둔지미 역사공원 : 조선통신사 옛길 찾기
남대문-전생서-남단-이태원-한강진
** 사진은 다음기회에 일괄 첨부할 예정
...전생천-약수천-돌확천-이원천-보강천- 역사-생태-평화....되살리기
- ‘조선의 용산 옛길 그리고 유네스코 조선통신사 사행로 더듬어보기’
1) 들어가기: 생각 1.
2) 길이란?
3) 용산의 옛길 지도 : 남묘-전생서-남단-이태원-부어치-한강진
4) 조선통신사와 후암동 옛길 : 南廟 - 他山之石
5) 후암동 마을지도를 만드는 사람들과 사행로
-기록은 유네스코문화유산에 등재되고 길은 막히고...
6) 전생동으로 불리던 100년 전 후암동 길은?
7) 이태원과 황학동과 부어치
8) 1914년 이태원리
9) 기지 안의 토막 난 길 : 남단(南壇)
10) 유네스코 조선통신사와 일본의 통일 :
11) 제언 : 생각 2.
맺음말 : 이 이야기의 사족(蛇足)
1) 들어가기: 생각 1
안녕하세요. 사람마다 자기 생각이란 것이 있는데요...생각이 다를 땐 어떻게 해야 될까요??
** 대화를 해야지요...상대방의 이야기를 마음을 비우고 끝까지 들어보는 것이지요. 易地思之라고 할까요? 그렇습니다. 우선 몇 장의 사진을 보도록 합니다.
#11. 무단출입금지
#12. 기지담장 용산고에서 숙대쪽...
#13. 남묘폐허
#14. 베를린 야경 장벽
#15. 베를린벽화
#16. 베를린벽화 : 키스
#17. 헐린 장벽 콘크리트...걸어가기
#18. 헐린 장벽 콘크리트...녹색잔디
#19. 헐린 장벽
#18. 베를린 추모공원 ...
#19. 역사는 반복된다. ** 이 부분은 한 말씀 드려야겠네요...“그 일이 일어났다. ...”
방금 보신 사진에 대한 느낌은 우선 간직해 두세요?
우리에게 용산 하면 떠오르는 것이 무엇일까요?
국가적으로는 국립박물관이 온 나라의 보물을 품고 있고 교통이라면 남영역 부근 청파역이 온몸에 피를 보내는 심장 같은 곳이었고 지금의 용산역이나 서울역이 그 역할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 100년간 서울의 입구를 가로막고 있는 용산기지를 떠올릴 것입니다. 용산 기지는 민간인에게 금지구역입니다.
[사진21 : 병영(兵營)] 만약... 지난 100년 군용기지의 벽이 헐린다면 대한민국 수도(首都)의 숨통이 터지는 것 말고도 근대사100년의 역사적 수수께끼도 조금은 풀릴 것이고 아울러 우리의 미래에 끼치는 역사적 교훈도 적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공간은 후암동-이태원 등 용산구민- 서울시민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모든 국민과 특히 자라나는 어린이들, 그리고 분단과 625를 바라보는 세계인들에게도 울림이 적지 않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 울림이 구체적으로 얼마마한 크기일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적어도 ‘조선의 용산 옛길 그리고 서울에서 동경까지 유네스코기록문화유산이 된 조선통신사의 길- 그 평화의 길 더듬어보기’ 라는 오늘의 주제도 그 하나라고 생각됩니다. ‘옛길 더듬어보기’라고 시작은 하지만 끝머리에는 ‘용산 옛길 다시 잇기’ 그리고 우리들이 함께 이 길을 가꾸고 조선통신사와 함께 걸어보자는 합의에 이르렀으면 합니다.
오늘 강조할 옛길부분은 이른바 옛[舊] 용산기지 - 당분간 이 명칭을 사용하겠습니다. - 에 가로막혔던 또는 폐쇄되었던 구간과 북쪽으로는 남대문에서 후암동과 남쪽으로는 이태원과 한강진까지 크게 세 부분입니다.
우선 제가 말씀드리고 궁금하신 것은 메모를 해두셨다가 김홍렬선생의 사회로 질의와 토의를 이어가기로 하고 또 미진한 부분은 다음 대화의 장으로 이어갔으면 합니다.
2) 길이란?
