시대가 농사경시 풍조인지?! 귀촌유행 바람인지?! 알 수 없지만 풍속도 덩달아 국내관광에 열중할 상황에 해외관광이 열풍이다. 이러다 보면 세뱃돈도 달러로, 아니면 스마트폰 카톡으로 로밍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생밤(生栗) 대신 키위를 먹고, 횃불놀이 대신 스마트폰 게임도 문제다. 묵묵히 땅이 풀리기를 기다리자!
** 보굿 : 오래된 굵은 나무줄기의 비늘같이 생긴 껍데기
** 고사(姑捨) : 더 말할 나위도 없음
** 한국 사찰에서 특별히 먹지 못하게 하는 음식이다. 마늘[대산(大蒜)]·파[혁총(革蔥)]·부추[난총(蘭蔥)]·달래[자총(慈蔥)]·아위[흥거(興蕖)]의 다섯 가지로, 대부분 자극이 강하고 냄새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 움파 베어 낸 줄기에서 다시 자라 나온 파
** 무엄 : 무움, 무순이 맞을지?!
2020년 입춘(立春)은 2월4일, 우수(雨水)는 2월19일이다. 그리고 2월령은 양력으로 2월24일에 다시 시작해야 한다. 訓民歌도 詩냐고 할 사람도 있겠지만 44 歌辭調의 이 노래가 계절(季節)의 시(詩)가 되었다. 띄어쓰기와 철자 등등 원문과 많이 다를 것으로 생각되지만, 원본을 찾을 때까지 우선 이대로 대의만 파악하기로 하자. <*>
1949년 출간 조선시조집을 우선 參照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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