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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상대에서 이런 저런 생각들[2010晩秋旅行]

양효성 2010. 11. 1. 19:00

 

 

      의상대에서 이런 저런 생각들[晩秋旅行]

 

 

關東八景의 하나인 의상대는 義湘스님과 인연으로 그런 이름이 되었다.

다음 백과에는 의상스님을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華嚴宗의 개조로 644년(선덕여왕 13) 皇福寺에서 승려가 되었다. 661년(문무왕 1) 海路로 唐나라에 가서 智儼의 문하에서 賢首와 더불어 화엄종을 연구하고 671년 귀국했다. 676년(문무왕 16) 왕명에 따라 浮石寺를 짓고 화엄종을 강론, 海東화엄종의 창시자가 되었다. 전국에 10여 개의 화엄종 사찰을 건립, 화엄의 교종을 확립하는 일에 힘썼다. 그의 문하에서 悟眞·知通·表訓·眞定·眞藏·道融·良圓·相源·能仁·義寂 등 ‘義湘十哲’이라 일컫는 10大德의 고승이 배출되었다. 부처도 10대 제자를 거느렸고 예수나 공자도 이 비슷한 제자를 두었었다. 어떻게 보면 자신의 뜻을 이해하는 사람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다는 이야기로 해석할 수도 있다. 거의 1400년 전의 이야기다.

시간이 흐르고 고려에 이르러 숙종으로부터 海東華嚴始祖圓敎國師라는 시호를 받았다. 저서에 《華嚴一勝法界圖》 《白花道場發願文》 《十門看法觀》 《入法界品鈔記》 《小阿彌陀經義記》등이 있는데 華嚴一勝法界圖에는 유명한 이런 구절이 있다.

 

一微塵中合十方

一切塵中亦如是

 

첫 구절의 ‘-合十方’은 절에서 ‘-함시방’으로 읽어 내려온 것 같다. 단정할 수는 없지만 대강 하나의 티끌에는 우주[十方]가 凝縮되어 있고 宇宙도 하나의 먼지[一切塵]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의상대에서 바다를 바라보면 인간은 微物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1036년에 태어나 1101년에 세상을 떠난 북송시대의 東坡居士는 赤壁賦에서

滄海一粟이라는 말을 했다. 지금까지 ‘宇宙에 비하여 人間은 모래알 같은 것’으로 이 말을 받아들였는데 의상스님의 구절을 보면 그 모래알에 우주가 담겨 있다는 뜻이고 동파는 赤壁에서 그 無盡藏의 우주를 胸中에 품는 기개를 은연중에 자랑한 것으로 다시 해석할 수 있다.

 

다시 세월이 흐르고 바다 멀리 영국의 William Blake[1757년 - 1827년]는 이런 절구를 남겼다.

 

To see a world in a grain of sand

And a heaven in a wild flower

 

한줌의 모래[a grain of sand]에서 宇宙[a world]를 본 그는 의상대사의 제자였을까? 華嚴一勝法界圖에는 ‘九世十世互相卽’이라는 구절도 있으니까-

 

 

 

가을 동해는 짙푸르다

 

 

길에서 길을 묻다. 화마를 피한 소나무는 달을 가리키고...

 

 

 

의상대의 아침 - 해는 이미 수평선을 넘어섰다.

 

 

멀리 관음상이 보이고...

 

홍련암이 아침햇살을 받고 있다.

 

 

 

밤을 지샌 고깃배는 돌아오고-

 

 

 

철새는 제 갈길을 간다.<2010.10.29.>

 

 

 

[소실된 낙산사의 구리종] 한편 이 또한 세월이 흘러 낙산사에 동종이 바쳐진 것은 1469년 세조가 세상을 떠나고 睿宗이 자리에 오른 해였다.

 

1968년 12월 19일 보물 제479호로 등록된 이 종은 높이 158cm로 어른 키만 하고 입지름 98cm에 부조된 보살상의 높이 36.8cm였다. 종의 정상부에는 등을 맞댄 용 2마리가 고리[鈕]를 형성하고 어깨[鐘肩]에는 모서리가 없이 정상부에서 둥글게 몸체[鐘身]로 이어지고 있다. 어깨부분에 연판(蓮瓣)을 1줄 둘렀는데 조선 초기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장식적인 형태이다. 종신의 중앙에 굵고 도드라진 가로선을 3줄 둘러 상하 2단으로 크게 나누었는데, 상단에는 네 방향에 큼직한 보살입상을 1구씩 돋을새김했다. 보살상 사이에는 간격이 고르게 범자(梵字)를 4자씩 돋을새김하고, 어깨부분의 연판 문양대 밑에도 16자를 1줄로 배열했다. 보살입상은 합장한 자세이며 둥근 머리광배 안에 화려한 보관(寶冠)이 있고 어깨를 따라 흘러내린 천의(天衣)가 매우 유려한 곡선으로 퍼져내리고 양쪽 발은 각각 연화좌를 밟고 서 있다. 하단에는 종의 입부분[鐘口]에서 약간 올라온 곳에 폭 9.5cm의 문양대를 두어 고사리 모양으로 이어지는 물결무늬를 양각했다. 중앙의 가로선대와 물결무늬대 사이에 '성화 5년 기축'(成化五年己丑)으로 시작되는 긴 명문이 있어 주성연대와 조각장(彫刻匠), 주성장(鑄成匠)에 관한 사항 등을 알 수 있다.

 

그러나 2005년 4월 5일 식목일에 양양 지역에서 발생한 산불로 낙산사가 불에 타며 이 종도 함께 녹아내리고 2005년 7월 7일에 문화재에서 등록이 말소되었다. 우리손으로 문화재를 불에 태운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면 이 종을 절에 보낸 예종은 어떤 분인가? 이름은 황(晄). 초자는 평보(平甫), 자는 명조(明照). 세조의 둘째 아들로 형이 병약하여 대신 19세의 나이로 제8대 임금의 자리에 올랐다. 어머니는 파평부원군 윤번(尹璠)의 딸 정희왕후(貞熹王后)다. 아내(妃)는 영의정 한명회(韓明澮)의 딸 장순왕후(章順王后), 계비(繼妃)는 우의정 한백륜(韓伯倫)의 딸 안순왕후(安順王后)다.

그런데 재위 2년만에 세상을 하직했다. 뒤이어 첫째 아들인 덕종[追尊]의 둘째 아들인 성종이 13세로 즉위하는데 그의 妃 또한 영의정 한명회(韓明澮)의 딸 공혜왕후(恭惠王后)로 예종의 妃인 장순왕후(章順王后) 와 함께 그는 딸 자매를 兩代에 걸쳐 한 집안에 시집을 보낸 셈이다. 대단한 권세였다.

왕자의 난은 익히 아는 바이고 문종과 단종의 단명한 임금, 그리고 예종을 거쳐 연산군의 시대가 뒤를 이은 것이 조선초기의 정국이었다. 그 가운데 ‘崇儒抑佛’시대의 낙산사의 이야기가 한줄 끼이게 된 것이다.

 

이 모두 잡설로 지금 의상대는 언제 지어졌는지 알 수 없다. 이곳은 의상이 낙산사를 지을 당시 머무르면서 참선하였던 곳으로 옛 부터 의상대라 불렸다고 한다. 아마 여러 번 바닷바람에 쓰러졌는지도 모른다. 어느 최근 기록에 의상대사를 기념하기 위해 1925년에 세웠다고 하는데 작년에 이를 해체해서 그면 6월에 완공했다는 보도가 있었으니 이번에 가장 오래된 그리고 가장 최근에 단장한 그런 문화재를 감상했는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