이야기에 앞서 ‘길이란 출발지에서 목적지까지 이어져야 성립’되는 말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즉 남대문에서 부산포까지를 [사진22 : 새재...사진은 문경의 고모성 옆 토끼비리라는 棧道입니다.]새재큰길(大路) 또는 영남길이라 부른다면 서울에서 부산까지 이어져야 영남길이지 한강이나 안성에서 끊어지면 영남길이라 부를 수 없다는 말입니다. 또한 사람이 왕래해야 길이지, 인적이 끊기면 죽은 길 즉, 폐도(廢道)지 살아있는 길이 아닙니다. ‘길은 문화적 경제적 인적 물적 교류와 소통의 도구’로 인체로 따지면 혈관- 즉 핏줄과 같은 것입니다.
길의 또 하나의 특징은 순리(順理)입니다. ‘길이 아니면 가지를 말라!’ 이런 말도 있지만 옛길을 가보면 토끼도 사람도 그 길로 가게 되어있다는 것을 수긍하게 됩니다. 고개도 있고 개울도 있는데 그 길목을 거치게 되었다는 것을 동의하게 됩니다. 물론 기계가 발달하고 인위적인 면이 증가하는 추세지만 옛길은 자연과 인간이 공생하는 조화를 느끼게 해줄 뿐 아니라 곳곳에서 ‘풍수’라는 말을 실감하게 해줍니다. 지금 곧 후암동과 이태원 길을 보시면 알겠지만 차단-불통-장벽-역류 이런 말이 얼마나 숨막히는 것인지 실감할 수 있습니다. 요즘 생태(生態)통로(通路)가 곳곳에 설치되고 있는데 오히려 수천 년 사람이 다니던 길을 끊어 놓는다는 것은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입니까? [사진23 : 용산병영부지명세도]
역사책이 사색과 관념의 공간이라면 길은 역사의 살아있는 박물관이요, 현장- 즉 팩트[사실(事實)]입니다. 조선시대의 역사적 동맥이었던 옛길은 결론부터 말하면 러일전쟁이 끝난 뒤 1905년8월15일을 전후로일본이 군사기지를 이곳에 건설하는 순간에 그 목이 잘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사진은 앞으로 몇 번 다시 보시겠지만 1907년8월에 작성되었다고 합니다. 위에 ‘전생서’와 ‘석학교’가 보이고 오른쪽에 이태원이 보이는데 더 가면 한강을 지나 부산까지 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이태원에서 서울로 가려면 이 중간이 가로막혀갈 수가 없습니다. 100년의 세월이 흐르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3) 용산의 옛길 지도 : 남묘-전생서-남단-이태원-부어치-보강리-한강진
몇 장의 지도를 보시면서 옛길을 더듬어보기로 합니다. 먼저 [사진24 대동여지도]대동여지도에Ⓘ표시는 청파역입니다. 한강을 넘어 우면산(牛眠山) 옆에 양재Ⓘ역이 보입니다. 천림산(天臨山)에는 봉수가 있고 월천현(月川峴)이 달래내고개인데 여기가 서울과 경기도의 경계이고 누구나 다 아는 판교(板橋)가 지도에는 이렇게 표시되었는데 이렇게 해서 부산까지 가는 영남길이 되고 또 조선통신사의 공식행로가 되는 것입니다. [사진25 京兆五部圖] 이 지도에는 서울을 좀 자세히 표시했는데...남묘-전생서-남단-이태원-부어치-보강리-한강진-사평리가 보입니다. 둔지산과 와서고개와 와서(瓦書)는 이태원의 아래쪽에 있습니다. 이 지명들을 기억해두시기 바랍니다...
[사진26 ] 이 지도는 색이 들어있습니다. 여러분이 들고 계시는 ‘용산공원 시민에게 길을 묻다.’ 6-7쪽을 펴시고 차례대로...사인펜으로 표시하기로 합니다. 남묘-전생서-남단-이태원-부어치-보강리-한강진-사평리 [서재에 있는 서울 고지도 복사본 전시]. 또 다른 지도[사진27 지도] 에도 남단(南壇)이 보이고 용이 꿈틀거리는 듯 목멱산과 둔지산의 줄기가 보이고 목멱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도 보입니다.
오늘 이야기하는 둔지산구간 옛길의 고개가 훼손된 곳이 세 번 나타나는데 [사진26-1] 후암동 초입 두텁바위고개, - [사진26-2 ] 남단고개, - [사진26-3]부어(치)고개입니다. 그 사이 흐르는 물을 전생천-이원천-보강천으로 일단 불러 봅니다.
