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다알프스의추억

기다알프스의 추억[11]집으로...제7-8일 8월14일[土]저녁-일요일 光復節

양효성 2010. 9. 23. 11:07

 

          기다알프스의 추억[11]

               제7-8일 8월14일[土]저녁-일요일 아침 光復節

 

                         집으로...

 

8월14일[土]오후 이제 본격적인 일본 추석연휴가 시작되었다. 날이 흐리니 바닷가에 가보았자 그리 평온할 것 같지 않았다.

가나자와 역은 중앙 홀을 중심으로 동서로 광장이 있어 공항버스는 서 광장, 시외버스는 북 광장 원형 프렛 폼을 따라 도착하고 기차는 2층에서 타고 내린다. 3층부터는 상가와 호텔이 있으니 여행자는 한곳에서 먹고 자고 또 떠날 수 있게 되어 있다.

그 친절한 관광안내소에서 역에서 걸어 3분 거리의 호텔 캐슬을 예약하고 여장을 풀었다. 스마일보다는 약간 넓었고 무엇보다 무료 목욕탕이 있어서 좋았다.

집사람과 李선생은 동전으로 한국으로 전화를 한 뒤 안심을 하는 눈치였다.

 

 

가나자와관광안내소에는 온갖 자료가 있다.

우산과 장화에 휠체어도 준비되어 있는데...

왼쪽에 외국어 서비스하는 자원봉사자들도 나서서-

 

역광장의 버스정류장에는 시내관광버스와 이어 시외버스가 대기중...

 

거대한 유리벽은 루브르의 유리 피라밋을 연상케 하는데...

 

오른쪽이 아나항공호텔-6층에 일식당이 있다.

 

 

돌로 굽는 히다불고기-정말 입안에 한점인데...

이 그릇들도 李三平이 없었다면 이렇게 보통사람들이 매일 사용할 수 있었을지?

 

캐슬호텔은 동서남북 4개의 건물이 하나로 연결된 전형적 비지네스 클라스

 

캐슬호텔옆에서 처음 보는 한국식당은 오후5시에서 새벽3시까지 영업한다고 씌어있다.

 

 

 

倭寇와 그릇 : 집사람이 감기 기운이 있어서 역 2층의 약방에 들러 갈근탕을 샀다. 우리처럼 길거리에 약국이 흔히 보이지 않아 프런트에서 물어야했다. 당연히 입맛이 없을 테니 전복죽으로 몸을 좀 데워야 할 텐데 驛舍에 늘어선 식당가에도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다. 이럴 때는 아예 五星호텔의 식당이 편하다. 광장의 아나항공호텔의 6층에 일본 식당이 있었다. 粥! - 이렇게 썼으면 좋았을 텐데 스프라고 하니까 맑은 국밖에 없다.

튀김과 소고기를 시켜 조금씩 입에 대는데 정말 소식이다. 천천히 먹으면 소량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실감했다.

 

몇 군데서 겨우 며칠 혀에 대본 것이지만 일본음식은 재료의 맛을 최대한 살린다는 것, 불교의 영향인지 小食이라는 것 등이 인상에 남는다. 1汁3菜란 밥은 기본이니까 국 한 그릇에 반찬 셋이라는 말인데 그 반찬이 계란말이 한 쪽에 짠지 한 조각 등 조촐하기 짝이 없다.

 

저장음식이 발달하지 못한 이유가 그릇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즉 도자기가 발달하지 못해 나무통에 쌀겨를 넣고 버무려둔 것이 다꾸앙이라는 것이다. 검객 미야모또 무사시의 스승으로 臨濟宗의 禪師였던 다꾸앙[沢庵1573~1645]이 이 음식을 처음 개발했다는 이야기다. 그는 자신이 세운 동경 디즈니랜드 시나가와 부근 동해사의 부도에 永眠하고 있는 실존인물이었고 임란 시기에 활약했으니 그리 먼 이야기도 아니다.

