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부흥을 비는 부처 국보 108호 _
서기 673년 계유년에 만든 삼존천불비상(癸酉銘三尊千佛碑像)
승자의 역사에서 백제는 외롭다. 공주에 갈때마다 마음이 어두운 것은 그런 때문인데 무령왕의 능에서 역대의 백제 임금을 그려본다. 박물관의 무령왕릉은 그 임금들 가운데 한 사람에 불과하다. 백제는 옛 고구려 땅 東北三省의 夫餘[지금도 흑룡강성에 簡字로 夫余라는 지명이 있다.]와 일본의 나라지방 등등 너무 크게 그려지기도 하고 익산의 왕궁리 예산의 임존성과 서산의 마애불 등 금강과 충청도를 중심으로 매우 좁게 느껴지기도 한다.
고마 나루에 옮겨진 공주박물관의 2층 구석에는 계유명 삼존천불비상(癸酉銘 三尊千佛碑像, 국보 108호)이 의연한 자태로 놓여있다. 통일신라시대 문무왕 13년(673년)에 제작되었다고 표기되어 있지만, 660년 7월 부여가 함락되고 백제의 백성들은 일부는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 장안으로 끌려가고 일부는 동쪽으로 경주의 도시정비사업에 투입되었다. 값싼 노동력이 얼마나 디자인도시건설에 효율적이었는지는 경주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편 남은 일부는 黑齒常之등이 지금 예당저수지의 임존성에서, 풍왕과 복신 도침 등은 지금 그 위치도 서천군 한산의 건지산성(乾至山城)인지 부안군 위금암산성(位金巖山城)인지 아리송한 주류성에서 흩어지고 말았다. 이런 유적은 부여 중심 반경 100Km내외에서 이루어졌다.
부여 함락 3년 뒤 일본의 원군은 지금의 백마강에 원군을 보냈으나 모두 수장됨으로써 백제는 역사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三國史記에는 670년 倭가 국호를 日本으로 바꿨다고 적고 있다.
이 불상은 부여의 북동쪽 조치원 부근에서 발견되었다. 그리고 癸酉年[서기 673]이라는 글자를 새겨놓았다. 역사야 통일신라시대라고 적겠지만 엄연히 백제인들이 구국의 일념으로 만든 것이다. 승자도 패자의 충절을 오히려 겸허히 기려야하지 않겠는가?
백제의 원혼은 공주박물관의 구석에서 아직도 기도를 그치지 않는다.
측면 어딘가에 명문이 있을텐데...탁본을 곁들여 전시하면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겠다.
조치원에 있다는 서광암 앞 부분은 지운 흔적이...
그리고 통일신라라는 시기가 또렷이 적혀있다.
이 불상의 양쪽에 각 4행씩 새겨진 글은 계유년4월15일(歲在 癸酉年 四月 十五日)에 대사 진모 씨(大舍眞牟氏) 등 250명이 국왕(國王)과 대신(大臣), 칠세부모(七世父母) 등을 위하여 아미타불과 여러 불상들을 만든다는 내용이다. 삼존불 주위로 네 면에 920 불상이 새겨진 것은 그 뜻을 함께 하는 백성들이었을지도 모른다.
명문 판독문
1992년 판 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Ⅱ에는 좀 더 정확한 기사가 있다.
계유년 4월 15일에 향도(香徒)가 석가(釋迦) 및 여러 불보살의 상을 만들었다.
돌에 기록하니 … 이것은 국왕(國王) 대신 및 칠세 부모(七世 父母), 법계의 모든 중생을 위하여 삼가 만든 것이다. 향도 이름은 미차내(彌次乃), 진모씨(眞牟氏) 대사(大舍), 상생(上生) 대사(大舍), □인차(□仁次) 대사(大舍), □선(□宣) 대사(大舍), 찬불(贊不) 소사(小舍), 무사(武使) 소사(小舍), □□□ 소사(小舍), 그리고 □□ 등 250인이다.
이 삼존천불비상은 屋蓋石을 포함한 전체 높이 91cm, 몸체는 71cm, 폭 47.5cm, 본존 높이 38.5cm다. 이 불상은 삼존상(三尊像) 위에 부분적으로 파손된 천개(天蓋)가 덮여 있으며 중아에 삼존불이 양각되어 있다.
김문창이라는 분이 쓴 대전뉴스(http://www.daejeonnews.kr)에는 계유명 삼존천불비상 출토에 얽힌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 부분을 요약하여 옮기면 다음과 같다.
...<前略> 출토 지역이 연기 비암사라고 되어 있었으나, 인터넷과 전문가에게 확인 결과 조치원 서광암으로 고쳐야 한다고 했다. 국립 공주박물관에서 발간한 도록이 잘못 기록됐다는 것. 박물관 역시 이를 인정했다.
