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이들의 미래 - 코르뷔지에 Le Corbusier
2017.3.26.일까지 - 예술의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
우리 아이들이 무엇을 먹고 살까? 건축가는 어떨까? 좋은 일자리 창출! 그 일자리는 아이들 스스로 개척해내는 ‘創造(창조)’라는 개념에서 찾아야하지 않을까? 이 思惟(사유)의 軌跡(궤적)을 예술의전당 코르뷔제의 전시회에서 더듬어보자...다행히 그 전시회는 3월26일까지이니 한 번 더 가보려 한다. 나! 그리고 나의 아이들이 못 이룬 것을 그의 아이들이 꿈꾸어볼 수 있지 않을까?
7개 나라에 17곳 시멘트 건물을 설계했고 당대에 유네스코에 등재된 그의 성장과정은?
1. 1887년 스위스에서 태어나 13세에 초등학교 졸업
2. 아버지의 직업이었던 시계문자판 에나멜 세공을 배우기 위해 라쇼드퐁의 에콜데자르데코라티프(장식 미술학교)에 입학.
3. 이 학교에서 샤를 레플라트니 선생님에게서 미술사, 소묘, 아르 누보의 자연주의 미학을 배움. 3년의 교육과정을 마친 뒤 샤를 선생님은 건축가의 길로 인도하며 그 동네 건축계획 실무를 맡게해 줌.
4. 1907~11년에 중부 유럽과 지중해를 두루 여행하면서 중요한 3가지 건축요소를 발견함. 가) 토스카나 지방의 갈루초에 있는 에마 수도원을 둘러보고 ‘거대한 집단공간’과 '개별적인 단위생활공간' 사이의 뚜렷한 차이를 깨달았고,
나) 이탈리아 베네토 지방에 있는 안드레아 팔라디오의 16세기 후기 르네상스 건축과 그리스의 고대 유적에서는 고전적인 비례를 발견함.
다) 지중해와 발칸 반도의 민중건축을 통해 기하학적 형태를 발견했으며 빛의 처리와 건축적 배경으로서 조경(造景)을 이용하는 방법을 배움....
1-2)번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가업을 이으려 3년제 전문학교(실업계고등학교?)에서 스승을 만나 건축가의 길을 걸었다는 것은 얼핏 보면 우리와 다를 것이 없지만 3)번을 자세히 보면 미술사와 素描(소묘)를 배우고 갓 20을 전후해서 현장에 뛰어든 것이다. 또 4)에서 4년간 이탈리아 그리스와 발칸반도를 여행했다는 점이다.
우리 젊은이들과 비교해보면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3년간 중고등과정을 거쳐 바로 현장에 뛰어들고 군복무과정이 없이 대학과정은 해외여행으로 대체한 셈이다. 그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 했다. 화가가 되고자 했다. 그 과정이 이 전시회에 잘 드러나 있다. 20세기 서양화의 흐름이 인상주의에서 큐비즘까지 그의 이 전시회에 고스란히 펼쳐져있다고 볼 수 있다. 조각과 회화가 건축이 되고 건축에 회화와 조각과 율동하는 인간을 담고자했던 그의 ‘창조적’생각이 이 전시회에서 엿보인다.
지금 시고쿠[四國]에 理想鄕(이상향)을 일구었다는 안도 다다오가 그를 따라 독학으로 건축가가 되고 또 이 전시회에 그의 건축물을 빚어 따로 전시하고 있다는 것도 그냥 넘길 일은 아니다.
지금 한국은 아파트천국이 되었다. 논 가운데 고층아파트가 서있는 풍경은 세계의 어느 곳에서도 찾아보기 힘들지 않을까? 그 아파트의 거실에서 한 손을 높이 들어 천장에 닿는다면 약 2미터30 쯤 될 것이다. 천정높이 2미터26 즉 226[투 투 식스]를 제안한 사람이 바로 꼬르뷔제라면 그가 좀 더 친근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아니면 롱상의 교회를 떠올리든지?
