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용산기지 유네스코(2) 역사의 거울

양효성 2018. 10. 17. 16:23


    역사는 왜 현장에 있어야 하는가?
       - 시민의 한 사람으로 ‘용산기지’에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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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6.29. ‘순화동천’에서 강의한 원고 초록으로 사진은 다음기회에 모아 싣기로 한다. 



... 이 자리는 거제수용소나 땅굴과는 또 다른 의미가 있는 곳이다. 역사공원으로 미화(?)할 것이 아니라 ... 국토상실의 아픈 역사를 반추하는 유적으로 보존 되어야한다. 한국근대사를 관통하며 한 마을의 안식처뿐만 아니라 민족의 안위를 사색할 수 있는 하는 공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 거듭 말하지만 우리는 디즈니랜드를 보고 싶은 것이 아니라 역사의 현장 그 기지가 궁금하기 때문이다.
      


.... 이 자리는 1595년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후방병참기지가 건설되었다고 하며, 1882년 임오군란으로 진입한 청나라 군대 3천명이 주둔, 그리고 1884년 갑신정변 때는 일본군이 주둔했다. 이후 일본이 청일전쟁,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한반도에 일본군을 진주시키기 시작했고, 그 중 20사단을 이 곳 용산에 주둔시키게 되었다. 20사단이 주둔한 이곳은 향후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일제 조선군 본부가 위치하게 된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면서 미군이 일본의 군사 시설이 있는 이 곳을 접수했고, 그 자리에 보병 제7사단을 주둔시켰다. 그러다 1949년 병력을 철수했다가 한국 전쟁이 발생하자 다시 복귀했고, 1953년 8월 15일에 다시 이 곳에 입주하여 현재에 이르고 ...(워키백과)


용산기지의 주인 : 솔직하게 이 땅의 주인이 궁금합니다. 다음이나 네이버의 지도에 이 부분에 먹칠이 되어있는 마당에 솔직히 민간인의 신분으로 이곳의 토지대장이나 등기부등본의 설정 또는 국제적 조약에 대해서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 일을 주관하는 분들은 이러한 국민들의 위축된 정서도 염두에 두어야할 것입니다.

‘용산공원’[사진 : 일본군 사령부]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천안에 살고 있는 제가 무슨 상관인가 이런 생각을 했는데...‘용산역사공원’ 이런 생각을 하자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이곳이 궁금했던 것은 그 역사성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물론 서울과 인천에서 오래 살았고 천안에 노후의 둥지를 튼 것은 10년 가까이 되지만 어디서건 여전히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혹 정부관계자들이나 학계에서 의견을 청취해 주신다면 그저 평범한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함께 할 사람이 상당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시고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이번 612 싱가폴 회담이 있었고 그에 앞서 분단 후 남북회담이 남측지역에서는 처음 열렸는데 이 모든 일이 이 공간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주관하는 분’들이 ‘이 곳’을 국민(주민 또는 범위를 확대하여 시민 그리고 관광을 포함하여... 세계인들...)들을 위한 공간으로 바꾸겠다는 것입니다.


그림  전쟁기념관에서 바라본 용산기지의 모습, 멀리 부어치고개의 능선이 부드럽다[2018]

우리는 기지를 보고 싶다. : 국민의 한 사람인 나에게 묻는다면 이 공간을 바꾸지 말고 즉, 일단 그대로 두고 먼저 그 안을 국민들에게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휴식이나 미적 가치보다는 이 공간이 의미하는 역사성의 가치가 더 크다는 뜻입니다.
좀 더 적극적으로 말하면 대한민국이 분단 즉 반쪽 국가가 된 반성과 반추의 장소가 바로 이곳이기 때문이고 나아가 국토로 보면 하나의 점에 해당하는 이곳을 동심원[축(軸)]으로 하여 역사를 바로 세워 번영의 미래를 설계했으면 합니다. ‘반성 없는 민족에겐 미래가 없다’ 또는 ‘불행한 역사는 기억하지 않으면 반복된다.’는 대 전제가 이 장소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 국가의 삼요소인 국민 영토 주권의 상징이 이곳 아닙니까?

