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알프스의 추억[9] 제6일 8월13일[金] 오후
히다의 민속마을과 온천욕
아침시장을 둘러보고 역광장으로 돌아와 수퍼에서 김밥을 먹고 호텔로 돌아와 잠시 쉰 뒤 히다마을로 가기 위해 다시 광장으로 나섰다. 4명이니 1000円쯤 한다는 택시를 타기로 한다. 히다마을[飛驒の里]은 철로 건너 야트막한 산을 의지하고 있다. 입장료는 600円, 五阿彌라는 연못을 지나 맨 처음 만나는 집이 新井씨의 집이다. 인천에는 열우물[十井洞]이라는 洞名이 있는데 ‘새우물’이라는 뜻일까?
눈[雪]과 비와 지붕 : 지붕은 하늘로 부터 비와 바람을 막아주는 구실을 한다. 빗방울은 지붕을 타고 흘러내려 마당을 지나 개울로 흘러간다. 그 빗방울이 겨울에는 눈이 되어 흐르지 않고 쌓인다. 이 이상한 ‘겨울의 물’ - ‘흐르지 않고 쌓이는 물’은 연약한 기둥이 받치고 있는 지붕을 바윗돌처럼 누른다.
얼마나 눈이 많이 내리는지 길도 門도 지붕도 모두 白雪로 덮이면 집과 집 사이에 새끼줄을 연결해서 서로 빙빙 돌리며 길을 뚫는 다는 것인데 이렇게 되면 마을은 모두 에스키모의 이글루가 되는 것인지? 스위스의 집들은 지붕의 경사가 급해서 뾰족지붕아래 들창을 숨구멍으로 삼고 이것이 교회의 원형인 고딕양식이 된 것 아닌가?
이 집은 지붕에 2m의 눈이 쌓인 1910년의 대설을 견뎌냈다고 한다. 본래 淸見町 池本 小鳥개울가 산을 의지한 논 가운데 있었던 것을 옮겨왔다고 한다. 이집은 마치 강당에 ‘井’字로 칸을 막은 상자를 닮았다. 왼쪽은 작업실, 가운데는 거실과 부엌, 오른쪽은 방 이런 식이다. 작업실에는 베틀과 씨아 물레 및 재봉교과서가 전시되어있는데 모두 정밀하고 효율적인 느낌이다.
中藪씨의 집은 너와집인데 촌로가 너와를 만들고 있다. 통나무를 잘라 결을 따라 쪼개고 말려서 너와를 만들고 있는데 강원도 너와에 비해 매우 얇고 규격이 일정하다. 물매를 따라 너와를 깔고 돌로 눌러 놓는 것은 우리와 같은데 기와 못지않게 간격을 유지하고 있다.
그 다음 立保神社 앞에 앉아 잠시 쉰다. 지금 내 머리는 복잡하다. 사실 이번 여행은 똘똘이[李선생의 아들을 우리는 그렇게 불렀다.]가 민속학과에 진학함으로 생긴 여유로 이루어진 것인데 다행히 그 학과에 흥미를 보인다. 그러면 부모도 응당 그 학과에서 무엇을 배우는지 냄새를 좀 맡을 필요가 있다. 나는 나대로 시골에 집을 짓고 살려고 한다. 논 가운데 아파트가 들어서는 판에 벽촌의 숲속에 단독주택을 짓는다는 것은 이 나이에 용기가 나지 않는다. 百人이 모두 말리는 일은 하지 말아야하는데 꼭 한두 명 용기를 불어넣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면 꺼졌던 불씨가 다시 살아나곤 한다. 시골집은 시골다워야 한다. 그 시골집의 냄새를 일본에서 맡는 것이 이상한 일이요, 또 강원도의 너와집을 이곳에서 다시 보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동유럽에 가보지 않았지만 갈대지붕을 이은 집들은 이 집과 너무 닮았다. 참 스위스는 지나가 보았는데 농가의 냄새가 이곳과 꼭 닮았다. 문자가 없던 시절 문명의 이동을 검정색도자기[黑陶]의 발굴지점을 연결하면서 이어보는 방법이 있다. 그 지도는 시베리아의 초원의 길을 따라가고 있다.
히다의 옛 성터에 모인 合掌가옥들
1910년 2미터의 눈을 이겨낸 新井씨의 집
재봉교과서
기능적으로 보이는 신식물레
일본의 나무는 곧게 자란다. 모두 칼로 자른듯 반듯하다.
이곳에서는 한식 추녀의 곡선이 그립다.
너와를 만드는 촌로 - 전통은 이렇게 이어진다.
너와를 깔고 돌로 누르는 것은 강원도와 다를 것이 없지만...
도리-앞에서 생각이 많다. 수천을 헤아리는 도리는 오래된 것일수록 곡선이 없다.