미리 말씀드리자면 전생천의 이 물줄기는 (사진28 고지도 채색...)무악재에서 발원하여 한강으로 흘러드는 만초천의 지류(支流)로 지금 남산에서 흘러내릴 때 典牲署 위에 (사진: 약수(藥水)표시 사진) ‘약수’라고 표시된 곳에서 발원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전생천의 이 물줄기는 지적원도(사진)의 복개된 용산고등학교 앞(사진)을 지나, 기지(基地)안으로 들어가 일부는 이렇게 (사진)300미터 정도 노출되어 있습니다. ‘용산공원 시민에게 길을...앞으로 교재라고 부르겠습니다...37쪽에 그 푸른 물이 보이는데 아마 이 부근에서 유일하게 볼 수 있는 물인지 모르겠습니다. 모두 복개되었으니까요... ’
4) 조선통신사와 후암동 옛길
아무튼 이 길은 ... 조선통신사가 열두 차례 일본에 파견되었을 때 국서를 봉행하고 지나간 외교의 길이기도 했습니다. 청파역을 시작으로 한강을 넘어 양재역으로 이어지는 이 길은 32개의 역을 거쳐 약 500키로의 부산포에 이르러 대마도를 거쳐 동경까지 가게 됩니다. 이 루트를 ‘공식사행로’로 공감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이지만 오늘의 주제에 집중하기 위해 이 정도로 이야기하겠습니다.
(사진: 도저동지명지도) 1624년8월20일 세 번째 행차 때 강홍중은 도저동 삼거리에서 하룻밤을 묵었고, 이튿날 남관왕묘에 들렀다.
(사진: 남관왕묘사진) 남관왕묘에서는 대궐을 나온 사신들이 예를 올리고 동경까지 먼 길을 가는 행장을 다시 수습했습니다. 이곳은 ‘조명동맹군(朝明同盟軍)의 신앙적 결의를 공유하는 자리’였습니다. 그 자리가 지금 이렇게 폐허가 되고 호텔의 소유[토지대장-씨디엘호텔코리아]가 된 것은 한국근대사의 잔혹사라고 해야 할지, 문화재의 수난사를 운변으로 증명한다고 할지?! 동관왕묘는 동대문밖에 멀쩡한데 남관왕묘는 사당으로 옮겨가버린 것은 용산기지를 원형으로 역사공원을 만들어야한다는 문제와 관련하여 他山之石으로 삼아야할 것입니다. (사진: 남관왕묘폐허사진)
두 번째 행차인 1616년 광해8년 음력 5월28일에 부사 박재는 이곳에서 재상들의 전별주를 들었는데 이름을 일일이 적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고 적고 있습니다.
...모든 사신들이 이곳을 지나 부산을 거쳐 동경으로 떠났는데, (사진: 힐튼에서 한강쪽 현대) 오늘도 이 부근에서는 그 윤곽을 어렴풋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 전생서에서는 (사진: 일본에서 행차 사진...) 일동장유가를 통해 역졸의....길놀이 풍경을 볼 수 있는데 두 사람의 역졸이 고삐를 잡고 마당에는 차일을 치고 잔치가 벌어지는 모습이 실감나게 기록되었습니다. (옛길 위의 조선통신사 인용...) 11번째인 1763년(영조39) 정사 조엄은 고구마를 들여온 분으로 유명한데 홍봉한을 비롯한 삼정승이 모두 전생서 전별연에 참석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물론 이 길은 (사진: 사행로 열하일기)조선시대에 북으로 북경에 이르는 의주로와 함께, (사진: 조선통신사 일본 행로)남으로 부산을 거쳐 동경으로 이르는 사대교린의 외교로(外交路)였습니다. 이 사진은 동경에도박물관[東京江戶博物館]에 전시된 것인데 한국구간이나 일본의 육상구간이나 문제가 많습니다.
아무튼 이 기록이 2017년에 유네스코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는데 한 마디로 줄인다면 ‘외교상의 기행기록- 즉 기행문’입니다. 기행문이란 공간이동에서 일어난 인간의 행적을 시간위에 적어놓은 것으로 길을 빼놓고는 존재할 수 없는 문학입니다. 앞서 서울에서 이 후암동과 이태원을 거쳐 부산에 이르는 32역에 대해서는 잠시 말씀 드렸고 일본은 제가 조사한 바로 오사카에서 동경까지 두 곳의 다리를 지나고 하나의 들판과 63 역참을 거친다는 것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용산기지와 관련하여 우리가 지금 전쟁기념관에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전쟁을 기억하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결국 평화를 기원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외교행위를 400년 전에 수행한 것이 조선통신사였습니다. 그 행위가 1811년 12차로 더 이상 이어지지 못하고 1900년대 초에 이곳에 이런 건물이 들어서게 된 것은 이곳이 우리 민족에게 길이 잊지 말아야할 곳이라는 것을 강조해둡니다.
5) 후암동 마을지도를 만드는 사람들과 사행로
-기록은 유네스코문화유산에 등재되고 길은 막히고...
