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

張春植[장춘식]과 間島文學 - 음성양쇠[민족출판사:북경:1996년]

양효성 2011. 1. 15. 00:38

            張春植[장춘식]과 間島文學

                            음성양쇠[민족출판사:북경:1996년]

 

張春植[장춘식]의 소설을 읽다보면 ‘間島文學’이라는 한 공간이 떠오른다.

그의 이력에는 1959년 그러니까 419 한 해 전에 윤동주로 이름난 용정시 개산툰진에서 태어났다는 기록이 있다.

 

문화의 유행이란 잠시도 가만히 정지되어 있는 것이 아니어서 어느 일방이거나 아니면 쌍방향 교류이거나 상호영향을 끼치기 마련이다. 반면 어떤 유행이 엄습한다고 해도 일시에 그 뿌리를 흔들지 못하는 질긴[鞏固] 전통이랄까? 또는 특색도 유지되기 마련이다. 전자가 특수한 계층에 의해 주도된다면 후자는 아무래도 민중이라 부르는 서민의식으로 支撑된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작가가 어느 부분에 관심을 지속하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 變貌란 이 양자의 접촉에서 서서히 일어나는 것이 보통이다.

 

요즘 한국에서 외세와 전통사이에 벌어지는 극심한 문화변동은 우려스러운 면이 없지 않다. 한국문학이 외세의 영향을 받지 않고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동굴에서 한 100년쯤 冬眠하다가 깨어난다면 어떤 모습일까? 굳이 이런 망상을 하지 않더라도 신고전주의랄까? 전통의 모색이랄까? 예술의 영원불멸의 가치를 놓고 씨름한 작가들은 끊임이 없었다.

 

우리의 근현대문학이 기껏 100년 남짓인데 한민족에 의해 한국어로 씌워지는 글들에는 적잖은 변화가 있었다. 남과 북이 갈리고 중국과의 교류가 끊어지고 일본의 殘滓를 濾過하는 필터로 西歐의 思潮를 도구로 삼고 등등...

보통사람들은 변동기에 일본에 그대로 남아서 그 풍토에서 작품을 계속하는 사람들 또 분단의 저편 간도에 남고 태어나고 자란 작가들... 그런 환경의 차이가 작품에 어떻게 반영되며 또 변하지 않는 가치는 무엇인가를 쉽게 알 수 없다.

 

好奇心이란 따분한 상황과 다른 것을 기대할 때 發動한다. 여기에서 사라진 것이 거기 남아있을 것이라는 생각 또한 이런 의미에서는 好奇心이다. ‘나는 변하고 남은 그대로여 한다. 또는 내 불행 대신 너는 행복할 것이다!’이런 가설이 穩當한 것인가?

 

지난 100년 대부분의 사람들은 중국과 그리고 간도와 단절되어 살았다. 1894년의 갑오농민운동과 淸日의 개입에 이은 淸日戰爭에서 일본에 밀리며 그들은 우리와 멀어졌다. 간도의 이주와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새로운 나라의 건설 그리고 1992년의 국교. 이 100년은 대략 외부환경으로 볼 때 간도문학은 네 시기쯤으로 나누어지지 않을까?

 

‘... 저물어가는 오후 그들은 나란히 거닐면서 산골짜기 저 멀리를 바라본다. 어디서 모여왔는지 잠자리들이 해지는 산마루를 바라고 금빛 날개를 하느작거리며 춤을 추고 있다. 산기슭의 콩밭에서는 찌르레기가 날아오르며 저녁의 노래를 부른다. 찌르륵- 찌르륵찌륵...<찌르레기야 찌르레기야 12쪽>’

 

이 한 줄의 그림에서 북간도의 시골 풍경이 아름답게 살아온다. 그러니 이야기가 진행 되면서 이 풍경을 바라보는 젊은 연인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중국의 개혁개방과 계층의 차이가 빚어지는 남녀의 허상과 이별로 막음하기 때문에... 간도문학이라는 잣대로는 3세대쯤의 이야기다.

 

반도에서 두만강을 건너는 이야기가 1세대라면 일제의 유랑문학이 2세대쯤 되고 문혁과 개방으로 이어지는 3세대는 건국이후에 태어난 1세대의 손자쯤 되는 연령이 될 것이다. 그들이 어떻게 중국국적으로 한국의 언어와 풍속을 잇고 또 변모하는가 하는 것은 문화의 이주현상을 추적하는 한 모델이 될 수 도 있다.

 

장춘식의 음성양쇠[陰盛陽衰-1991년 작으로 단편집의 제목을 삼았다]에는 80년대의 단편 13편과 90년대의 4편 등 모두 17편이 실려 있다. 일제를 배경으로 한 계급초월의 사랑과 독립군의 전설을 그린 ‘봉녀’를 제외하면 거의 개방 이후의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이야기의 무대는 용정에서 북경을 오가다가 점점 북경으로 기울어지는 것은 작가의 생활동선과 연관된 것이 아닌가 보인다. 개방이후의 물질만능과 배금주의가 불러오는 가벼운 사회풍조를 작가는 걱정한다.

 

소설은 누가 무어라고 해도 구체적인 이야기다. 그 이야기 - 현실 속에서 문제도 발견하고 해석도 모색하는 것까지 작가의 몫은 아니다. 설령 작가가 그런 것을 요구한다고 해도 우리는 이야기에 몰입하면서 각자의 생각을 다듬어가는 것이 도리가 아닌가?

 

수많은 사람들이 중국에 다녀오고 중국의 문물에 접하지만 조선족들의 내밀한 심리까지는 접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 그런 갈증을 풀 수 있고 환영을 거두고 좀 더 현실에 다가설 수 있다. 작가는 두만강을 넘기 전의 구수한 향토어[方言]로 소설을 쓰고 싶다고 한다. 그리고 좀 더 치열하게 오늘의 문제점들을 穿鑿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이 이야기만으로 這間의 사정을 집작하고 남음이 있다. 이 이야기로 우리는 한걸음 더 간도에 다가갈 수 있게 되었다.

 

지금 나로서는 긴 작품 이야기나 작가의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다. 이 책이 한국의 서점에서 판매된다면 얼마나 쉽게 간도에 접근할 수 있을까? 우선은 검색창에서 ‘장춘식의 조선족문학’을 치면 ‘음성양쇠’‘파멸에로의 욕망’에 수록된 몇 작품을 인터넷으로 읽을 수 있다. <*>

 

 

장춘식의 음성양쇠[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