여덟 살-열 살 부지깽이 머시깽이를 보여주고 싶었는데 여의치 않다. 아무튼 지난1월에는 전시장의 사진을 찍게 했는데 화집을 사왔었고 마침 3월26일까지 한다니 다시 한 번 나들이를 하고자 한다. 우리 아이들의 장래를 꿈꾸어보면서...그의 프로필을 다음백과에서 옮겨둔다. <*>
자화상
집과 마을의 거리 1910년
언덕과 서까래풍경 1916년
183센티 키의 남성이 팔을 들어올린 226
원칙을 지키면 길이 편안하고, 법을 어기면 반드시 불편하다는 생각은
집이나 일상생활이나 마친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그림과 도자기와 집은사람과 더불어 하나라는 생각이 드는...
세계최초의 현대식 아파트
유니테 디바타시옹-프랑스 마르세이유
르 코르뷔지에 Le Corbusier
1887. 10. 6, 스위스 라쇼드퐁 - 1965. 8. 27, 프랑스 카마르탱
국적 스위스/프랑스
현대건축에 이론적 연구의 숨결을 불어넣은 선구자이자 도시 거주자들의 생활환경을 개선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스위스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활동한 그는 라쇼드퐁의 장식 미술학교에서 공부하며 스승 레플라트니에로부터 배웠다. 그의 건축 디자인은 기능주의와 대담하고 조소적인 표현주를 결합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이른바 국제주의 건축의 제1세대로서 수많은 저서를 쓴 인물로도 유명하다. 그는 자신의 건축에서 그 세대 기능주의자들의 열망과 표현주의적인 강렬한 감각을 결합시켰고, 금욕주의와 조소적 형태를 추구하는 자신의 취향을 만족시키는 기법으로서 거친 마감 콘크리트 사용을 연구한 최초의 건축가였다. 50여년 동안 활동하면서 중앙유럽, 인도, 러시아, 미국 등지에 건축물을 세운 그는 탁월한 도시계획가이기도 했다.
어린시절의 교육
그는 산으로 둘러싸인 스위스 쥐라 지방의 한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이 마을은 18세기부터 정밀시계의 세계적인 중심지였다. 이곳의 거친 자연환경과 프로테스탄트의 청교도적인 문화환경은 그의 전생애에 걸쳐 뚜렷한 특징으로 나타나고 있다. 13세 때 초등학교를 마치고 아버지의 직업이었던 시계문자판 에나멜 세공을 배우기 위해 라쇼드퐁의 에콜데자르데코라티프(장식 미술학교)에 입학했다. 이 학교에서 훗날 그가 자신의 유일한 스승이라고 불렀던 샤를 레플라트니에에게서 미술사, 소묘, 아르 누보의 자연주의 미학을 배웠다.
3년의 교육과정을 마친 르 코르뷔지에에게 건축가가 되어야 한다고 갈 길을 정해주고 그 지역 건축계획 실무를 처음으로 맡겼던 사람은 바로 레플라트니에였다.
스승의 충고를 따라 그는 1907~11년에 여러 차례 여행을 떠났고 이 여행은 독학으로 건축을 배운 그에게 교육적으로 큰 영향을 주었다. 이때 중부 유럽과 지중해를 두루 여행하면서 중요한 3가지 건축요소를 발견했다. 토스카나 지방의 갈루초에 있는 에마 수도원을 둘러보고 거대한 집단공간과 그의 주거건물 개념의 기초를 이룬 '개별적인 단위생활공간' 사이의 뚜렷한 차이를 깨달았고, 이탈리아 베네토 지방에 있는 안드레아 팔라디오의 16세기 후기 르네상스 건축과 그리스의 고대 유적에서는 고전적인 비례를 발견했다.
마지막으로 지중해와 발칸 반도의 민중건축을 통해 기하학적 형태를 발견했으며 빛의 처리와 건축적 배경으로서 조경(造景)을 이용하는 방법을 배웠다.
30세 때 파리로 이주했고 1년 뒤 그에게 세련된 현대예술을 소개해 준 화가 겸 디자이너인 아메데 오장팡을 만나면서 자신의 형식을 완성했다. 오장팡은 입체파의 난해한 추상개념을 거부하고, 일상적 사물이 가지는 순수하고 기하학적 형태로 되돌아간 자신의 새로운 회화미학, 즉 순수주의를 가르쳐주었다.