(사진: 용산마을지도)이 용산안보공간의 내일을 위해서는 용산기지 이전의 모습을 돌아봄으로써 가닥이 잡힐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래서 시민과의 대화로 1차에 와서(瓦署)- 지난 번 둔지미 그리고 오늘은 이태원과 용산기지 안과 후암동의 조선옛길을 이야기함에 앞서 우리는 1800년대로 돌아가 보아야합니다. 이미 당시의 대동여지도를 보셨습니다만 아무튼 1895년에 이곳은 ‘전생동’이었고 이곳 서민들의 삶은 그보다 자세합니다.
그래서 마을의 문화역사지도를 만드는 분들이 대단히 중요한데, 우리의 관심은 ‘生命-삶(生活)’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전래지명이 중요한데... 스토리텔링이라고 할까요? 전설이라고 할까요? 계묵재 약수터/ 고산절터/ 구경바위/ 냉정골짜기/ 두텁사 절터/ 사정(射亭)터/ 서낭당고개/ 소꼽당 버덩/ 청학정 터/ 청학정 폭포/ 치마바위/ 도락다리(석학동)/ 쇠경재(효현)/ 양짓말/ 어구 우물/ 임당말 등등 친근한 지명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또한 전생서의 정청에 看茁軒(간줄헌)이라는 편액이 붙어있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여러 문헌의 자료를 통해 조선통신사가 이곳을 지나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지적원도 등을 참고하여 조선통신사의 사행로를 확정하고 지금 전시되고 있는 저 지도[후암동마을지도]에 표시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사진 : 용산고등학교 앞 장벽...사진들...]그런데 후암동의 이 길은 100년 전 지금 용산고등학교 앞에서 한강도 건너지 못하고 막혀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리고 이어서 말씀 드리겠지만 기지의 담벽이 열리고 이태원에서 조사된 길과 연결하면 오늘의 주제는 일단 숨통이 터지는 것입니다.
계묵재 약수터는 앞서 언급한 (사진: 약수표시지도) 000년 지도의 그 ‘약수’ 자리가 아닐까요?
그리고 도락다리(석학동)는 앞서 말씀드렸지만 ‘지적원도’와 ‘병영부지도’를 대조하며 답사하면 지금도 물소리가 들리는 “... 용산구 후암로 13-1 / 지번주소 용산구 후암동 214-1번지...” 일대를 비정(比定)할 수 있습니다. (사진: 약수표시지도)기왕 마을지도이야기가 나왔는데 조선통신사가 지나간 영천의 신녕 찰방역에는 벽화를 4백년 전의 역사를 전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소전원에서 (사진: 오다와라 조선통신사 일본 행로) 이 마을지도를 통해 다이렌지에 1차사행의 정사 여우길- 부사 경섬 등이 거기 머물렀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검색창에 :조선통신사의 잠자리[1]...“를 치시면 좀 더 자세히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6) 전생동으로 불리던 100년 전 후암동 길은?
이 길이 막히던 당시의 모습은 어땠을까요...우리는 러일전쟁이 끝난 것은 1905년이었고 이곳에 일본인들이 기지를 조성하면서 1907년 8월에 제작했다는 용산병영부지명세도에는 전생서와 석학교[돌確] 주변에만 인가가 보이는데 5년 뒤 1912년 토지조사부와 지적원도를 비교해보면 대지 254필지가 보입니다. (사진: 지적원도 : 재촬영... )
지금 후암동은 8,665세대에 인구는 18,752명(남자 9,423명, 여자 9,509명 -2017. 01. 01일 현재)인데 삼판통으로 불린 당시에는 대지-밭-논-묘지-잡종지-임야를 모두 합한 토지가 126,186평(축구장 약 60개/7140㎡)이었는데, 66.7%에 해당하는 84,210평을 동양척식회사를 비롯한 일본인들이 점유한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사는 집을 짓는 대지로 조사된 총수[대정원년(1912)12월 기준]는 254필지 23,593평이었습니다. 이 가운데 국유지가 11필지 3900평이었는데 거의 대부분 전생서와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대지소유의 비율도 다음 표에서 보듯이 일인과 조선인의 비율이 거의 1:1입니다.
99번지는 후암동의 입구인데 梅田新太郞[우메다신따로]이라는 일인이 토지대장에 이름을 올렸는데 김상옥 열사와 추격전을 벌인 종로경찰서의 형사와 이름이 똑 같습니다. 동명이인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이 또한 살펴볼 이야기입니다.