 

장구한 한일교류의 역사에 비쳐 도자기가 일본에 전해진 것은 훨씬 전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최소한 일반에 보편화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지금도 미소시루[일본 된장국]를 질그릇이 아닌 나무그릇[木器]에 담아 마시는 것도 그 방증이라 할 수 있다.

그릇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 한일역사를 푸는데 왜구와 그릇은 또 하나의 키워드가 될 수 있다. 倭寇! - 倭는 앞서 말했지만 670년 이전의 일본 국호다. 寇는 도둑인데 떼를 지어 백성의 재물을 약탈하는 사람 또는 외적의 침략이라는 의미가 있다. 다시 말하면 왜구의 침입은 국가 간의 약탈전쟁일 수도 있고 소규모의 해적으로도 볼 수 있다. 신라의 박제상을 비롯하여 왜구의 침략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아마 그 종합편이 임진왜란일 것이다. 한국사의 한 획을 그은 이성계의 출현도 실은 1380년(우왕 6) 금강 어구의 진포(鎭浦)에 정박한 왜선 500척을 해도원수(海道元帥) 나세(羅世)·심덕부(沈德符)·최무선(崔茂宣) 등이 화포를 써서 모두 불태우고, 이때 동반 상륙하여 남부지역을 횡행한 왜구를 도순찰사(都巡察使)였던 그가 지리산의 황산(荒山)에서 무찌르는 대첩을 거둠으로써 중앙정계에 발을 공고히 할 수 있던 발판을 삼은 때문이었다. 남원에서 함양가는 길에 그 황산대첩비가 있다.

 

우리는 왜구의 출발지였던 대마도를 만제끼바시[萬關橋]로 이어진 긴 고구마 정도로 우습게보고 있지만 실은 이 섬 주변에 크고 작은 109개의 섬이 있다는 것을 다시 생각한다면 그만큼 왜구의 출몰이 빈번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에는 이 자세한 기록이 오래 전에 출판되어 있다. 아무튼 왜구가 바다를 건너온 목적은 한마디로 약탈이었는데 그릇으로 말할 것 같으면 단순약탈이었지 그 원천기술을 훔쳐가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때 이 원천기술이 드디어 일본으로 넘어가고 그때 만들어진 그릇이 유럽에서 큰 돈벌이가 되었다. 하멜도 아마 이 그릇을 실으려고 나가사끼로 가던 중 조난을 당했을 것이다. 나가사끼[長崎]에는 인천의 월미도에 비해 아주 콩알만 한 데지마[出島]라는 섬이 있는데 이 해관을 통해 도자기는 유럽으로 가고 네델란드의 과학은 일본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누가 이름을 지었는지 天下라는 의미의 九州[큐슈]는 가야를 비롯해서 근대까지 일본이 해외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唯一無二의 젖줄이었던 것이다. 1655년 9월 10일 세상을 떠난 아리타 도자기를 만든 조선사람 李參平의 땀방울이 유럽 황실의 식탁을 장식하고 일본의 근대를 여는 동안 조선의 鎖國은 고려시대 페르시아 무역의 황금기를 까맣게 잊은 채 衰國의 길을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릇은 그렇게 일본에 전해졌지만 김치나 탕국은 아직 일본에 전해지지 않은 것일까? 아니면 한류의 열풍을 따라 고추도 마늘도 모두 기꼬망 간장처럼 우리 대신 세계시장을 석권하게 될 것인가?

 

돌아오는 길에 ‘韓の家’라는 식당이 보인다. 이런! 이 집에는 꼭 들렀어야 하는데 이미 배가 부르다. 목욕탕으로 가서 몸을 담갔다. 철분이 녹아내린 욕조의 물은 따스했고 피로가 풀렸다. 단 10분이라도 욕조에 몸을 담그면 왜 상쾌해지는 것일까?