1918년 이들은 순수주의 선언인 〈입체파 이후 Aprés le cubisme〉를 함께 집필하여 출판했다. 1920년에는 시인인 폴 데르메와 함께 비판적 전위예술 평론지 〈에스프리 누보 L'Esprit Nouveau〉를 창간했다. 훌륭한 협력자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예술과 인간애를 지향한 이 잡지는 아돌프 로스와 헨리 반 데 벨데가 이미 표현했던 건축 및 도시계획의 개념들을 제시했고 구조와 상관없는 정교한 장식과 과거의 '양식'에 맞서 싸웠으며, 기능주의를 옹호했다.
오장팡과 손을 잡은 르 코르뷔지에는 화가이자 저술가로서 새로이 발을 내딛었다.
오장팡과 르 코르뷔지에(이때까지도 잔레라는 이름을 썼음)는 필명으로 〈에스프리 누보〉지에 여러 글들을 함께 발표했다. 오장팡은 할머니의 이름인 소니에를 선택했고 잔레에게 아버지쪽 조상 이름인 르 코르뷔지에를 쓰라고 권했다. 르 코르뷔지에가 이 잡지에 쓴 글은 한데 엮어져 〈건축을 향하여 Vers une architecture〉란 책으로 출판되었다. 나중에 〈새로운 건축을 향하여 Toward a New Architecture〉(1923)라고 영어로 번역된 이 책은 구어체로 씌어졌으며 이러한 문체는 오랫동안 논객(論客)으로 활동한 그의 특징이었다.
"주택은 살기 위한 기계이다"와 "구부러진 거리는 당나귀가 다니는 길이지만, 곧게 뻗은 거리는 인간을 위한 도로이다"라는 2가지 말은 그가 남긴 유명한 선언이다. 그의 저술들은 다음 세대 건축가들에게 하나의 성서 같은 역할을 했는데, 거기에 쓰인 사고의 본질적인 방향은 여행과 강연을 통해 생겨난 것으로서 45년간 거의 바뀌지 않았다. 유명한 저서로는 〈도시계획 Urbanisme〉(1925)·〈성당은 언제 흰색이 되었는가 Quand les cathédrales étaient blanches〉(1937)·〈아테네 헌장 La Charte d'Athènes〉(1943)·〈도시계획론 Propos d'urbanisme〉(1946)·〈3개의 인간시설 Les Trois Établissements humains〉(1945)·〈모듈러 Le Modular I〉(1948) 등이 있다.
그에게 〈에스프리 누보〉지는 실무를 시작하기 위한 발판이었다. 1922년에 사촌인 피에르 잔레와 함께 스튜디오를 열어 1940년까지 협력관계를 유지했다. 이 기간은 제2차 세계대전을 기준으로 두드러지게 구분되는 그의 작품의 두 시기 가운데 첫번째 시기에 해당하며 두번째 시기는 1944년부터 1965년 죽을 때까지로 나뉜다.
제1기
1922~40년은 도시계획과 건축설계 계획안이 두드러지게 많이 나온 시기이다.
그의 작품은 항상 완공한 건물은 물론, 실행하지 않은 계획안들도 발표하자마자 곧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1922년 '살롱 도톤'에 사회환경에 대한 자신의 이념을 표현하고, 이 시기 모든 작품의 근본 사상을 담은 2개의 계획안을 출품했다. 이 가운데 하나인 '시트로앙 주택'은 5년 뒤 그가 근대건축의 개념이라 정의했던 5가지 특징을 보여준다.
즉 구조물을 받치기만 하고 건물 아래의 지면을 개방시키는 기둥, 주택에서 필수적이면서도 정원으로 바꿀 수 있는 테라스, 개방된 평면, 장식이 없는 정면, 구조틀과 독립적임을 나타내는 옆으로 긴 창이 모두 사용되었다. 내부는 개방된 스플릿 레벨(split-level:반 층마다 높이를 달리 한 것)의 거실공간과 셀 모양 침실이 전형적인 공간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와 함께 출품한 한 도시의 축소모형은, 무리지어 있는 마천루의 기부(基部)에 있는 정원과 녹색공원 개념을 시대에 앞서 표현하고 있다.
