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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은 정말 태산에 갔을까?..泰山石刻[李斯가 태산에 새긴 글]....

양효성 2016. 7. 4. 08:42

      진시황은 정말 태산에 갔을까?...

                    泰山石刻[李斯가 태산에 새긴 글]...


태산의 정상에 진시황이 봉선의식을 치렀다는 당시의 기록이 남아있다면 그 사실은 믿어야하지 않을까? 세칭 이사비[李斯碑]로 불리는 비석을 세웠던 자리는 진시황이 봉선의식의 하늘 제사를 지냈다는 옥황정 아래에 있다. 비석은 迂餘曲折 끝에 시내의 岱廟(대묘)로 옮겨졌지만 ‘비석을 세웠던 자리’에는 표지석과 모형이 세워져있다.


李斯石刻 : 이 2천년이 넘는 비석이 오늘에 전해지기까지는 이야기가 많을 수밖에 없다. 송나라의 眞宗(진종)이 태산에서 封禪(봉선)을 행할 때 兗州(연주)태수가 40자를 탁본했고 이어 劉跂가 두 차례에 걸쳐 탁본하여 ‘秦篆譜’에 올렸는데 그때에는 146字를 읽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歐陽修의 ‘集古錄’, 趙明誠의 ‘金石錄’에도 탁본은 수록 되었는데 明나라 嘉靖(가정)연간에 훼손되어 겨우 29자만 알아볼 수 있게 되어 도교사원인 碧霞祠(벽하사)로 옮겨 보존하게 되었다.

淸나라 乾隆(건륭)5년 1740년에 碧霞祠(벽하사)의 화재로 실종된 비석을 嘉慶20(1815년)에 되찾았을 때는 이미 두 토막으로 동강나있었지만 다시 대관봉 아래의 동악묘 讀碑亭(독비정)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道光12년(1832)에 이 동악묘가 무너지면서 시내의 대묘로 옮겨졌는데 光緖16년(1890)에 또 도난사건이 일어났지만 10일 만에 城北 다리 밑에서 되찾아 1928年 이래 지금의 東御座 앞뜰의 유리상자 안에 보존되고 있지만 읽을 수 있는 글자는 몇 자에 불과하고 당연히 문맥도 걷잡을 수 없다. 유리창에 어른거리는 글자는 ‘...臣去疾....臣請...矣臣...’...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다.


秦篆石刻 : 그렇다면 西安의 병마용으로 이름난 그 진시황은 정말로 태산에 왔을까? 다행히 司馬遷의 史記(사기)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姓은 嬴(영), 이름은 政(정)인 秦王이 戰國7雄의 覇者가 된 뒤 三皇五帝를 아울러 始皇帝라 일컬은 것은 재위 26만인 그의 나이 39세 때(BC221)였다.

이듬해인 27년(BC 220)에 진시황의 업적으로 불려지는 ‘車同軌。書同文字’ 그대로 치도(馳道)를 수축했다. 동서와 남북을 가로지른 이 도로는 폭이 50步[1보1.35m]로 60m내외에 3丈[1장2.25m]마다 가로수를 심고 驛마다 말을 비치하였으니 그 규모를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다.

이 길을 따라 진시황은 지금의 西安에서 동해에 이르러 7개의 비석을 남기는데 봉선의 제례를 행한 곳이 바로 태산이요 그 기록이 태산각석이다.

BC219년(秦始皇28)에 孟子의 고향인 추현 부근의 嶧山(역산), 泰山(태산) 그리고 칭다오(靑島)의 위성도시인 膠南市의 瑯琊臺(낭야대)각석,

BC218년(秦始皇29) 옌타이(烟台)의 之罘(지부), 之罘東觀(지부동관)각석

BC215년(秦始皇32) 진황도의 갈석(碣石),

BC210년(秦始皇37) 절강 紹興의 회계(會稽)각석

그러나 이 비석들은 모두 망실(亡失)되고 겨우 태산각석의 9字와 낭야대의 殘石[중국역사박물관 소장]만이 남아있을 뿐이며 지금 남아있는 것은 모두 탁본이거나 탁본 등을 복각(覆刻)한 것이다. 다만 이 지명들은 지금의 지도에도 모두 남아 있으며 史記를 통해 그 내용을 더듬어 볼 수 있다.