 

 

역사란 청동거울을 닮았다 : 일본의 종전기념일이자 추석이요 우리의 광복절 아침이 밝았다. 이 호텔은 東西南北의 네 빌딩이 모여 한 호텔을 이루고 있다. 다시 목욕탕에 몸을 담갔다. 이런 저런 생각이 김처럼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목욕탕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나에게 庚戌國恥100년에 독도 문제 등 하필 이런 때에 왜 일본에 자주 가느냐고 묻기도 한다. 이제 조금 답을 할 때가 되었다. 먼저 그런 때일수록 일본에 가야한다는 것이 내 대답이고 그 다음으로 내게 일본은 지난 百年만이 아닌 數千 年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임진란 이전에 황윤길과 김성일 두 사람이 豊臣秀吉을 만났는데 상반된 보고로 한국이 겪은 7년의 辛苦는 7년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후 300년 결국 1904년의 IMF와 1905년 외교권박탈 및 1910년의 일이 있었고 1997년에도 아찔한 경험을 했다. 그때도 제2의 김성일이 있었고 지금도 없으랄 법이 없다.

나는 국적을 한국으로 하는 평범한 시민이요 정부의 외교정책에 조언을 하거나 누구 한 사람에게 영향을 끼칠 인물도 아니다. 300년이 흐르고 이제 외교사절이 아닌 시민도 일본에 가볼 수 있는 때가 되어 누구의 말도 아닌 내 눈으로 그 세상을 보고 싶은 것이 그 하나요, 문화가 다른 땅에 흘러가서 천년이 지나면 어떻게 變貌-受容되는가 하는 것이 다른 하나다.

 

역사란 청동거울을 닮았다. 한 면에는 흐릿하게 자신의 모습이 보이지만 뒤집어보면 아름다운 무늬가 보인다. ‘무늬의 역사’와 ‘自省의 歷史’ - 그 대표적인 것이 백의민족 이런 것이 있었다. 神衣인 ‘흰 빛을 숭상했다’는 그 말은 한 때 진실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白衣’는 ‘布衣-草衣’비슷하게 되어 벼슬을 하고 錦衣還鄕하는 ‘彩衣’의 상대어가 되었다. 고구려벽화에 어디 白衣가 보이는가? 즉 白衣는 王이나 李씨가 아닌 百姓의 옷이 되거나 왕족이 喪中에 입는 罪人의 옷이 된 것이다. 백의의 백성이 왕도 되고 재상도 되는 세상이 되었지만 이런 上命下服의 의식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또 다른 예로 삼국통일을 들 수 있는데 지금 우리가 통일국가인가를 무늬의 역사가 自省의 역사로 되새겨 보아야 한다.

세상을 바꾸는 데는 개인의 의식변화가 선행되어야 한다. 男女老少 貧富貴賤은 어느 세상에나 있지만 서로 尊重과 平等과 自由와 博愛의 三色깃발이 仁義禮智信과 어떻게 일치할 수 있는지 곰곰 생각해보지 않으면 안 된다.

 

국민의 책임은 없는가? 몰랐다는 것은 답이 되지 않는다. 위정자는 언제든지 국민을 속일 수 있다. 그러나 丹齋는 황성신문에 10년이 안 되어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무기력한 젊은이들을 질타한 일이 있었다. 그리고 꼭 10년 만에 百年 전의 오늘이 있었다. 그리고 나라가 망하면 어떻게 되는 것인지 국민이 깨닫는 데는 또 10년이 걸려 1919년의 대대적 운동이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위정자들이 맘만 먹으면 그런 일이 또 일어날 수 있다. 다만 정보와 교육의 탓으로 매우 신속하게 또는 미리 국민들이 알고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국민들이 모두 일어나지 않을 만큼 만 나라를 팔아먹을 수도 있다. 이런 경우에 국민들이 어느 理想國家를 羨望하며 그 나라 말을 배우고 음식을 즐기고 가락에 몸을 흔들어대다 보면 위정자들이 아무리 무늬의 역사를 들고 나와도 이미 나라는 기우는 것인데 五十步百步라는 고사가 이를 證明한다. 짐을 싸들고 백보를 뒷걸음질 쳐 移民을 하고 보따리를 싸들고 오십보 기러기엄마가 날아가면 이미 조짐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걱정해야 한다. 무엇보다 노동이 신성하고 존경받는 세상이 필요하다. 지도자가 왕이 되어 서민과 친하겠다고 하면 과연 그 서민이 세습왕조도 아닌 임금을 우러러 설설 기고 함께 어깨동무를 하겠는가?

