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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마티스의 水墨畵(수묵화)- 베를린 베르그루엔 뮤제움

양효성 2017. 2. 12. 18:51

앙리 마티스의 水墨畵(수묵화)- 베를린 베르그루엔 뮤제움

 

먹물로 그린 마티스의 풍경....

거친 캔버스(라틴어로 '대마'라는 뜻의 cannabis에서 유래)에 기름으로 다양한 색을 입히는 서양화가가 오직 동양의 먹물로 흑백의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우리에겐 좀 낯설게 느껴진다. 그것도 당대 최고의 화가가!! 서양이 동양흉내를 내는 것이 이상하게 생각된 것은 아마 산업혁명과 아편전쟁 이후의 일이 아니었을까?

 

베를린 베르구루엔 뮤제움[Museum Berggruen]에는 앙리 마티스의 몇 점의 그림이 상설 전시되고 있는데 1947년에 그린 'The Filled Stillness of the Houses(61.5×48.5)'는 종이에 먹으로 그려졌다. ‘靜寂(정적)에 쌓인 집’... 그런 의미 같은데 고즈넉한 집또는 그냥 靜謐(정밀)’이런 정도의 의미가 아닐까?

 

먹으로 그린 그림...두 여인이 실내에 앉아 있다. 왼쪽의 세 줄은 커튼이라고 생각하자...그러면 소파 뒤의 나무는 자연히 창밖의 庭園樹(정원수)가 된다. 두 여인은 정면을 바라보고 있지만 그 앞에 책이 펼쳐져 있다. ... 이 그림에 각자 색채를 입혀보자! 마티스 스타일로! ... 그 다음에 이어지는 그림 니스의 수튜디오의 창틀과 ‘The Blue Portfolio- 파랑색 畵帖(화첩)’의 인물윤곽선을 자세히 보면 어쩐지 앞의 묵화의 윤곽선이 새롭게 뚜렷하게 보인다.

 

물론 서양의 목탄화 또는 칼끝의 예리함이 돋보이는 동판화에도 먹선[墨線]은 있다. 그러나 붓의 流麗(유려)함이 주는 생동감은 기대하기 힘들다. 마티스의 그림이 왜 우리에게 생동감을- 율동감을 선물하는가 하는 이유가 혹 여기 잇는 것은 아닐까?

 

화가의 그림이란 對象(대상)-오브제를

-다 그린다.

-보이는 대로 그린다.

-볼만한 것만 그린다.

 

감상하는 자는

-눈에 뜨이는 것만 본다.

-보고 싶은 것만 본다.

그러다가

-자세히 보니까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인다.

 

화가가 의도하지 않는 것이 눈에 뜨이는 경우도 있고, 당연히 화가의 의도를 관객이 왜곡하는 경우도 있다.

 

 

 

마티스의 묵화- 고요한 집 1947년

 

In the Studio in Nice(46.5×61) 1929

 

 

The Blue Portfolio (55.3×46.7) 1929

 

 

 

오른쪽에서 두번 째...여인의 초상(42.5×33) 1951

 

왼쪽은 마티스 오른쪽은 미국화가 조지 콘도

 

Woman Skipping, (4145×98) 1952

 

 

 

 

 

 

앙리 에밀브누아 마티스

(Henri Émile-Benoit Matisse), Henri Matisse

생일 18691231- 사망일 19541103

 

20세기 표현주의 화가로 야수파 운동을 주도했다. 강렬한 원색을 사용해 행복함과 충만함을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파블로 피카소와 함께 20세기 회화에 위대한 지침을 놓았다고 평가된다. 그가 주도한 야수파(Fauvisme) 운동은 20세기 회화의 일대 혁명으로 여겨지는데, 야수파란 고흐와 고갱의 영향을 받아 프랑스에서 일어난 미술 사조로, 원색의 강렬한 색채 사용이 특징이다.

 

순수하고 섬세한 색조, 단순한 선과 구성을 토대로 행복함과 충만함을 표현한 그의 그림들은 보는 사람의 마음까지 깨끗하게 만든다. 다음과 같은 마티스의 말은 그의 작품 경향을 잘 설명해 준다.

 

나는 균형이 잡힌 무구(無垢)한 그림을 그리고 싶다. 지친 사람에게 조용한 휴식처를 제공하고 싶다.”

