淸泠浦를 지나며 [晩秋斷想]
晩秋라는 영화가 있었지...K의 삼촌인 김지헌의 시나리오로...
立冬과 맞물리는 가는 가을에게 이별편지를 쓰고 싶어지는 것은 人之常情이지...
그보다는 겨울이 오기 전에 얼굴을 마주할 수 있다면 기쁨 두 배!
아침 7시에 아침 해는 안개를 덮고 늦잠을 자고 있었지-London fog 문자 그대로 視界제로- 그런데 자동차바퀴는 앞으로 굴러가고- 남한강의 그 이름난 안개속으로 ... 남안성 IC- 충주분기점 그리고 제천을 지나 청령포로...
流配地냐? 處刑場이냐? : 제천을 지나며 아침 해는 기지개를 켜고 있었지...청령포를 에워싼 西江에는 물안개도 치맛자락을 걷어 올리고 ... 나룻배에서 우리는 만났지- 몇 해 전만해도 줄배가 있었는데...
그 배로 여흘을 건너던 端宗의 心情은 어떠했을까? ‘저 푸른 물결 외치는 거센 바다로 떠나는 배....날 바닷가에 홀 남겨두고 기어이 가고야 마느냐...터져 나오라 애슬픔 물결 위로 恨 된 바다’ 나는 그 애절한 가락을 잊을 수 없지...건너 뛸 만큼 가까운 그 거리는 公無渡河歌의 그 恨된 이승과 저승의 거리...하늘과 마주 닿은 바다보다도 먼 거리가 아니겠는가? 宿命을 뜻하는 라틴어 'Fatum'에서 유래했다는 파두의 ‘검은 돛배’ - ‘당신이 탄 검은 돛배는 밝은 불빛 속에서 너울거리고 ...당신의 지친 두 팔로 나에게 손짓하는 것을 보았어요...바닷가 노파들은 당신이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죠‘
많은 사람들이 문화해설사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지만 내 귀엔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어! 5百年前의 흔적은 아무 것도 없었어...600살이라는 觀音松 말고는 소나무도 이미 쓰러져 다시 솟아난 것이고 오직 금표비 하나! 그마저 1726 영조2년에 세운 것이었지...或者는 ‘신분은 魯山君 숙소는 御所[임금신분이라면 行宮이었을 테고...]’여서 백성의 출입을 禁하는 標識라지만, ‘圍籬安置’ - 그 한마디면 족하지-
홍수 때문에 영월의 客舍로 移送했다지만, 이곳은 초하루와 보름 ‘국가에 대한 맹세’를 하며 휴무를 하던 그리고 공무원이 머물던 숙소로 禮賓의 장소였지, 安家(?)는 아니었거든. 오히려 管理(?)차원 아니었겠어! 청령포 노산대에서 바라보면 千仞斷崖- 오히려 빠삐용이나 알카트레즈처럼 탈출에 용이한 장소일수도 있지...
아무튼 1453년 단종 원년에 癸酉靖難이 일어나고 首陽大君은 스스로 領議政府事로서 국정을 총괄하고, 兼判吏兵曹事를 맡아 병권을 장악했지. 1455년에는 왕위에 올랐는데 단종은 살아있으니 위아래는 바뀌었지만 당연히 上王이 되고 이듬해 死六臣의 옥사가 벌어지며 上王은 魯山君이 되어 청령포로 먼 길을 떠나게 되었지...두 달 만에 큰물이 지고 이 수상한 洪水[?]로 청령포를 떠나 영월 객사로 거처를 옮겼는데 이번에는 세종의 여섯째 아들이자 세조의 넷째 동생인, 그러니까 당연히 단종의 숙부인 금성대군이 순흥부에서 단종복위를 계획하다가 사약을 받는 일이 일어났지.