泰山封禪 : 다시 태산 각석으로 돌아가 보자...

진시황본기28년 : 진시황이 동쪽으로 군현을 순행하여 鄒의 嶧山(역산)에 올라 비석을 세웠다. 魯(노) 땅의 유생들과 의론하여 비석에 진(秦)의 공덕을 노래하는 내용을 새겼으며, 봉선(封禪)과 여러 산천에 대한 망제(望祭)의 일을 논의했다. 그리고는 마침내 태산(泰山)에 올라서 비석을 세우고, 土壇(토단)을 쌓아서 하늘에 제사[封(봉)] 지냈다. 제사를 마치고 산을 내려오던 중, 갑자기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려 나무 아래서 잠시 쉬었는데, 이 일로 인해서 그 나무를 오대부(五大夫)로 봉했다. 이어 양보산(梁父山)에서 땅에 제사[禪(선)] 지내고, 비석을 세워서 글을 새겼는데 그 비문은 대략 다음과 같다.

“황제께서 제위에 오르시어 밝은 법도를 창제하시니 신하들은 몸을 닦고 언행을 삼갔다. 26년에 처음으로 천하를 통일하시니 모든 제후들이 복종하여 인사를 드렸다. 황제께서 친히 먼 지방의 백성들을 찾아 어루만지며 이 태산에 올라 동쪽 끝을 두루 살피셨다. 수행한 신하들이 대업의 근원을 돌이키며 황제의 공덕을 찬송한다. 길을 열어 산업이 일어나고 모든 제도가 정비되었다. 대의(大義)가 밝게 드러나 후세에 이어 길이 순조롭게 이어지리라. 황제께서 친히 정사를 베푸시어 천하를 평정하고 다스림에 게을리 하지 않으시도다. 일찍 일어나시고 늦게 주무시면서 백성들을 위해 장구(長久)한 이익을 세우시고 백성들에 대한 가르침과 깨우침에 전념하셨도다. 경전(經典)을 두루 가르치시니 온 나라가 모두 안정되고 백성들은 모두 황제의 성스러운 뜻을 받들도다. 귀천을 분명하게 하고 남녀가 예의를 따르며 스스로의 직분을 삼가 지키도다. 안과 바깥이 밝게 가려지고 깨끗하지 않음이 없으니 후세에까지 덕이 미쳐 가르침이 무궁하리라. 황제의 뜻을 받들어 엄한 가르침을 길이 계승할지어다.”

그리고 발해(勃海)를 끼고 동쪽으로 향해 황현(黃縣), 추현(腄縣)을 지나 성산(成山)에 오르고 지부산(之罘山 : 現 옌타이市)에 올라, 비석을 세우고 진(秦)의 공덕을 노래한 후 떠났다. 진시황이 남쪽으로 낭야산(琅邪山 : 現 칭다오市 부근)에 올라서 매우 기뻐하며 석 달을 머물렀다. 이때 백성 3만 호를 낭야산 아래로 이주시키고 그들에게 12년간의 부세와 요역을 면제시켜 주었다. 낭야대(琅邪臺)를 지어 비석을 세우고 비문을 새겨서 진의 공덕을 노래하면서 자기의 의기양양한 심정을 나타내었다.

二十八年,始皇東行郡縣,上鄒嶧山。立石,與魯諸儒生議,刻石頌秦德,議封禪望祭山川之事。乃遂上泰山,立石,封,祠祀。下,風雨暴至,休於樹下,因封其樹為五大夫。禪梁父。刻所立石,其辭曰:

皇帝臨位,作制明法,臣下脩飭。二十有六年,初并天下,罔不賓服。親巡遠方黎民,登茲泰山,周覽東極。從臣思迹,本原事業,祗誦功德。治道運行,諸產得宜,皆有法式。大義休明,垂于後世,順承勿革。皇帝躬聖,既平天下,不懈於治。夙興夜寐,建設長利,專隆教誨。訓經宣達,遠近畢理,咸承聖志。貴賤分明,男女禮順,慎遵職事。昭隔內外,靡不清淨,施于後嗣。化及無窮,遵奉遺詔,永承重戒。