임진전쟁과 이곳 : 매우 단순한 예로 이 자리는 1592년 5월 임진왜란 때 加藤淸正이 지나간 곳이고 또 그 스토리텔링으로 黃鶴洞이니 異胎院이니 하는 말들이 전해오는 곳입니다. 그 당시 선조 24년(1591) 정월, 일본에 간 통신사 황윤길과 김성일이 귀국했는데 《국조보감》에 의하면 서 살펴보기로 합니다.

  황윤길이 그간의 실정과 형세를 치계하면서 “필시 병화(兵禍)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복명(復命)한 뒤에 상이 불러 보고 하문하니,
김성일이 아뢰었다.
“그러한 정상은 발견하지 못했는데, 황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인심이 동요되게 하니 사의에 매우 어긋납니다.”

그리고 7년의 병란이 조선팔도를 휩쓸었습니다. 뒤 이어 1607년부터 1811년까지 12차례 이 기지의 이태원을 통과하여 조선통신사가 지나갔고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 1906년에는 韓國龍山軍收用地明細圖가 작성되면서 이곳에 다시 일본군이 기지를 건설하면서 불행한 역사는 반복되었습니다. “그러한 정상은 발견하지 못했다...” 는 궤변이 이 장소에 반복되어선 안 된다는 교훈을 책으로만 받아들이기엔 현실국내외적으로 모두 너무 嚴重합니다. 19세기 말 임오군란이 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청일군대를 이곳에 불러들이고 그런 저런 사이에 1910년을 겪고 또 1950년을 겪은 일들이 모두 이곳에서 일어났습니다.
   
엄격히 말하자면-다시 말씀 드리지만- 전쟁에는 승자도 패자도 없습니다. 둘 다 희생을 치르기 때문입니다. 나치가 되었던 유태인인 되었든 그래서 둘 다 그 끔직한 현장을 기억하자는 것이 그나마 인류 공통의 합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본처럼 자신들의 피해인 나가사키(長崎)나 히로시마(廣島)는 기억하고 야스쿠니(靖國神社)나 군함도는 추모하며 평화헌법을 주창하는 이 현실의 엄중함을 우리는 “그러한 정상은 발견하지 못했다...”는 거울로 반성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에 ‘위안부’문제를 ‘불가역적’으로 조인해 준 사례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래서 국민의 한 사람으로 저는 이 일을 ‘탑 다운’방식이 아니라 ‘바틈 유니온(Bottom Union)’ 방식의 전문가그룹의 엘리트 실무자연합에서 공감대를 만들어야 추진하기를 건의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하고 있겠지만 말입니다. 국토교통-국방-외교-문화관광-교육-서울시청...관계분야의 엘리트그룹 말입니다.  


   그림  한 번 일어난 일은 다시 일어날 수 있다...어느 유태인 작가... [베를린 추모의 장소]


Nie Wider - Never Again ; 뮌헨의 다카우수용소에는 이런 글귀[사진 ]가 5개 국어로 씌어있습니다. 적어도 임진전쟁과 관련하여 그런 일은 다시 일어나지 말아야할 것 아닙니까? 그것도 부족해서 1910년 같은 일도 다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사진 ]이 자리에 일제의 사령부-총독관저-미소공동위원회 소련 숙소도 있었다고 합니다. 여기 새로 지은 전쟁기념관은 어떤 면에서는 ‘역사의 아픈 반성’이라기보다는 ‘전승기념관’같은 밝은 느낌이 듭니다. 그런 ‘활기와 자신감’에 앞서는 ‘반성’의 엄숙함이 덜 하는 것에 저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어떤 분이 ‘용산공원’이라는 청사진을 보여주었는데... 시민의 한 사람으로 제 눈에는 아픔의 장소라기보다는 ‘놀이터’로 보였습니다. ‘밝은 미래’를 누가 반대하겠습니까?! 그러나 ‘잔디를 깔아 뭉개놓고 평화의 샴페인을 터뜨리는...’ 어리석음은 반성해야합니다.