企劃殺人 : 어떤 사람은 역사에서 敎訓을 얻는다고 하고 어떤 이는 歷史는 歷史다. 잘못된 것에서도 후세는 배울 것이 있다. 또는 역사는 反復된다는 말들을 하지. 역사에서 교훈을 얻는다는 말이 잘못 되면 성공한 쿠테타는 쿠테타가 아니라는 역사적 사례가 앞장서서 免罪符를 주게 되는 것은 아닐까? 癸酉靖難의 과정에 또 왕자의 난에 또 지나 12월의 어느 날을 연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은 어떤 까닭일까? 불을 지르고 그 불을 끄고 시간을 끌며 잔불을 방치하다 마지막으로 흙을 덮는...대략 2년쯤 시간을 두고... 計劃- 企劃 모두 좋은 말인데 陰謀라는 [-]의미가 덧붙여지면 암울한 정서로 바뀐다. 春秋이후 2천년이 지난 단종의 시절에 권력의 음모야말로 진화할 만큼 진화하지 않았을까? 결국 노산군은 백성들과 단절된 內陸의 섬에서 賜藥 즉 死藥을 받았다. ‘命魯山君死’라는 御書를 받고 어떤 심정이었을까? 아마-할아버지의 아들들...한 사람은 生父요- 또 한 사람은 자신과 친 동생에게 사약을 내리고...그 마지막 한 모금에서 오히려 권력에 눈이 먼 血肉 三寸의 장래를 可憐하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端宗의 流配길 : 장릉은 청령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았다. 그 역사관 지하에는 단종이 서울을 떠나 이곳에 오는 行程이 옛 지도에 덮여있다. 창덕궁에서 나와 성동구 화양정에서 광나루로 건너가 남한강을 따라 이포나루를 지나...그런데 요즘 이 길을 찾아 걷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모양새다. 다음 브로그에 ‘희망영월김삿갓’-‘여행블로거 기자단’ 등등 ... 특히 희망영월김삿갓의 단종유배길은 한 번 살펴 보기바라네!! 나도 그 길을 한번 걸어보고 싶으니까... 우선 몇 줄 발췌해 본다. 친구들이 버스로 3시간 달려온 길을 端宗은 폭염속에 7晝夜를 거룻배로 또 말잔등에서 보냈던 것이다.
...단종이 17살이던 1457년 음력 6월 22일 한여름 따가운 햇살을 받으면서 첨지중추부사(僉智中樞府事) 어득해(魚得海)와 군자정 (軍資正) 김자행, 판내시부사(判內侍府事) 홍득경 등이 군졸 50명과 함께 유배행렬을 호위하여 창덕궁 돈화문을 출발한지 7일 만인 6월 28일에 청령포에 도착하였다.
...端宗이 서울부터 영월까지 오는길에 지나왔던 몇곳에는 관련된 地名이 남아있는데....경기도 하남시에 있는 '배알미리'는 배를 타고 귀양가는 단종의 뒷모습을 백성들이 바라보며 배의 꼬리에 대고 절을 하였던 곳.
경기도 여주군 대신면 상구리 두둔마을 '어수정'은 단종이 물을 마신 우물.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단강리 끝정자[단정] 마을에는 수령 600년의 느티나무가 있는데 단종이 물을 마시고 이 나무 그늘에서 쉬었다고 그 이름이 단정나무인데 강원나무 제2호로 지정되었다.
영월군 주천면 신일리의 물미[수미] 마을은 단종이 물을 마신 곳.
영월군 서면 신천리의 '군등치'는 단종임금이 넘은 고개이며,
같은 신천리의 '우래실[명라곡]'은 백성들이 나와서 단종을 보며 통곡한 곳, 혹은 단종이 타고 가던 말이 운 곳이다.
또한 같은 신천리의 방울재(방울 고개)는 단종의 말방울이 떨어진 곳이다.
서면 광전리의 '배일치'는 단종이 지는 해를 향하여 절을 한 곳이다.
우리는 왜 永生을 말하고 復活을 말하는가? 그의 인생 역정이 어떠하든 그가 이름이 있든 없든 천 년 전에도 오백년 전에도 또 오백년 뒤에도 어느 누군가에 또 어느 구석에 어떻게든 永遠한 탓이 아니겠는가? 時空이 존재하지 않는 우주에 質量不變의 상태로- 다만 善이든 惡이든 그 형태를 千變萬化할 뿐!<*>
일반인 출입금지- 영조2년에 단종이 머물렀던 곳으로 이런 금표를 세웠는지 아니면...당시에도 그랬는지?
당시에도 그랬다는 이야기에 믿음이 가지만...오직 역사적 진적은 2백년 된 이 비석뿐!
노산대에서 서강을 굽어보면 낭떠러지...
노산대에서 서울을 바라보는 참배객들...
이 소나무만이 홍수를 이겨내고 600년을 살았다는데...
지도에는 단종의 유배길이 창덕궁-화양정-광나루...뱃길로 이어지고...
원주와 군등치를 거쳐...
...청령포에 이른다.<이 길을 다음블로그 '희망영월김삿갓'에서 자세히 볼 수 있다.>
단종을 지키는 문인석과
장릉
정자각
풍수개념도<장릉역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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