지적원도 위의 전생서 : 후암동엔 전생서외에 연산군 때 잠시 문묘를 옮기려 1년 남짓 공사를 벌이다가 중종반정으로 중단되었는데 만일 그 땅을 제외한 국유지는 모두 전생서에 속했을 것입니다.. 국유지로 370번지 영락보린원 일대인 전생서에는 관원으로는(『경국대전』에 의하면,) 타관으로 겸직하는 제조(提調) 1인과 주부(종6품) 1인, 직장(直長, 종7품) 1인, 봉사(奉事, 종8품) 1인, 참봉(종9품) 2인, 서리 8인이 있으며, 이 밖에 고직(庫直) 3인과 사령이 배치되었고, 희생으로는.... 한 때 황우(黃牛) 3마리, 흑우(黑牛) 28마리, 양 60마리, 염소 14마리, 돼지 330마리를 항상 사육해서 궁중에서 1년에 소요되는 황우 3마리, 흑우 35마리, 양 57마리, 염소 14마리, 돼지 521마리를 공급하였다는데...이 규모라면 시대에 따라 변동이 있었다하더라도 ... 상당한 토지와 물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갑오개혁이후 전생서가 없어졌다고들 하는데(여러 안내판...)...부서를 개편해 그대로 존속한 것이 光武6년(1902)관보에 보입니다.
후암동 105번지, 114번지 국유, 192번지 186번지 등을 중심으로 토지대장등본(폐쇄등기부등본)을 떼어보면 좀 더 자세한 사정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1907년 5천분의 1지도인 용산兵營부지명세도와 기밀로 가려진 한강통의 지적도가 공개되면... 좀 더 자세한 사정을 알 수 있을 것이지만...이 부분은 따로 연구되어야겠기에 오늘은 그냥 이 정도로 지나가기로 하겠습니다.
7) 이태원과 황학동과 부어치
이번에는 막힌 길의 건너편 이태원쪽을 한강에서 걸어오면서 살펴보겠습니다. (사진: 한강사진...‘교재’ 8-9쪽 ) 지금 한남대교 부근에 한강진이 있었고 (사진: 제천정사진...) 제천정이 있었으며, 이 나루터에서 행인들은 좌우에 논밭이거나 공동묘지가 있었던 고개를 바라보고 이태원을 향해 나아갑니다. 오른쪽엔 남산과 성벽이 따라가고 부어치 고개마루에 오르면 두텁바위길이 빤히 보입니다. 이제 멀리보이는 남묘를 돌기만 하면 바로 남대문입니다.
원(院)이 조선시대 공용숙소였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고 새재를 넘고 한강을 건너 서울로 들어오는 마지막 쉼터라는 것도 또한 잘 알려져 있습니다. 홍제원-광혜원-퇴계원-조치원-장호원-대소원-사리원-홍경원...등 원자가 들어가는 지명 말입니다. 요즘 파주의 혜음원(사진: 혜음원발굴...) 은 수억을 들여 이렇게 발굴을 하고 역참에 대한 관심이 높아가고 있는데 전국에서 가장 큰 청파역이나 서울의 인후인 이태원에 대한 연구는 소홀한 것 같습니다. 아주 손도 대지 않은 것 같습니다. [김홍렬-김천수 등 문의..] 아무튼 지적원도를 살펴보니... 지금 이태원 전철역 서남쪽 그리고 용산구청 뒤편에 한강을 바라보고 국유지와 동척(東拓)소유의 토지가 대량으로 나타나는데...숙소인 이태원은 부어치를 넘어 지금 기지 안에 자리 잡고 있었다는 증언이 압도적입니다. 이곳의 주민이 용산고등학교 부근으로 이주했다는 기록과 기왓장이 발견된다는 구전도 있습니다만 지표조사 등등 확실한 근거를 마련해야할 것입니다. 또 어느 기록에는 원 주변의 인가를 지금 용산구청 뒤로 이주시켰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만 지금 저로서는 신빙할 자료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한강진도 제천정도 이태원도 지금으로서는 기왓장 한 장도 제시할 수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렇게 말끔하게 유적이 사라진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황학동이라는 지명은 구전과 오직 강점기의 지도와 1908년 관전답성책에서만 확인되는데(국사편찬위원회 등등 대충 살펴본 결과...) 이 지명에 대한 확인이 시급합니다.
부어치를 찾기 위해 우선 몇 장의 사진을 보도록 합니다. (사진: 병영사진) 먼저 보이는 흑백사진은 항공촬영된 것인데 부드러운 능선을 주의해보도록 합니다. (사진: 커피나무 원경) 이 능선은 남산에서 둔지산으로 흐르는 주맥(主脈)입니다.