매년 열리는 준(準)공식 전람회였던 '살롱 도톤'에서 시작했던 도시계획 개념을 발전시켜 1925년 파리의 장식미술 전시회 때 '새로운 정신(esprit nouveau)의 선언서'가 될 하나의 건축을 출품했다. 화가 페르낭 레제의 영향으로 내부 벽을 강렬하게 채색한 이 자그마한 복층 주거 안에 자신이 디자인해서 상업적으로 생산된 첫번째 가구들을 전시했다.
사실 이 기간 동안 르 코르뷔지에의 사회적 이념은 2가지 형태로 실현되었다.
하나는 1925~26년 한 실업가의 재정적인 도움으로 이룩한 것으로, 보르도 근처의 페사크에 시트로앙 주택양식으로 40가구를 갖춘 노동자 도시 건설이었다. 그러나 이 주택단지는 지역전통을 경멸하고 관습을 벗어난 색채를 사용했기 때문에 시(市) 당국의 반대를 불러일으켰고 당국은 상수도 공급을 거절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페사크 주거단지에는 6년 동안 아무도 살지 않았으며 르 코르뷔지에는 이 모욕을 잊을 수 없었다.
1927년 그는 미적으로 가치가 높은 기능제품 생산에 관심을 가진 여러 집단의 모임인 '독일공작연맹'이 개최한 국제 박람회에 참가했다. 이 박람회를 위해 슈투트가르트 실험 주거지역인 바이젠호프에 2채의 주택을 지었다.
비록 그는 처음부터 많은 사람들을 위한 건물에 큰 관심을 두고 있었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에는 주로 개인주택을 의뢰했던 특권층 사람들을 위한 건물을 지었다.
그 주택들은 엄격한 기하학적 형태와 장식 없는 정면을 결합하여 기능적 디자인과 절제있는 외관을 갖추고 있었다. 1922년 오장팡을 위해 지은 주택을 비롯해 후에 파리의 르 코르뷔지에 재단(1968) 지부로 쓰인 스위스 수집가 라울 라 로슈 저택(1923), 야수주의와 입체파를 후원한 미국 작가 거트루드 스타인의 형제인 마이클 스타인 저택(1927), 푸르른 시골 풍경 속에 자리잡아 가느다란 콘크리트 기둥 위에 지어진 푸아시의 사부아 저택(1929~30) 등이 있다.
1927년 르 코르뷔지에는 제네바에 새 본부를 세우기 위해 국제연맹이 실시한 설계경기에 참가했다.
단열유리벽을 쓰도록 설계한 그의 계획안은 기능적 분석에 대한 건축가의 재능을 가장 훌륭하게 보여준 한 예이다. 세계에서 처음으로 정치기구를 위한 건물로서 신고전주의적 신전 대신에 엄격한 기능 분석에 걸맞는 구조와 디자인을 한 사무용 건물을 제시했던 것이다. 이 계획안은 미래에 탄생할 국제연합(UN) 관계 모든 건물의 전형이 되었다. 아마 설계경기의 규칙대로 먹을 사용해 그렸다면 1등상을 차지했을 것이다.
페사크에서 좌절을 겪은 그로서는 보수적인 심사원들이 꾸민 음모임이 거의 분명한 이러한 결격조항 때문에 공식적인 건축계에 더욱 실망했다. 그러나 그의 낙선과 함께 떠돈 소문으로 그는 근대적 전위건축가라고 알려지면서 더욱 명성을 얻었다. 제네바 사건에 따른 즉각적 조처로서 무엇보다도 근대 전위건축의 가치를 옹호할 목적으로 1928년 스위스의 라사라즈에서 근대건축국제회의(CIAM)가 창설되었다.
1930년경 이미 이 기구는 도시계획이론을 지향했다. 프랑스 지부장이었던 르 코르뷔지에는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열린 5번의 회의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특히 제4차 회의에서 근대건축의 몇 가지 기본원리를 자세히 기술한 선언서를 채택하는 데 두드러지게 활약했다.