도리를 바라보며 : 신사의 입구에 도리가 보인다. 두 개의 기둥에 두 개의 들보를 가로지른 것인데 漢字로는 ‘鳥居’라고 쓴다. 도리는 서까래를 받치기 위하여 기둥과 기둥 위에 건너 얹는 나무를 말한다. ‘とり-’는 그대로 우리말 ‘도리’다. 생긴 모양이 한식집의 도리 그대로인데 이곳에서는 신사의 대문이다. 이 돌에 가만히 기와를 얹어본다. 그러면 영락없는 한국의 절에 있는 일주문이다. 이 일주문 좌우에 두 개, 다시 또 두 개의 일주문을 세워본다. 그러면 자금성의 천안문이 보인다. 두 개만 좌우에 세우면 三門이 된다. 하나만 남기면 조선왕릉에서 흔히 보는 홍살문이 된다. 그 높이를 매우 낮추면 제주도 민가의 대문인 정낭이 된다. 이 모두 禁忌와 神聖의 의미가 있다.
不敬! 神을 노하게 하지 말라는 것인데 神은 누구인가? 저 도리[鳥居]에 날아올 새를 놀라게 하지 말라는 것이 농사를 짓던 시대 사람들의 신앙이었다. 철새가 날아오면 씨를 뿌릴 때가 된 것이니까- 내년에도 어김없이 날아오도록 제물을 차리며 철새를 대접했던 것이 아닌가? 그 새가 날아오는 신성한 장소가 우리의 삼한시대에는 솟대요 또 이것을 蘇塗[소도]라고 썼을 것이다.
‘히다’는 天馬인가? 태양신인가? : 지금 내가 앉아있는 곳은 ‘히다노 사토[飛驒の里]’인데 漢字를 의역하면 ‘나르는 말’ - 天馬다. 飛는 나르는 것이고 驒은 連錢驄, 즉 돈닢을 늘어놓은 듯한 흰 무늬가 박힌 검푸른 말로 야생마의 일종이다. 이 나르는 말은 기마민족에게 또한 신성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기마민족은 이동을 위주로 하는 유목민족이요 솟대를 숭상하는 농경민족은 정착민족이다. 그렇다면 이 명칭이 존재하던 시기를 전후로 이 지역에 두 개의 문화권이 혼재했다는 가설을 세워볼 수 있다.
飛驒이라는 이곳의 지명을 ‘히다’로 읽는데 ‘히다’는 어떤가? 이런 지명이 일본에 여러 곳 있다. 큐슈에는 ‘日田’이라는 지명을 바로 ‘히다’로 읽는데 朝日新聞의 ‘日’도 ‘히’다. ‘히다’는 ‘희다’요, ‘희다’는 해다. 해를 빨갛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白日依山盡’에서나 ‘靑天白日旗’에서나 모두 ‘해’를 ‘희다[白]’고 보아왔다. 형용사나 동사나 명사의 개념이 없던 시절에는 희다거나, 희게 하거나 해거나 모두 해[日-太陽]로 보았던 것이다. 이런 ‘해’와 관련된 지명이 일본에 여러 형태의 漢字로 산재해 있고 그 지명을 연결하면 문화의 이동경로가 밝혀질 것이라는 것이 내 머리를 복잡하게 하고 있다. ‘곰[熊]’이라는 지명도 마찬가지여서 한국의 지명과 함께 다시 정리해보고 싶은 것은 욕심일까? 다시 걷는다.
堯임금의 처마 : 若山의 집은 어마어마한 두께의 갈대지붕을 이고 있고 띠를 이은 집이 3층이라는 것이 보는 사람을 놀라게 한다. 지붕에는 풀이 자라는 것이 아니라 여린 소나무도 자라고 있었다. 그 지붕은 거대한 배를 엎어놓은 듯한데 처마를 가지런히 잘라놓았다. 면도칼로 잘라도 그렇게 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堯舜聖代라는 말이 있는데 史書에 堯임금의 집은 토방에 처마를 자르지 않았다고 되어있다. 淸廉이 얼마나 귀중한 덕목인지 새삼스러운 대목이다. 평면구조는 대동소이하지만 마을사람들이 모두 모일만한 회의실을 연상케 하는 2층은 매우 넓다. 갈비처럼 촘촘히 살을 대고 마루를 깔았는데 매우 조밀하다.
벌목공의 집 : 이 민속촌을 돌면서 이곳은 신선한 자극이었다. 아름드리 통나무를 자르는 톱과 함께 옻을 채취하고 갈무리하는 산간의 생활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들이 사용하던 때 묻은 생활도구들에서 그들의 애환이 느껴졌다. 창포의 연못을 지나 나무로 수저를 깎는 노인에게서 나무수저 한 벌을 샀다. 생나무의 투박한 숟가락은 자주 쓰다보면 윤이 날 것 같았다. 커다란 종이 매달려 있는 종루에서 소녀는 손뼉을 세 번 두드리고 머리숙여 소원을 빌었다. 개구쟁이 남동생도 따라서 그만하라고 달랠 때까지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고 있었다. 기념품가게의 벽에는 온갖 수레바퀴가 진열되어 있다. 車田[차전]이라는 팻말이 붙은 논에는 벼가 자라고 있는데 바둑판처럼 줄을 띄워 벼를 심는 것이 아니라 수레바퀴모양으로 물결처럼 동그랗게 동심원을 만들어가며 벼를 심었는데 매우 특이한 방식이었다. 연못 중앙의 西岡의 집에서는 대금으로 흘러간 노래를 부르는 노인이 있었다. 혹 ‘荒城의 달’을 연주해줄 수 있느냐고 했더니 3절까지 애절하게 불러주었다. 여운이 오래 남았다.