於是乃並勃海以東,過黃、腄,窮成山,登之罘,立石頌秦德焉而去。南登琅邪,大樂之,留三月。乃徙黔首三萬戶琅邪臺下,復十二歲。作琅邪臺,立石刻,頌秦德,明得意。

***이 기록을 통해 산동성에서의 진시황의 행적과 내용을 살펴볼 수 있었다. 그리고 비석에 남은 글자를 더듬어 보기 위해 다시 史記로 돌아가 보자. 진시황은 BC210년 회계산에 각석을 남긴 뒤 평원진(平原津 : 現 산동성 평원현 서남 황하 나루터)에서 병이 났다. 그리고 7월 丙寅日에 사구평대(沙丘平臺 : 現 하북성 평향(平鄕) 돌연 숨을 거두었다. 그리고 이어 9월에 시황을 酈山(여산)에 안장했다.

二世皇帝 胡亥添刻 :

BC209년 嬴胡亥(BC229-BC207) 秦의 제32대 왕- 제2대 황제원년

秦 호해 2세 황제는 조고와 의논해 이렇게 말했다.

“짐이 나이가 어리고 이제 막 즉위한 터이라 백성들이 미처 따르지를 아니하는구려. 선제(先帝)께서는 군현(郡縣)을 순무함으로써 국력의 강대함을 과시해 위엄으로 온 천하 사람들을 복종시켰는데, 이제 짐이 한가롭게 지내면서 순무하지 않는다면 약하게 보여서 천하를 통치할 도리가 없을 것이오.”

봄철에 2세 황제는 동쪽 지방의 군현을 순무하니, 이사(李斯)가 수행했다. 갈석산(碣石山)에 이른 다음, 바다를 끼고 남쪽으로 행차해 회계산(會稽山)에 도착해, 시황제가 건립한 비석에 모두 글자를 새기고, 비석의 옆면에는 수행한 신하들의 이름을 새겨 넣어 선제의 업적과 성덕(盛德)을 밝혀놓았다.

2세 황제가 말하기를 “금석에 새겨진 것은 모두 시황께서 남기신 업적이오.

이제 ‘황제’라는 칭호를 그대로 이어받아 사용하면서 금석에 새긴 글귀에 ‘시황제’라고 칭하지 않는다면, 오랜 세월이 흐른 후 황위(皇位)를 계승한 후대의 황제가 한 일처럼 보여서 시황제의 업적과 성덕을 밝힐 수가 없을 것이오.”라고 하니, 승상(丞相) 이사, 풍거질(馮去疾), 어사대부(御史大夫) 덕(德)이 죽음을 무릅쓰고 아뢰기를, “신 등이 황제의 조서를 자세히 이 비석에 새겨서 그 연유를 명백히 밝히게 해주십시오. 신 등은 황공한 마음으로 주청하옵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2세 황제는 “그렇게 하시오.”라고 재가했다. 그리고는 요동(遼東)으로 갔다가 돌아왔다. ....

二世與趙高謀曰:「朕年少,初即位,黔首未集附。先帝巡行郡縣,以示彊,威服海內。今晏然不巡行,即見弱,毋以臣畜天下。」春,二世東行郡縣,李斯從。到碣石,並海,南至會稽,而盡刻始皇所立刻石石旁著大臣從者名,以章先帝成功盛德焉

皇帝曰:「金石刻盡始皇帝所為也。今襲號而金石刻辭不稱始皇帝,其於久遠也如後嗣為之者,不稱成功盛德。」丞相臣斯、臣去疾、御史大夫臣德昧死言:「臣請具刻詔書刻石,因明白矣。臣昧死請。」制曰:「可。」

遂至遼東而還。....