그때 문득 30여년 전, 필자가 중학교 1학년 시절 인근 학교인 공주 영명중학교 현백미술 선생이 학생3-4명을 데리고 박물관 관람을 하며 각 유물마다 출토에 대한 얽힌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옆에서 듣던 생각이 났다...
"조치원 근방 어느 초가집 암자에 어머니와 아들이 살고 있었는데, 하루는 시주를 가신 어머니 스님이 폭우가 쏟아져 비를 피해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낙숫물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낙숫물에 땅이 패여 부처님 얼굴이 나타났다"는 것. 어머니 스님은 그 길로 절에 돌아와 아들에게 어느 곳에 가면 부처님이 고생하고 계시니 지게를 지고 가 모셔오라고 했다. 그 아들은 두 말 하지 않고 수십 리의 밤길을 달려 돌부처를 모셔와 좌대를 만들어 마당에 잘 모셔 놨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들은 고고학계 교수 등이 찾아가 확인한 결과, 이 부처상이 범상치 않은 것을 확인하고 보고하여 국보로 지정되어 소장자는 높은 보상을 받았다는 이야기였다.
...이야기는 계속 된다...
출토에 관해 문헌을 찾아보니 61년 당시 골동품상의 말을 듣고 천불비상을 보러 서광암에 갔던 황수용 교수(동행 진태섭교수, 정명호)가 쓴 <충남 연기 석상조사>라는 책 속에 조사 경위가 나와 있다는 것!
황 교수는 61년 7월 29일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 고물상 박물당을 우연히 들렀다가 고물 중개인 이근태씨 외 1인과 대화를 나누다 서광암의 석상 소재를 탐지했단다. 2일 후인 31일 황 교수 등 세 사람이 이 석상을 보고 나서 환희와 만족을 느꼈다고 적고 있다.
서광암은 조치원 내창(서창동1구)이 부락에 있는 초가집 암자로 이인천(당시 75세, 여) 스님과 그의 아들 안승규(당시 54세) 모자 2인이 살고 있었다. 불상의 발견 장소를 추궁하니 51년 3-4월경 동란의 폭격을 받은 조치원 시장 하수도에서 이 석상은 석교로 사용되고 있던 중 이런 사실을 남신도가 전하자 읍내에서 이곳까지 운반하여 ‘5백 나한’이라고 불렀다한다.
이 석상은 1차 조사 후 문교부에서 응급책으로 국보로 假 지정 되었고, 61년 9월 4일 보존위원회에서 정식으로 국보지정이 의결되어 새로운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재정리 되어 국보108호로 지정되었다.
문화재 관리국의 해설은 좀 더 자세하다.
삼존불은 연꽃무늬가 새겨진 반원형의 기단 위에 조각되어 있는데, 4각형의 대좌(臺座)에 앉아 있는 중앙의 본존불을 중심으로 양 옆에 협시보살이 서 있는 모습이다.
본존불은 옷을 양 어깨에 걸쳐 입고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상체가 많이 닳아서 세부 모습을 알아볼 수 없다. 특징적인 것은 불상이 입고 있는 옷이 무릎 아래로 길게 흘러 내려와 대좌까지 덮고 있다는 점이다. 양 옆의 협시보살도 손상이 많아 세부 모습을 살피기는 어렵지만, 무릎 부분에서 옷자락이 X자형으로 교차되고 있어 삼국시대 보살상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불상들의 머리 주위에는 연꽃무늬와 불꽃무늬가 조각된 머리광배가 다른 부분에 비해 파손이 덜 된 상태로 남아 있다.
이 삼존불상 외에도 사각형의 돌 전체에 일정한 크기의 작은 불상들이 규칙적으로 새겨져 있는데, 깨진 부분에 있었을 불상들까지 감안한다면 천불(千佛)을 표현하려고 한 것 같다. 이들 작은 불상들은 모두 머리광배를 지니고 있으며,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다.
이 작품은 삼존불 좌우에 새겨져 있는 글을 통해 볼 때 신라 문무왕 13년( 673)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며, 백제 유민들이 망국의 한과 선조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만든 작품이란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이 비상은 충남 연기지방(燕岐地方)에서 발견된 비상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큰 작품이다.
* 그 서광암에서 서쪽으로 일직선상에 비암사라는 절이 이 절에서도 이와 비슷한 불상이 발견되어 癸酉銘全氏阿彌陀佛三尊石像이라는 이름으로 국보 제106호로 지정되었는데 지금 중앙박물관에 있는지 청주박물관에 있는지 확인하지 못했다. 아마 뜻을 같이한 세력일 것이다. 아니면 불상의 조각가가 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이불상은 높이 43cm, 너비 26.7cm, 옆면 너비 17cm라고 하니 108호보다는 규모가 작아 보인다. 부여를 중심으로 반경 100Km - 한번은 임존성- 한산 모시관 뒤의 건지산성- 비암사와 서광암 등등 그 역사의 현장을 돌아보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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