한 장의 사진 - 南廟의 운명 : 역사는 현장이 있는 한 현실입니다. 현장이 없으면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립니다. 하물며 살아있는 위안부가 증언해도 부인하는 당사자들이 있는 마당에 그 현장은 얼마나 중요하겠습니까? 이 사진[사진 ]을 보고 누가 이곳에서 조명연합군- 즉 명나라 원군들이 생명의 안전을 기원하며 향불을 사르던 기도의 장소라고 믿겠습니까? [사진 ]저는 그저 평범한 시민으로 이곳이 중구청 관할이라는 것을 알았고... 몇 번이나 문화재담당자에게 전화를 했었는데...‘도동 개발’로 사당동으로 옮겼다는 ‘인터넷 게시물’을 어디선가 보았습니다. 아시다시피 유적 유물이라는 것은 그 자리를 떠나면 이미 그 ‘존재 - 있음의 의미’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걸핏하면 복원이라는 말이 유행인데 ‘원형’의 입장에서 보면 그 반은 ‘불구(不具) 또는 부상(負傷)’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동묘는 ‘東廟앞 전철역’까기 만들어져 건재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더구나 남묘는 1607년부터 1811년까지 12차례 조선통신사가 이곳에서 동경까지 먼 길을 떠나는 출발의 의지를 다지던 곳이기도 했습니다. 그 후손들이 그 옛길을 찾아달라고 건의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또 한 장의 사진 - 남단의 훼손 : 이번엔 용산기지 안에 존재하는 문화재이야기입니다. 임금이 손수 기우제를 지내던 이 제단은 지금 이런 모습입니다[사진 ]. 더 심각한 것은 남단고개로 알려진 뒷덜미가 잘린[사진 ] 이런 모습입니다. 이 자리는 아마 조선통신사가 열두차례 지나간 곳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리고 남단고개-이태원고개라고 불러도 무난할 장소입니다. 마치 작두로 목을 자른 흉측한 모습입니다. 1900년대 초 [사진 ]지적원도를 따라 조선통신사의 옛길을 더듬어 온 후손들은[사진 ] 이 길을 찾아달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국토와 인후(咽喉) - 역사의 고속도로: 국가의 삼요소의 하나인 국토 안보의 용산기지 문제를 서울시청이나 용산구청이 바라보는 시각과 국토교통부가 바라보는 시각은 당연히 같을 수는 없습니다만 그 동심원은 공통분모여야 합니다. 한마디로 이 자리는 우리 국토로 볼 때 남쪽으로는 인후에 해당하는 곳입니다. 얼마 전에 혜음원[사진 ]이라는 고려시대의 국토 국가공용숙소가 발굴된 일이 있는데 개경으로 본다면 이곳이 당연 인후가 되는 곳이겠지요. 이 지도[사진 ]에서 보이듯이 1900년대 초에 이곳을 막으면 남도의 사람들은 서울로 진입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직벽에 가까운 남산에는 호랑이 그리고 한강철교나 지금 용산역이나 서울역은 일본인들이 가로막고 있지요. 강을 따라가다 보면 마포나 강화도로 흘러가게 됩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문경조령관을 통과하는 조선통신사의 길을 조사해보니  32개의 역참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올라오는 모든 공산물은 자연스럽게 일본군을 통과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목을 지킨다는 병법에 비추어 이 자리가 왜 중요한지 또 이태원-남단을 왜 발굴-조사해서 역사의 물꼬를 트고 또 온 국민들에게 그 실체를 보여주어야 하는 것인지? 국토교통부는 또 하나의 역사의 고속도로를 뚫는 일을 지금 눈앞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단순히 영남로가 아니라 의주로를 거쳐 중국과 왕래하는 실크로드의 길목이기도 한 곳입니다.


그림  1763년 김윤겸의 청파도

두 장의 사진... : 이 사진[사진 ]은 청파의 옛 모습입니다. 우리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곳의 옛 모습을 알고 있다고 자신 있게 단언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 그림은 1763년8월3일 고구마 대사 조엄이 11차 조선통신로 일본에 갈 때 서기로 동행한 원중거와 교유하던 김윤겸의 水墨淡彩(28.6×51.9㎝)인데 멀리 한강이 보이고 왼쪽에 이태원의 응봉이 묘사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음사진[사진 일본군 병영]은 이미 일본군이 청일 노일 두 전쟁을 지낸 뒤의 모습입니다. 물론 김윤겸의 청파도는 임진전쟁이 끝나고 11차례나 통신사가 지나간 들판의 모습이지만 이 그림위에 다시 일본이 병영을 마련한 것이 우리에게 아픔을 느끼게 하는 것이고 또 일본의 태도와 그 태도에 대응하는 일부 학자들[뉴 라이트 등등]의 태도와 그에 순치되는 제3세대들을 생각한다면 이 지도[사진: 龍山軍用地收容圖..]가 주는 의미를 새삼 새겨보아야 할 것입니다.

