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트리’ 그늘에서 커피를...
낙엽을 태우면서 커피를 마시는 이효석의 에세이는 짙은 晩秋의 情을 전해준다. 때로는 눈 덮인 산마루에서 때로는 벽난로 앞에서 에티오피아 더운 지방에서 영글어 무더위를 쫓는 커피가 유독 찬 곳에서 맛을 더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잠을 쫓아가며 긴 이야기를 나누는 연인들 - 밤을 밝혀 원고를 출판사로 넘겨야 하는 작가들 - 이국땅에서 상담을 벌이는 비지네스맨... 커피는 금융 산업사회로 바뀐 현대사회의 한국인의 일상에 깊숙이 파고들었다.
우리 조상들은 차를 마시며 사랑방에서 燕京에 다녀온 이야기를 나누며 熱河日記를 남기고 거문고를 뜯고 먹을 갈아 詩를 지어 두터운 문집을 남기기도 했다. 또는 강냉이를 삶고 감자를 쪄서 밤을 밝히며 새끼를 꼬고 가마니를 짜고 또는 베틀에서 모시를 짜기도 했다. TV드라마가 없어도 얼마든지 구수한 밤을 보낼 수 있었다. 적어도 그때는 드라마의 주인공이었었다.
도시는 잠시도 쉬지 않고 꿈틀거리는 거대한 괴물을 닮았다. 어디에도 나의 자리는 없다. 빌딩에 가린 달도 이미 나의 달은 아니다. 마담이 보내주는 한 줄기 미소를 기다리며 해바라기 하던 다방도 이제 사라졌다. 넥타이를 맨 또는 스카프를 두른 젊은이들은 ‘Take out!’ 한 잔의 컵을 들고 어딘가 구멍을 찾는 게처럼 빌딩의 그늘로 사라진다.
영화 ‘詩’가 좋다든지 이원순의 ‘아빠와 걷는 길’에 들을 말이 있다든지 새로 녹음된 디스카우의 ‘겨울 나그네’가 나왔다든지 그런 한가한 이야기를 나눌 공간도 시간도 또 친구도 낙엽처럼 메말랐다. 도시도 사람도 바닥을 드러낸 江처럼 쓸쓸하다.
이러저러한 커피 전문점이 생겨나고 똑 같은 간판 똑 같은 메뉴 똑 같은 유리창과 의자를 마련했다. 남들도 들고 다니는 브랜드 일회용 종이컵을 나도 들고 다닌다고 매니어들은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습관이 되어버렸는지도...내가 그 맛을 원했는지- 그 맛이 나를 中毒시켰는지 나는 모른다. ‘00브랜드는 역시 맛이 깊어!’, ‘커피는 역시 00이야!’ 이런 중얼거림이 바이러스처럼 전파되었는지도 모른다.
오랜만에 백병원에 들릴 일이 생겼다. 내가 아니고 병문안을 위해...나는 매일 거기 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반쯤 간병을 해야 했으니까- 백병원과 영락교회의 샛길에서 충무로 쪽으로 그러니까 쌍용빌딩을 마주보고 커피전문점 ‘빈 트리’가 있다. ‘콩 나무’라고 번역해야 하나? ‘커피나무’라고 해야 하나?
S와 나는 Since1960-그러니까 50년 된 친구다. 친구는 아메리칸 커피를 주문한다.
‘에스프레소요?! 너무 독하실 텐데...’
‘리필은 안 될테고- 그냥 주세요! 毒하게...’
‘그럼 대신 뜨거운 물도 한 잔 드릴게요-’
주인아주머니(?)는 상냥하다.
S는 젊은 시절 외국에서 근무했다.
‘이태리 에스프레소는 毒藥이야! 중동에서는 아예 膏藥이고-게다가 물담배하면-’
‘그럼! 이 커피는...’
내가 ‘브랜드brand.’는 무슨 상표이야기냐고 하니까 에스프레소를 제법 잘 마시는 내가 기특한지 브랜드커피를 설명해준다. 아마 여러 가지 커피를 섞어서 볶는 것을 브랜딩blending 한다고 하는 모양이다.
브라질이나 모카라는 이름은 들어보았지만 이것저것 잡곡밥처럼 커피를 섞어서 볶는다는 말은 처음 들었다.
이집에서는 브라질 콜롬비아 에티오피아 코스타리카 등등 다섯 가지 커피를 섞는다는데 세 대륙의 커피가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면 현악오중주string quintet가 되는 것일까?
‘원두는 무슨 말인고? 생콩-날콩-씨콩- 그런 콩하고는 다른 나무에서 달리는 나무콩이거나 커피콩인데 이 콩은 역시 원두라는 한자어로 써야할까 보다.’
原豆coffee는 사전에 커피 열매를 볶아서 빻은 가루를 타서 마시는 커피라고 되어 있는데 즉석에서 ‘콩’을 갈아 뜨거운 물에 타거나 증기로 우려 마시는 법인가? 아무튼 제 자리에서 간다는 그 시간 - 신선함이 문제라는 말쯤으로 들었다.
바쁜 시간들-60이 되어 일을 놓고 한참이나 지나야 겨우 진정이 되고 하늘에 구름이 흘러가는 것이 보인다. 한참 보고 있으면 그 구름이 잠시도 제자리에 제 모습으로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런 말을 한다.
‘구름이란? 참!’
나이가 들면 어린애처럼 짧은 말- 툭툭 끊어진 말을 하게 된다. 그리고 습관처럼 마시던 커피가 그런 것인가 생각해보기도 한다. ‘Out of Africa’ 한 장면을 떠올리면서...
‘커피 빈은 제약이 많지 않아요! 본사 사장님은 커피 연구에 심혈을 쏟으신 분인데...가게마다 개성을 살리게 하고...’
‘이 벽돌집은 100년은 되어 보이는데 전에는 무엇을 하던 건물인가요?’
‘50년 전에도 이 자리에 커피점이 있었는데!?...’
의자는 벽을 따라 놓여 있고 가운데에는 세미나를 해도 좋을 만큼 나란히 마주보고 통나무를 자른 것 같은 긴 테이블이 있다.
- 나는 담배를 피우고 S는 피우지 않는다. S는 술을 즐기고 나는 마시지 못한다. S는 내게 술을 가르친다. 나는 담배를 끊은 S 앞에서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그런 두세시간을 우리는 거뜬히 버틴다. 무슨 이야기를 이 나이에 하는 것일까? Out of Korea’를 생각하면서- <*>
쌍용빌딩앞 빈트리는 동화의 집을 닮았다
이 벽돌집은 세월을 느끼게 한다
아기자기한 주방에는 여러가지 커피들과...
다양한 메뉴들...고구마에 샌드위치...
원두를 담아온 포대에는 -콜롬비아라는 영자가...
세미나를 해도 좋을 통나무 테이블...
주인은 커피를 따르고...
벽돌로 장식한 내부와-
50년 친구-
외로운 커피잔-
브랜딩하는 기계가 입구에 놓여 있고
남산타워는 영락교회에 내리는 눈을 바라보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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