관전답명부에는 67명의 소작인과 과목전 등의 명칭이 보이는데(사진: 관전답/토지명부) 관심이 가는 것은 넛바위/ 네 바휘/ 부어터/ 붕엉재/ 벗텃/ 타문재/ 장문개/ 간문어고개/ 한발아개/ 당겟/ 황학동/ 8통 /11통 등의 지명입니다.
이 인명을 1914년 토지대장과 대조해 보니 다시 황학동-응골-벗텃-당겟 등에 집과 밭을 소유한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예를 들어 220번지의 77평 대지를 소유한 朴日福씨는 관전답 명부에는 ‘벗텃’이라고 표시되어 있습니다. 이 자리는 지적원도의 220번지이고 지금의 창의어린이공원 모서리인데 논리적으로는 이 부근이 ‘부어티’라고 불리운 마을로 현지 원로에게 전해오는 이야기를 채록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웃한 192번지 사사지는 지금도 그대로 이태원부군당인데 그렇다면 고개가 부어티-벗터-부아치-내부아... 등등으로도 불리고 한풍재-찬바람재라고도 불린 ‘부아치’요 아울러 조신통신사의 길로 확정할 수 있습니다.
천안과 평택 경계 봉선홍경사의 경우(사진: 천안 봉선홍경사...) ... 객관(客館) 80칸을 세워 광연통화원(廣緣通化院)을 세웠다는 기록만 보더라도 적지 않은 대지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임란 이후 원이 쇠퇴하고 점[주막(酒幕)]이 성행했다는 기록을 보면 혹 지금 이태원1동이 원터였고 2동이 민간주도의 점(店)이 아니었는지의 연구도 필요합니다. 여기 중요한 사실은 이태원 원주민들의 이주에 관한 문제입니다. 김천수 선생의 둔지미 마을 연구와 같은 연구가 진행되어야할 것입니다
아무튼 녹사평대로를 지나 전생서를 바라보고 두텁바위고개를 오르려던 나그네는 이태원초등학교 앞에서 길이 막힙니다. 남산을 넘을 수도 없고 둔지미산을 넘어 한강으로 빠질 수도 없습니다. 게다가 지금 대림아파트자리에 남북으로 길게 사격장을 만들었으니 혹시 하이야트호텔쪽(사진: 지적원도...냇물...호텔 위치) 으로 남산을 오르려 한다면 총알받이가 되기 십상이니 말입니다. 길은 한 갈래지만 산과 강으로 그리고 일본의 군사기지로 가로막아놓았던 것입니다. 물론 일본 군인들이야 이 길목을 열 수도 있고 닫을 수도 이었겠지만 말입니다. 결국 한강철교를 지나는 그 길에 ‘교통’이 제공하는 모든 ‘독점적 특권-혜택’을 부여한 것입니다.
8) 1914년 이태원리 :
우선 대강 살펴본 바로는, 이태원리의 대지는 1914년 대정2년 조사에 의하면 171필지 23,369평인데 국유가 21필지 9,781평으로, 이에 대해 민가는 150필지에 13,588평인데 단수 계산하면 가구당 90.59로 약 100평 꼴입니다. 현재 이태원 인구는 8천여 세대 1만8천여 명으로 추산 됩니다. (사진: 지적원도...냇물...호텔 하이야트 위치) 민가 150 필지에 비해 논은 6필지 2,584평으로 약 열 마지기 남짓으로 터무니없이 부족하고 밭은 251필지 165,823평인데 실거주자를 더 분석해야겠지만 소작을 하거나 생계에 턱없이 부족하다면 오히려 쌀을 바꿔 먹을 수 있는 어떤 전문업종에 종사한 것이 아닌 가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눈에 뜨이는 것은 1만평에 달하는 분묘지인데 국유가 8필지에 6,578평이고 민간이 11필지에 3,323평인데 민간의 평균은 필지 당 300평쯤으로 이 또한 지형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만 강점기의 지도에도 지금 용산구청 아래쪽으로 길 좌우에 공동묘지표시가 보입니다.
192번지...사사지54평이 민간으로 분류된 것은 지금 역사공원이 된 이태원부군당입니다.
지금부터 자세한 조사와 연구가 이루어지겠지만 그리고 우선 동양척식회사와 일본인의 토지소유는 대략 57,897평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것만 지적해둡니다.