제안 - 순차적 개방 : 1910년의 불행한 상황을 엄밀히 돌이켜 보면 ‘잠식(蠶食)’이라는 말처럼 이 상황을 잘 설명할 수 있는 단어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도식적 비교는 어렵다 하더라도 강자와 약자의 상호 대응 방정식에서 유태인과 한국인의 처지는 여러모로 되짚어볼 부분이 많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따라서 가해자이든 피해자이든 제삼자이든 전쟁의 흔적-유적에 대응하는 몇 가지 예를 참고해 보기로 합니다. 결론부터 말씀 드리면 용산 기지를 ‘근대사의 현장’으로 ‘국민에게 우선(優先) 공개’하고 ‘참관인들의 자의(恣意)’에 맡겨두는 것이 성숙한 자세라고 생각됩니다. 이 장소는 사색을 통해 국토의 보전을 다지는 그런 장소가 되어야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 장소는 군대가 주둔했던 곳으로 경비나 통행이나 생활공간이나 인프라가 잘 갖추어져 관리인만 배치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됩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리지만 ‘우리[시민]는 기지 안이 궁금하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베를린의 전쟁 유적들

1. 검문소 찰리 포인트
이곳은 용산기지의 게이트와 다를 바 없는 곳[사진 100-1]이지만 분단의 상징으로 베를린 관광객들은 놓치지 않고 지나는 곳입니다. 그리고 그 분단도 1989년에 이미 통합 치유되었는데도 말입니다. 용산에는 사진에 보이는 [사진 100-5 ]15번 말고도 여러 게이트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2. 장벽들은 여러 형태로 남아있습니다. 가장 유명한 이스트 갤러리[사진 101-]인데 모두 자연스럽게 도시환경과 어우러지면서 아픈 역사를 함께 극복해나가는 모습입니다. 차례대로 몇 군데 그리고 도시계획으로 수용되어 재개발된 곳(?)들의 모습[사진 ]을 보기로 합니다.
동복 쪽의 한 구역은 철근을 고스란히 남긴 구역[사진 ] 또 막힌 구역 녹지화 구역 그런 공원으로 도시와 역사와 사색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번화가를 지나는 그리고 [사진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팔각정을 세운 포츠담광장 옆으로는 이렇게 낙서된 장벽을 남겨 놓았고 또 그마저 힘든 곳에는 [사진 ]지금 아주머니가 도보로 장벽을 넘는 모습을 보게 해두었습니다. 차도 지나가고 있고 살바돌리 달리 미술관의 쪽 창[사진 ]으로는 이런 모습도 보입니다.


그림  베를린의 一隅.... 길 건너 장벽들은 자연스럽게 시민들의 공원이 되어 있다.
                                                                (2016년겨울 촬영)
 

3. 유대인 학살 추모공원(Memorial to the Murdered Jews of Europe)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홀로코스트에서 희생된 유대인들을 추모하기 위한 공원으로 독일 베를린 중심가에 있습니다. 홀로코스트 기념비(Holocaust-Mahnmal) 공원으로도 알려졌는데 19,000 m² 면적의 부지에 2,711개의 콘크리트 비[사진102- ]가 세워져 있습니다. 우리 같으면 달랑 1개의 추모비면 될 터인데 서울 시청앞이나 광화문 또는 남대문쯤 되는 곳에 이런 공간을 만드는 것이 좀 어리둥절해 보이지만 막상 그 미로에 들어가 보면 국적을 막론하고 정말 전쟁에 대해 느끼는 것이 많습니다.
 커다란 관을 연상시키는 직육면체의 잿빛 비석들은 가로 0.95m, 세로 2.38m 넓이에 높이는 0.2m 에서 4.8m 까지 다양한데 비석 주변에는 총 41그루의 나무가 있다고 하며 지하에는 면적이 930 m²인 박물관도 있습니다.   내부에는 학살당한 유대인들의 이름과 개인기록이 전시되어 있는데, 이 정보는 이스라엘의 야드 바솀(Yad Vashem) 홀로코스트 박물관에서 받은 것으로  [사진 ]전시장, 회의실, 서점 등이 있습니다. 페터 아이젠만(Peter Eisenman)의 설계로 2003년 4월부터 건축이 시작되어 . 2004년 12월에 완공되어 2005년 5월에 제막식이 있었는데 완공되고 나서 첫 해에 3천 5백만여 명이 방문했으며 베를린의 명소로 꼽히고 있습니다. 건축 비용으로는 약 2천 5백만 유로.. [네이버 지식백과] 유대인학살추모공원 [Memorial to the Murdered Jews of Europe](두산백과 원용)