 

마티스는 18691231일 프랑스 북부 르 카토 캉브레지에서 태어났다. 상인이었던 아버지는 그가 자신의 뒤를 잇기를 바랐고, 마티스는 이에 따라 파리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변호사 자격증을 땄다.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법률사무소에서 서기로 일했다. 어린 시절 그림에 대단한 재능을 보였다는 이야기는 없으며, 고등학교 시절에 데생으로 상을 받은 일도 있지만 후일 그의 표현에 따르면 그 당시에는 그림이 뭔지도 몰랐다.”라고 했다.

 

그가 그림을 그리게 된 계기는 단순하다. 법률사무소에 근무하던 중 맹장 수술을 받고 누워 있을 때 미술 교본에 실린 그림을 베끼던 이웃이 권유하여 취미로 시작했다고 한다.

 

1891,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마티스는 미술대학 입학시험을 준비하고자 파리 쥘리앙 아카데미에 들어갔고, 이곳에서 오랫동안 우정을 나누게 될 화가 알베르 마르케와 만났다. 이듬해 마티스는 당초 목표였던 에콜 데 보자르에 낙방하고, 장식미술학교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해 말, 루브르 미술관에서 모사를 하던 중 귀스타브 모로가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자신의 화실에 받아 주었다.

 

1893, 마티스는 카롤린 조블로와 동거를 시작하고 딸 마르그리트를 낳았다. 마르그리트는 마티스에게 크나큰 영감을 주는 원천이자 그의 작품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고 평가해 주는 중대한 조언자가 된다.

 

1895년에는 에콜 데 보자르에 들어갔으며, 이듬해 살롱전에 그림 4점을 출품해 성공을 거두고 국립미술협회 준회원으로 선출되었다. 화가로서 순탄하게 첫걸음을 뗀 그는 인상파 화가 카미유 피사로를 만나면서 인상파 미술에 관심을 가졌고, 고갱, 세잔, 우키요에풍의 예술 세계에 눈을 떴다. 이후 마티스는 더욱 밝고 강렬한 색채 표현에 몰두했는데, 그 결과 1897년 살롱전에 5점의 작품을 출품했다. 그러나 그중 저녁 식탁클로드 모네를 염두에 둔 인상파 그림이라는 비아냥을 들었다.

 

1899년에는 에콜 데 보자르의 조각부 야간반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는 평생 약 60여 점의 조각을 제작할 정도로 조각에도 큰 관심이 있었다. 또한 이해부터 살롱전 출품을 그만두고, 1901년부터 앵데팡당전에 출품하기 시작했다. 파리 미술계에서 마티스는 진보적이라고 간주되었음에도 다소의 인정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넉넉한 형편은 아니어서 생계를 꾸리기 위해 1900년 만국박람회 전시장으로 사용될 그랑 팔레 장식을 맡기도 했다.

 

1905년경부터 야수파의 시기가 전개되었다. 원색의 대비 기법, 단순화된 선을 바탕으로 점차 색을 강렬하게 사용하는 기법을 시도하던 그는 빨강과 초록, 주황과 파랑, 노랑과 보라의 강한 보색 대비와 활달하게 꿈틀거리는 듯한 붓놀림을 사용했다. 이런 시도는 열린 창모자를 쓴 여인에서 처음으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1905년 그는 살롱전에 젊은 선원, 목가를 출품했는데, 이 작품들은 강렬한 색채 표현을 연구하던 다른 젊은 예술가들의 작품과 나란히 전시되면서 야수들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20세기 회화에서 최초의 중요한 이즘인 포비슴(Fauvism), 즉 야수파는 이렇게 탄생되었다. 마티스는 야수파의 선두로 인정받았으며, 이듬해에 개인전을 열었다. 1908년에는 뉴욕과 모스크바, 베를린 등에서도 개인전을 열만큼 화가로서 성공적인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티스 자신은 야수파라는 칭호를 달가워하지 않았고, 그의 그림은 점차 순수하게 장식적인 방향으로 나아갔다. 또한 그는 이 무렵 알제리를 여행하고 도자기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는 조각과 도자기에 본격적으로 손을 댔으며, 이를 화폭으로 옮기기도 했다. 예술이 일상생활에 녹아 있어야 한다는 현대 예술가들의 담론을 그가 받아들였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는 장식적으로 나아가는 작품 방향과 그릇, 접시, 꽃병 제작 등에 대해 표현과 장식은 별개가 아니라 하나다.”라고 말했다.