9) 기지 안의 토막 난 길 : 남단(南壇)
군용지 안의 관심구역은 남단(南壇)이라고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임금이 친히 하늘을 우러러 비를 바라던 남단은 지금 이런 형태로 방치되어 있다는데- 김천수 선생의 증언입니다.[사진 : ] 저는 이 안에 마음대로 들어가 볼 수 없으니까요...북경으로 비유하자면 ‘천단(天壇)’에 해당하는 것이 아닐까요?! [사진 : 북경 천단 : 祈年殿] 임금이 풍년을 기약하는 장소니까요...이 자리는 제 모습을 갖추어야겠지요?! [사진 : 1940년 대경성명세도] 신기한 것은 이 지도에서 보시듯이 ... 이곳이 경복궁이고 이 자리가 남단으로 추정 되는 곳인데 정남쪽 아닙니까? 조상들이 어떻게 이런 정남을 택했는지 궁금합니다. 그러니까 통신사는 선조 때 지금 덕수궁자리 행궁에서 광해군 때는 창덕궁[지도를 가리키며]에서, 인조 때는 예전 서울고등학교 자리의 경희궁에서 출발해서 남대문을 거쳐 이 남단 위를 지나간 것으로 보입니다. 시의 기록으로는 남단의 남북으로 [옛길위의 조선통신사 74쪽] 큰 길이 있다고 했는데 ‘병영부지명세도’의 이 자리라면[지도를 가리키며] 남북의 도로는 대략 이렇게 추정할 수 있습니다.
[지도를 가리키며] 잠시 오른쪽으로 방향을 돌려 보겠습니다. 용산구청에서 터널을 바라보고 일직선으로 뻗은 녹사평대로는 그대로 군용지의 담장이 되어 100년의 장벽을 만들었는데 제게 이 철조망은 베를린장벽이나 DMZ를 연상케 합니다. 아무튼 이 금안에 들어간 민간의 주택 논밭 묘지와 영남길 1번 도로는 모두 ‘통행금지!!’ 100년의 어둠속에 갇혔습니다. 이 기지 안에 들어가 본 몇 전문가들은 놀랍게도 지형이나 길의 형태나 옛길의 윤곽을 느낄 수 있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림의 떡입니다. 아니 그림도 없는 상상의 떡입니다. 다만 옛지도나 지적도를 참고하면 담장 앞에서 끊어진 길의 토막(사진: 30년대 지도들...연속으로 보여주면서 낙지 다리처럼 토막 난 부분을 강조함)이 보이고, 또 반대편 용산중고등학교쪽에서 보이는 토막을 점선(點線)으로 이으면 이 길을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정형외과에서 부러진 뼈를 잇듯이 남대문에서 이태원 한강진을 이으면 속 시원히 100년 전 부산으로 가는 길과 역사가 보인다는 것입니다. 행상들의 왕래와 (사진: 전차가 생기기 전 개화기 남대문 앞 행상들)선비들의 과거길 그리고 역참따라 말을 달리던 역졸들의 모습이 연상됩니다.
10) 유네스코 조선통신사와 일본 :
임진년에서 정유년에 이르는 조선에서의 분탕질 끝에 일본은 동서의 내란을 나고야[名古屋] 인근의 세키카하라(關原)에서 1600년10월21일 단 하루 만에 끝내고[사진 : 세키카하라 고전장] 교토의 신권[天皇]정부와 도쿄의 군사정부[幕府]가 양립하면서 실질적 오늘날의 영토에 육박하는 통일의 대업을 달성하게 됩니다. 교토를 중심으로 동경과 후쿠오카는 동서로 각각 500킬로쯤 되는 길인데... 1600년대 초에 닦여지는데 그 명분이 조선통신사의 초청이었습니다. 이 길[사진 조선통신사 일본 복원 옛길]은 처음에 군사정부를 지지하는 외교적 성과와 안보를 보장받고 서양문물을 받아들이고 안으로는 산업과 상업의 동맥이 되어 오늘의 일본을 이루는 동맥이 되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사진[사진]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10리마다 소나무[사진]를 심고 역참[사진]을 복원하고 역참의 판화를 만들어 미술관을 설치하고 길[사진]을 닦아놓았습니다. 김홍도의 주막같은 [사진]우다가와 히로시게의 이 판화는 고호의 그림[사진]에도 남아있습니다.
한편 우리는 길을 닦고 산업을 일으키는데 실패하고 장승도 사라지고 주막도 사라지고 이태원도 자취가 없고...그 결과 다시 이곳에 일본 군인이 기지를 건설하고 ... 그렇게 가로막힌 이 한 토막의 길이 ...(어두운 역사의)...그 증거입니다.