4. 유태인 박물관

베를린 추모공원 외에 유태인 박물관이 삼엄한 경비를 받으며 운영되고 있습니다.
인종차별이 구실의 하나였으므로 당연히 유태인의 우수성을 과학-음악-미술 등등 분야에 걸
쳐서도 전시되고 있습니다.  [사진 103- ] 
장벽의 유적과 함께 유태인의 문화와 삶 그리고 고통까지 섬세하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림  포츠담 회담이 열린...[2017 여름 촬영]


포츠담회담[Potsdam Agreement의 현장

...이 회담[사진 105 -]에는 영국의 처칠(뒤에 애틀리와 교체), 미국의 트루먼, 소련의 스탈린이 참석하여 독일에 대한 포츠담협정이 조인되었는데... 일본에 대한 포츠담선언에는 중국의 장제스도 참석했다고 합니다. .... 이 협정은 연합국의 독일점령 목적을 독일의 무장해제, 비(非)군사화, 비나치화, 민주화에 있음을 명시하고 그 가운데서도 독일산업의 비군사화에 중점을 두었고... 
첫째, 당분간 독일에는 중앙정부를 두지 않고 독일을 단일 단위로서 다루며, 분할을 궁극의 방침으로 하지 않는다.
둘째, 독일문제의 처리에 관한 외무장관이사회를 설치한다.
셋째, 독일로부터의 배상금 징수 등을 정하면서 오데르 강(江)·나이세 강을 독일의 동부국경으로 정하는 데 대하여 강화회담에서 영국·미국·소련 3개국은 이를 지지한다는 것 등을 약정하였다 합니다. 그런데 독일로서는 이 치욕의 조약과 영토분할에 대해 왜 굳이 전시하는 것일까요.... [네이버 지식백과] 포츠담협정 [Potsdam Agreement] (두산백과 원용)

폴란드의 아우슈비치


그림  이 정도의 모습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면 용산기지도 그냥 있는 그대로 개방해도 무방하다고 생각된다. [2017년 6월 촬영]


폴란드 남부 크라쿠프에서 서쪽으로 50㎞ 지점에 위치해 있는데 인구 5만 명의 작은 공업도시로, 폴란드어로는 오슈비엥침... 나치가 저지른 유대인 학살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으며, 당시 학살한 시체를 태웠던 소각로, 유대인들을 실어 나른 철로, 고문실[사진 106 ] 등이 남아 있습니다. ....  1940년 봄, 친위대 장관인 하인리히 힘러가 주동이 되어 고압전류가 흐르는 울타리, 기관총이 설치된 감시탑 등을 갖춘 강제수용소를 세웠는데[사진 ] 당해 6월 최초로 폴란드 정치범들이 수용되었고, 1941년 히틀러의 명령으로 대량살해시설로 확대되었으며, 1942년부터 대학살을 시작하였습니다.  1945년 1월, 전쟁 막바지에 이르러 나치는 대량학살의 증거를 없애기 위해 막사를 불태우고 건물을 파괴하였지만 소련군이 예상보다 빨리 도착하여 수용소 건물과 막사의 일부가 파괴되지 않고 남게 되었고. ... 1947년 폴란드의회에서는 이를 보존하기로 결정했습니다.희생자를 위로하는 거대한 국제위령비가 비르케나우에 세워졌으며, 수용소 터에 박물관이 건립되었는데 나치의 잔학 행위에 희생된 사람들을 잊지 않기 위해 유네스코는 1979년 아우슈비츠를 세계문화유산에 지정하였습니다. 약 3년 진행된 이 아픔을 역사는 길이 잊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아우슈비츠수용소[Auschwitz Concentration Camp, ─强制收容所](두산백과 원용)