 

마티스는 다양한 실험적인 시도를 했다. 1908년경 강한 색채 효과를 억제하는 한편, 피카소를 중심으로 전개되던 큐비즘(입체파)에 잠시 눈을 돌린 것이다. 또한 두 번에 걸친 알제리 여행에서 깊은 인상을 받고, 아라베스크나 꽃무늬를 배경으로 한 평면적인 구성과 순색의 대비를 통한 독특하고 강렬한 색채 묘사로 이루어진 작품을 그려 내기도 했다. 붉은 색의 조화, 붉은 방, , 음악, 목련꽃을 든 오달리스크등이 이 시기의 작품이다.

 

1910년경부터 스페인에 머물며 받은 인상을 세비야 정물, 스페인 정물등으로 표현했고, 1912년 모로코에 머물면서는 성문, 창에서 바라본 풍경, 모로코 카페등을 통해 다양한 시도를 했다. 1910년대 이후에는 니스에서 지중해 풍경에 영감을 얻어 니스의 실내 풍경같은 작품을 그리기도 했고, 장식성이 극대화된 장식 무늬가 있는 인물화등도 탄생했다. 또한 삶의 기쁨과 같은 평온하고 행복이 배어나는 작품들을 그리기도 했다.

 

 

그의 그림에서는 점차 공간이 평면화되고, 원근법과 같은 관습적인 기법들이 무시되었으며, 색채는 넓은 영역에 걸쳐 밝고 얇게 칠해졌다. 그림자는 제거되었으며, 형태는 굵은 윤곽선으로 표현되고, 세부 묘사가 거의 배제되었다. 자유분방하고 장식적이며 활달한 그의 그림은 관능적이면서도 쾌락에 찬 낙천주의를 암시하며, 다양한 여행을 통해 얻은 영감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마티스는 점차 (비난과 함께) 국제적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경제 사정 역시 풍요로워졌다.

 

나이가 들고 높은 명성을 누렸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이 이룩한 화풍에서 탈피해 새롭고 다양한 시도를 계속했다. 그는 조각, 판화, 삽화, 종이를 사용해 형태를 단순화하여 표현하는 등 방식에 있어서도 다양화를 꾀했다.

 

특히 그가 가위로 그린 소묘라고 일컬은 종이 오리기로 만든 작품들은 십이지장암 등으로 여러 차례 수술을 받아 유화를 그리기가 어려울 만큼 쇠약해진 그가 고안해 낸 대안이었다. 그는 종이에 과슈 물감을 칠하고, 이를 잘라 풀로 붙여 완성했다. 대표적인 작품이 20점의 작품 모음집인 재즈폴리네시아, 하늘이다. 재즈는 마티스가 서커스를 보고 느낀 감정을 표현한 것으로, 이카로스, 광대, 서커스등이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단순하지만 선명한 색과 역동적인 포즈가 생생하게 살아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을 보면 그가 당대의 가장 혁신적이고 젊은예술가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세르게이 디아길레프가 제작한 나이팅게일의 노래에서 무대 배경과 의상을 맡기도 했으며, 방스 로제르 예배당의 스테인드글라스를 비롯한 실내 장식을 담당하기도 했다.

 

말년에 아내와 헤어지고, 성장한 자식들이 뿔뿔이 흩어진 데다 병으로 몸이 쇠약해진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누워서 지냈다. 그럼에도 그의 작품들은 밝고 평화로우며 따뜻한 색으로 가득 찼으며, 종이 오리기 기법과 같은 대담한 기법을 고안하는 등 창조력 역시 더욱 발전했다.

 

마티스는 1954113일 니스의 집에서 평화롭게 숨을 거두었다. 죽을 무렵 록펠러 가의 유니온 처치의 장미창을 디자인했는데, 죽는 순간까지 디자인을 수정했다고 한다.

< 앙리 마티스  출처: 다음백과- ‘미술사를 움직인 100김정은 청아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