11) 제언 : 생각2
여러분들이 후암동 주민이 되어 생각해 보십시오. 한강에 가보고 싶어도 걸어서 1시간도 안 되는데 용산고등학교앞에서 막혀있습니다. 지난 100년간 막혀있었습니다. 지금도 막혀 있습니다. 동유럽사람이 호수를 바다로 생각하고 살았듯이 후암동 분들은 한강을 건너 부산에 간다는 것은 까마득 잊고 살았는지 모릅니다. 이태원분들이 후암동을 지나 남대문시장에 간다는 것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이 길이 열리고 보존된다면 분단으로 갇혀 살던 분들이 잔디를 밞아보고 관악산의 스카이라인을 호흡하고 100년 묵은 역사의 체증이 뚫릴 것입니다. 일제가 산맥에 쇠기둥을 박아 정기를 끊었다는 말이 있었는데 이 길이야말로 역사의 동맥을 끊은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말을 좀 바꾼다면 이 자리는 용산구민에게나 서울시민에게나 우선 마당이랄까? 산소랄까? 정원이 생기는 셈이요...역사가 살아나고 또 부산과 일본까지 먼 공간을 잇는 그런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센트럴파크가 없는 뉴욕을 상상해보십시오. 아울러 이 길가에 조선통신사 자료관이 세워진다면 전쟁기념관과 아울러 전쟁의 수습- 평화의 유지 등등 전쟁과 외교의 의미를 더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용산기지의 조선통신사 사행로이자 끊어진 옛길을 잇는 데 있어...
1) 전생서-남단-이태원의 지표조사- 문화유적 조사를 실시한다.
2) 일부 구간이지만 특히 기지 안의 옛길 지형을 유지하여 문화재로 지정하고, 이와 병행하여-나란히 지정탐방로를 확보한다.
** 베를린 장벽 철거후의 벽돌선[지도를 가리키며]이나 일본 옛길 표지[지도를 가리키며]등에서 보이는 유도로표지를 설치한다.
4) 체험학습- 옛길 걷기- 역사탐방 등의 주제로 시민의 참여를 유도한다.
5) 후암동과 이태원주민이 참여하는 마을역사지도를 제작하고 이 모임을 서울시-용산구-국토교통부-문화체육관광부-교육부 관계 학술-전문기관과 협조하여 지원함으로 객관성을 확보하고, 기초구간 또는 앞으로 부산까지 이어질 시범구간의 기준을 제시한다. (지방자치단체의 일부 영남길은 변형이 심각하였다.)
6) 조선통신사 사행로 표지판을 설치하고 역사공원 내에 평화사절로서의 전시공간을 마련한다.
여기 계신 시민 여러분- 조선통신사 후손들의 모임인 조선통신사현창회 임원 그리고 도시계획 관계자 여러분 - 특히 국토교통부와 문화체육관광부와 교육부는 이 토막 나고 상처 난 길을 치유하는 일에 힘을 모아 건강한 대한민국을 만들어주시기 바랍니다.
맺음말 : 오늘 이야기의 사족입니다. 저는 2015년에 일본 사람들과 함께 서울에서 부산까지 그리고 뱃길을 눈여겨보며 오사카에서 동경까지 조선통신사의 길을 따라 1200킬로를 걸어보았습니다. 그러나 이 토막 난 길은 ‘삼각지’로 빙 돌아가야 했습니다. (사진: 베를린장벽-아우슈비츠-추모의장소) 베를린의 추모의 공간은 약 6천평이라는데 2005년 개관 첫 해에 3천5백만 명이 다녀갔다 합니다. 독일처럼 도쿄(東京)가 반으로 갈리고 세키카하라에서 동서로 또 일본의 반이 나뉘지 않고 왜 한국에 38선이 그어져야했고 또 3년 동안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은 이런 일이 벌어져야합니까? 우리는 그 해답을 얻을 때까지 이 ‘공간’을 원형대로 유지하고 ‘역사적 의미’를 새겨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의 현명한 답을 기다립니다.
감사합니다.
옛길에는 나그네의 시름만 서린 것이 아니라
제천정의 시구(詩句)도 있고
보부상의 등짐에 실린 그리움도 있다.
타박타박 짚신에 풀리는 연기처럼 실록에는 없는 역사도 있다.
옛길엔 자격루(自擊漏)가 없지만 북두칠성을 안고 도는 느티나무가 있다.
옛길엔 구중궁궐- 순라그림자는 없지만 눈을 부라린 장승의 그림자는 있다.
고승의 법문을 득도한 불탑은 없지만 서낭당의 돌탑은 매일 한층 꿈을 얹는다.
돌아보라! 돌아보라!
고개를 넘기 전에 돌아보라!
옛길에 쌓인 역사를
옛길에 수놓았던 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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