와까야마씨의 3층집 갈대지붕에는 작은 솔이 자라고 있다.
가운데 화덕 자리가 있는 집의 내부는 모두 직선이다.
와까야마 댁의 평면도
2층의 어두운 내부
벌목공의 작업장
종을 쳐서 神을 부르고 소원을 비는 소녀
솔방울 모양의 酒林
수레바퀴모양으로 동그랗게 벼를 심었다는 車田 - 중앙의 말뚝이 동심원의 중심이다.
코죠노스키를 불러준...
휴게소에는 술집이 잘되라고 현관에 걸어놓는 삼나무가지를 모아 동그랗게 만든 커다란 솔방울모양의 ‘酒林’이 걸려 있었다.
민속촌을 나와 가게에서 아이스크림에 코로케를 먹다보니 점심 생각이 별로 없다. 일본여행을 하다 며칠 지나면 서서히 소식이 되어가는 것은 왜일까? 나이 탓인지!? 나만 그런지? 서서히 걸어 돌아가기로 한다. 참새도 날지 않는 한가로운 논길을 걸고 있으려니 명승지나 유명백화점을 돌기 일쑤인 여행에서 해방된 느낌이다. 벼는 소리없이 자라고 가끔 부는 바람에 살픗 머리를 흔들뿐이다. 논길이 끝나는 곳에서 일본 청년과 미국처녀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다. 민속촉으로 가는 지름길을 가르쳐주었다. 젊음의 미소가 예쁘다.
온천욕을 마치고 나니 맥주 한 잔의 맛이...그린호텔
히다물산관의 무료 족욕탕 - 발도 씻고 쇼핑도 하고...
그린호텔온천의 휴식 : 일주일 여행이면 중간에 하루쯤 쉬어야하는데 쉬지 않고 여기까지 왔다. 온천은 실개천 옆에 있었다. 어제 다까야마에 도착했을 때 부지런히 왕래하던 셔틀버스가 바로 이곳 그린호텔이었다. 관광안내소에서 타올도 샴푸도 다 있고 1000円이라고 했었다. 무료 족욕도 있다는데 알고 보니 ‘히다 物産館’이 나란히 있는데 그 입구에 족욕을 할 수 있는 인공 개울을 만들어 놓았다. 발을 씻고 쇼핑을 하는 것인지 발도 씻고 쇼핑을 하는 것인지 아무튼 양말만 벗으면 되는데 반바지에 슬리퍼를 신은 젊은이들은 발만 담그면 되었다. 어떤 아이는 발을 담근 채 할머니의 품에 잠들어 있고 책을 읽고 있는 사람도 보인다.
오후3시에 여는 대욕탕은 일본의 온천이 다 그렇듯이 잔잔히 물이 넘치고 있었다. 땀을 씻어내고 머리를 감고 욕탕에 몸을 담갔다. 노천온탕으로 자리를 옮겨 좀 졸다가 몸을 말리고 나니 가뿐했는데 최소 2㎏이 늘었다. 갖은 고생을 하고 다녔는데 웬일이야?! 李선생도 마찬가지란다. 일본 저울이 이상한가?
휴가를 즐기는 사람들로 254실 920명이 잘 수 있고 식당도 모두 합하면 한꺼번에 1천명이 식사할 수 있는 대규모 호텔은 빈 방이 없이 붐빈다. 밖에서 보면 대학 강의실 같은 온천의 내부는 아기자기하다. 시원한 맥주를 한 잔 하며 겐로꾸엔 한 부분을 잘라낸 듯한 정원을 바라보았다.
잠시 히다물산관을 둘러보다가 술잔 두 개와 술병을 샀다. 이곳에서 만든 것이니 젊은 부부에게는 기념이 될 듯하였다.
서서히 걸어 철길을 건너고 호텔로 돌아와 쉬다가 죤스라는 카레전문점을 찾아 저녁을 먹고 진야[陳屋]광장에서 열리는 동네음악회를 구경하는데 비가 흩날린다. 오늘은 하루 종일 이상한 식사를 했다. 마쯔리[祝祭]인줄 알고 단단히 기대했다가 실망했다. 오늘은 맑았는데 이러다가 내일 비가 오는 것은 아닌지?
<계속 다음은 ⑩ 유네스코문화유산 시라가와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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