 

이날 우리 부모들은 감옥에서 나와 나를 뱃속에 만들었고 사흘간 먹지도 자지도 않고 거리를 헤매며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반쪽의 독립정부가 서기까지 다시 3년을 기다려야 했고 그 사이 관동군 사령부는 미군부대가 되었다가 얼마 전 전쟁기념관이 들어섰다.

 

식욕이 없다. 세 사람은 식당으로 내려가 아침을 먹고 나는 방에 남아 우유를 한 모금 마셨다.

 

 

 

지금 막 한국으로 떠나는 일본인 가족이 가방을 끌고 있는공항은 한가하다

 

계류장의 아나항공

 

풀이 비집고 자라는 군비행장이었던 고마쓰공항에 비행기는 내리고...

 

호수를 안고 있는 카가온천장-밤에는 불꽃 놀이로 호수가 물들고..

 

... 

특급 온천호텔들이 줄을 이었다.

 

일본의 국정공원 카가해변은 공항에서 10분거리?

 

해변은 띠처럼 이어져...

 

구름속의 백산에서 휘어 휘어 흘러내린 계곡의 물을 받아들인다.

 

 

 

시골 공항 : 인천공항처럼 10분에 한 대씩 떠나는 것이 아니고 하루에 한두 번 국제선을 띄우면 되니까 줄을 설 필요도 없다. 아래층에서 짐을 부치고 위층에서 타면 되고 좌석도 미리 예약했으니 오던 자리에 그대로 앉으면 된다. 광장에서 좀 놀아도 되는데 인솔자가 된 李선생은 불안한 눈치였다. 눈치껏 자동발매기에서 표를 사더니 막 떠나는 공항버스에 오르고 보니 일행은 우리뿐이었다. 드문드문 서는 정류장에도 타는 사람이 없다. 추석 아침! 우리는 전세버스로 공항에 내렸다. 국제선과 국내선은 일직선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선물가게와 식당은 오직 국내선에 집중되어 있다. 서점을 기웃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계류장에는 아나항공이 한 대, 활주로에 진입하려고 이동하는데 비행기가 머리를 스치고 착륙한다. 시멘트를 비집고 풀들이 자라고 있다. 비행기는 가볍게 파도를 밀고 오른다. 눈 아래 加賀의 온천장이 호수에 발을 뻗고 있다. 어젯밤에는 폭죽이 이 하늘을 덮었을 것이다. 이어 국정공원인 加賀해변이 눈에 들어온다. 오늘은 맑다. 하루만 더 시간이 있었어도 저 해변에서 즐겼을 텐데...수영복은 배낭 밑바닥에 소금기를 잊은 채 고이 접혀있다.

‘자! 마지막 코스이니 헤엄치는 상상들을 하라구...’

이어 뱀처럼 휘어지면 백산의 물이 흘러내린다. 바다에서 바로 솟아 저 구름 속에 이 마을의 진산인 백산이 있다. 이 마을은 강릉을 닮았나?!

 

 

 

구름에 가린 영종도...

 

이윽고 인천 공항에 내렸는데...

 

며칠 뒤 일본의 식당에서 온 엽서

來福-복받으세요!

 

 

 

그러한 잠시 동해를 건너 이번에는 인천의 해변이 뿌옇게 눈에 들어온다. 출국수속은 매우 간결하다. 주차장에는 일주일간 땡볕을 이고 달궈진 자동차가 지쳐 있었다. 6만원인가? 주차비를 지불하고 집으로 돌아와 창문을 열었다. 광복절 한낮에...

 

며칠 뒤 첫날 가나자와에서 저녁을 먹었던 ‘福わ家’의 女主人이 情겨운 엽서를 보내왔다. 그 친절함이란...

 

<*다음은 부록으로 경비와 후일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