**요컨대 ‘비석의 황제는 시황제’가 되고 ‘호해는 황제’가 된 것인데, 二世 황제가 서울인 함양으로 돌아 온 것은 그해 4월이었다. ‘...臣去疾...臣請...矣臣...’등의 문맥이 안 통하는 앞뒤의 글자는 이렇게 史記를 통해 추리해볼 수 있고 司馬遷은 이곳을 답사하고 史記를 썼을 것이다. 우리 서해안에서 바라보이는 중국의 동해변에서 봉선의 의식을 치르고 불로초를 구하려 서성거린 진시황의 모습을 이사의 비석을 통해 상상해본다.

진시황은 천하를 36개 군으로 나누고 군마다 수(守), 위(尉), 감(監)을 두었다. 민(民)을 검수(黔首)로 바꾸어 부르게 하고 전국에 큰 잔치를 베풀었다. 천하의 병기를 거두어 함양에 모은 다음 녹여서 무게 1천 석의 종거와 금인(鍾鐻金人) 12개를 만들어 궁정에 배치했다. 법과 도량형, 수레바퀴의 폭을 통일하고 문자도 통일했다. 영토는 동으로 동해에 이르러 조선(朝鮮)과 이웃하고, 서로 임조(臨洮), 강중(羌中)에까지, 남으로 북향호(北嚮戶)에까지, 북쪽으로 황하를 의지하여 요새를 쌓아 음산(陰山)을 넘어 요동(遼東)에까지 이르렀다. 전국의 부호 12만 호를 함양으로 이주시켰다.

分天下以為三十六郡,中、長沙凡三十五,與內史為三十六郡。郡置守、尉、監。更名民曰「黔首」。大酺。收天下兵,聚之咸陽,銷以為鍾鐻,金人十二,重各千石,置廷宮中。一法度衡石丈尺。車同軌。書同文字。地東至海暨朝鮮,西至臨洮、羌中,南至北嚮戶,北據河為塞,並陰山至遼東。徙天下豪富於咸陽十二萬戶。

秦始皇은 泰山에 왔을까? ‘泰山 景觀全覽 2100景(李傳王-張用衡)’에는 진시황과 함께 周代帝王과 漢武帝의 登頂路를 표시해 두었고 세계문화유산이 된 2100곳의 石刻을 수록해 두었다. 진시황은 태산에 올랐고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낸 것은 史實이요 事實이라고 믿어진다. <*>


태산 李斯의 석각이 있던 자리의 모각


유네스코 기록-자연 유산에 동시 등재된 태산


케이블카로...


또는 7700계단을 걸어서 철탑이 보이는 정상까지...


오르고 또 으르면 몯 오를 리 없건마는...


오른쪽 석비가 1545미터가 진시황이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옥황정...


'옥황의 정상에서 우주를 우러른다...'


중국화폐 五元에 나오는 五嶽獨尊...그 직선의 위쪽... 파랑 파라솔 왼쪽에 이사의 碑가 있다.


진시황 이전에 이곳에 올랐다는 孔子의 바위...


래산각석을 해석한 글


저 아래...北天門...玉泉寺를 거쳐 濟南에 이르는 이 등산로가 진시황의 등정로로 알려져있다.


이사비 모각



누군가 탁본을 한듯 '臣德','明白'등의 글자가 보인다.


명대에 비석을 보관한 도교사원 벽하사와

오른쪽 대관봉의 당 현종 금색 석각 그 아래에 청대에 이 비가 머물렀던 동악묘가 있었다.


공자가 '천하가 작게 보인다 '고 했다는 ...


이 마을에 500만 인구가 산다면 좀 믿어지지 않는데...손에 잡힐듯 태산의 정상이 보인다.

공묘와 자금성과 함께 중국의 삼대궁전으로 불리는 대묘는 시의 중심에 있다.  



대묘의 북문


안내도의 중심부 오른쪽 건물 '東御座(동어좌)'정원에 원석이 있다.



대묘의 宋天貺殿





왼쪽 기둥 뒤에 이사의 석비가 보인다.


이사의 석비...


                                     ‘...臣去疾...臣請...矣臣...’ 등의 글자가 보인다



뒷면은 심히 마모되어 판독불가...


청대에 탁본으로 다시 복각한 비석의 탁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