일본 가나자와(金澤)현립 박물관
군 시설과 건물을 그대로 활용한 박물관으로 유적보존- 경비절감 재활용- 21세기미술관 등 주변 공간과 조화 등등 일석삼조의 효과를 노렸습니다. 주변의 10분거리에 겐로쿠엔과 각종 기념관이 모여 있습니다. [사진 107]후암동 - 이태원 등등 주변 환경과의 공존이 문제되는 지금 기지 안의 박물관의 관계 등도 참고할만합니다. 이 박물관 내부는 사진 촬영이 금지 되어 있만 그 내부는 알차게 꾸며져 있습니다.


그림  일본 금택의 현립박물관...군용시설을 그대로 재활용했다(2010년 촬영)



북경의 798藝術區, 798Art Zone
...798예술구는 베이징 동북쪽 코너 따산즈 지역에 위치한 로프트(loft) 형식의 대형 복합 예술단지이다. 이미 중국 전역에 위치하고 있는 로프트식 예술 단지의 표본이며 미술 애호가뿐만 아니라 일반 관광객들도 많이 찾는 예술 명소 일번지입니다.[사진 108]로프트식 예술 공간이란 뉴욕의 소호에서 시작되었는데 오래된 공장이나 창고를 개조하여 스튜디오나 화랑등의 예술 공간으로 활용하는 것으로 저렴한 임대료를 노리는 예술가들이 시 외곽의 버려진 공장 건물을 임대하여 작업실로 사용한 데서 유래했답니다. [사진 108]독일의 바우하우스는 일반일들도 모두 아는 용어로... 다샨즈 지역은 원래 군수물자를 생산하는 공장단지였지만, 지금은 중국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국제적으로도 영향력 있는 예술구역으로 변화했는데 정부지원으로 북경주재 외국 문화원들을 여기 모으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데... 이스라엘 독일 등은 이미 입주한 상태라고 합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798예술구 [798藝術區, 798Art Zone] (중국현대를 읽는 키워드 100, 국민대학교 중국인문사회연구소)

인천 아트프랫폼
인천아트플랫폼이 위치한 인천 중구 해안동 일대는 1883년 개항 이후 건립된 건축문화재 및 1930~40년대에 지어진 건축물이 잘 보존된 구역으로 당시의 근대건축기술 및 역사적 기록을 지니고 있어 건축조형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곳입니다.  [사진 109]인천아트플랫폼은 舊일본우선주식회사(등록문화재 제248호)를 비롯한 근대 개항기 건물 및 1930~40년대에 건설된 건축물을 리모델링하여 창작스튜디오, 공방, 자료관, 교육관, 전시장, 공연장 등 총 13개 동의 규모로 조성. 인천아트플랫폼은 이러한 도시의 역사성과 장소성을 최대한 살려 문화적으로 재활용하자는 시민들의 뜻과 인천시의 의지가 합쳐져 탄생. 인천아트플랫폼을 중심으로 이곳 개항장 일대는 거대한 스트리트 뮤지엄으로 확장되어나갈 예정이며, 그것은 과거의 역사를 보존하되 현재적으로 재해석하는 일....[네이버 지식백과] 인천아트플랫폼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오다루와 베르겐 :
옛 모습을 보존하여 삶의 지혜를 얻고자 하는 인류의 노력은 열거하기 힘이 듭니다. [사진 110] 한자동맹도시베르겐과 [사진 111]오타루의 교역과 물류의 역사적 흔적을 몇 장 더 소개합니다.


위에 제시한 몇 몇은  옛 건물을 그대로 사용한다는 점에서 재삼 참고해주시기를 수요자의 입장에서 전문가에게 제안해 보는 것입니다. 지금 전쟁기념관 마당의 비행기들은 어느 곳에 가도 볼 수 있는 전시물들입니다. 이 장소는 전쟁기념관 그 이상의 의미가 있는 곳으로 거듭 말씀 드리지만 우리는 디즈니랜드를 보고 싶은 것이 아니라 역사의 현장 그 기지가 궁금하기 때문입니다.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