또한 제네바 설계경기에서 얻은 명성 덕택에 남아메리카에 강연차 여행을 떠나 이 경험을 바탕으로 〈건축과 도시계획의 기존 상태에 관한 소고 Précisions sur un état présent de l'architecture et de l'urbanisme〉(1930)를 썼으며 모스크바로도 여행하여 전위적인 구성주의 건축가들을 만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첸트로소유스 빌딩(1929~35) 설계경기에 당선했다.
그밖에 르 코르뷔지에는 이 기간에 2개의 주요건물을 건립했다.
하나는 파리의 구세군회관으로, 개방할 수 없는 유리면으로 인식되었던 벽에 공기조화장치를 설치해 '호흡하는' 유리벽을 시도했다(기술적·재정적으로 실패함). 또 하나는 파리의 '대학도시'에 있는 스위스 학생 기숙사(1931~32)이다. 스위스 학생 기숙사에서는 일반 서비스 영역을 별개의 건물에 지정함으로써 거주영역을 분리하고 이 두 부분을 하나의 계단실로 연결했다.
표면은 대부분 마감하지 않은 채 남겨 두었으며, 육중한 지주는 처음으로 조소적 가치를 표현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르 코르뷔지에의 합리적 기능주의는 표현의 욕구와 균형을 맞추기 시작했다.
1930년대말에는 알제 시 종합계획(1938~42)과 부에노스아이레스 시 종합계획(1938), 리우데자네이루의 교육보건부 청사(1936), 프랑스령 북아프리카에 있는 필리프빌의 무한히 확장할 수 있는 박물관(1938)과 같은 아주 유명한 계획안들을 내놓았다. 또한 당시 이미 명성을 얻은 미국으로도 여행을 다녀왔다(1935).
그가 펼쳤던 다양한 활동은 자신이 선택한 생활양식과 일치했다.
동료 발터 그로피우스 같은 교육자가 아니라 우두머리로서, 그는 혼자 자기 사무실에 파묻혀 일을 했으며, 협력자들은 사무실 밖의 기다란 작업장에서 작업했다. 세계 각지에서 모인 협력자들 중 몇몇은 나중에 유명한 건축가가 되었다. 그는 오후에만 사무실에 나왔다. 1925년 오장팡과 헤어진 후에도 화가로서 활동을 계속했고 오전에는 언제나 집에서 그림을 그렸다. 1930년대 중반까지는 몇 안 되는 훌륭한 평생친구였던 페르낭 레제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전쟁기간
제2차 세계대전과 독일군의 프랑스 점령으로 그는 건축활동과 여행을 중단하고, 그와는 달리 프랑스 레지스탕스에 가담한 피에르 잔레와 20년에 걸친 협력관계를 마무리지었다.
비록 그는 비시에 세워진 임시정부에 협력했다고는 하지만 당시 프랑스에 건설중인 건물은 거의 없었고 그의 유일한 활동이라고는 그림그리기와 글쓰기, 그리고 깊은 사색뿐이었다.
그동안 그는 건축요소들을 인체에 비례하도록 하는 조화로운 치수의 척도인 '모듈' 개념의 첫번째 기초를 정교하게 다듬어 나갔다. 1950년 마침내 이 이론을 완성하고 그때부터 건물들을 '인간적 척도'로 통합시키길 바라면서 모든 건물설계에 이 개념을 적용했다.
전쟁이 끝날 무렵 르 코르뷔지에는 전통건축의 옹호자들이 그에게 퍼붓는 비난을 근거 없는 이야기로 만들어 버렸다. 대중들에게는 건축의 피카소였던 그가 건축을 배우는 학생들에게는 근대성의 상징이 되었던 것이다.
제2기
르 코르뷔지에는 마침내 그의 계획이론들을 프랑스 재건설에 적용할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1945년 생디에 시와 라팔리스로셸 시 계획안을 작성했다. 보주 산맥에 자리잡은 생디에 시 계획안에서는 파괴된 도시의 거주자 3만 명을 기능적인 5개의 마천루에 살게 하자고 제안했다. 이 계획안들은 거부당했지만 곧 전세계로 퍼져 하나의 교리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르 코르뷔지에는 쓰라림을 맛보았으며 더욱이 뉴욕의 국제연합 빌딩을 세우기 위해 설계를 직접 맡는 대신 그 건물 설계를 맡은 건축가들을 심사하는 심사위원으로 지명되자 실망이 더 컸다.
프랑스 정부가 무제한으로 후원해준 덕택에 드디어 그는 대규모 (개인) 주거단지를 건설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마르세유에 사회적 환경에 대한 그의 이상을 실현할 주거단지 건설을 맡았던 것이다.
'위니테 다비타시옹'(unité d'habitation)으로 불리는 마르세유 계획안은 18층으로 된 수직 공동체 건물로 1,800명의 거주자들이 23개 유형의 복층(즉 스플릿 레벨) 아파트에 살도록 설계되었다. 일반 부대시설로는 건물 내부의 두 '거리'에 가게·학교·호텔 등이 있고, 옥상에 탁아소·유치원·체육관·야외극장이 있다.
선반 속의 병들처럼 콘크리트 틀 구조 속에 층층이 집어넣은 개별 '빌라'처럼 느껴지는 이 아파트는 1952년에 완공되었다. 그밖에 프랑스의 낭트와 브리에, 서베를린에도 이같은 아파트가 지어졌다.
그는 또한 〈종교예술지 L'Art Sacré〉의 창간자이자 도미니쿠스 수도회 창시자인 쿠튀리에 신부의 영향을 받아 프랑스에 2개의 종교건물을 지었다. 이 가운데 한층 서정적인 느낌을 주는 롱샹의 노트르담뒤오 예배당(1950~55)은 그의 기능주의의 유명한 원칙을 만족시킨 건물이다.
시각 효과를 노린 벽은 2배나 두껍게 세웠으며 매달려 있는 듯이 보이는 지붕도 실제로는 수많은 기둥으로 받쳐진 것이다. 이보다 야수적이고 금욕적인 작품이 리옹 근처 이뵈쉬르아르브레슬에 있는 생트마리드라투레트 수도원이다. 정방형의 이 건물은 자연 속에 있는 콘크리트 요새를 연상하게 한다. 3층으로 된 유리창 면에 서정적인 효과를 나타내기 위해 먼저 창유리 세트를 '음악적인' 간격으로 배열했다.
그가 프랑스에서 명성을 얻은 것은 1953년과 1962년 파리에서 열린 대규모 작품 전시회를 통해서였다.
국외에서 대규모 건물을 설계하기 시작한 것은 1950년부터이다. 1951년 인도의 펀자브 주 정부는 새 수도인 찬디가르 건설을 위해 르 코르뷔지에를 건축고문으로 지명했다. 생애 처음으로 그는 자신의 도시계획 원리들을 거대도시 규모로 적용할 수 있었다.
전반적으로 지역전통에 구애받지 않고 대법원, 국무부 청사와 의회의사당을 설계했다. 커다란 콘크리트 차양을 친 창문, 마감하지 않은 콘크리트, 조소작품 같은 정면, 급강하하는 지붕선, 기념비적인 경사로 등은 그의 건축의 주요요소였고, 곧바로 전세계에 영향을 끼쳤다. 그밖에 도쿄의 국립서양미술관(1960)과 하버드대학교의 카펜터 시각예술 센터(1964)를 세웠으며, 그가 죽은 뒤 세워진 취리히 박람회관(1964)을 설계했다. 르 코르뷔지에는 뒤늦게 인정받은 사실을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는 고독하고 박해받는 천재상을 더 좋아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생을 마칠 때까지 계속해서 새로운 계획안들, 즉 프랑크푸르트 예술관(1963), 밀라노의 올리베티 컴퓨터 센터(1963), 스트라스부르의 의회의사당(1964), 브라질리아의 프랑스 대사관(1964)을 설계했다. 그는 1965년 수영하다가 갑자기 죽었다.
스스로 자신의 시대에 많은 오해를 받았다고 생각한 르 코르뷔지에의 장례식은 국장(國葬)으로 치러졌고, 1968년에 르 코르뷔지에 재단이 설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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