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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천년의 세월-漢 張遷碑(장천비) 앞에서...

양효성 2016. 7. 12. 00:21


         2천년의 세월-漢 張遷碑(장천비) 앞에서...

한 덩어리의 돌? 아니다 높이가 2.92m 넓이가 1.07m 이니 엄청난 크기의 돌이다. 게다가 네모반듯하게 다듬어졌으니 원석은 훨씬 더 컸을 것이다. 이 까만 돌에는 3.5Cm크기로 15행에 각각 42자 - 모두 567字의 漢字(한자)가 새겨져 있다. 2천년의 세월 그 돌에는 어떤 이야기가 새겨져 있을까?


요즘 사람들은 이 비석의 글씨에 篆서와 예서의 중간 서체라든지 한대(漢代) 隸法의 규범이라든지 書法에 관심이 많지만 그 당시의 붓이나 종이의 재질이 오늘날과 많이 달랐다는 것도 생각해보아야한다. 아울러 비단을 짓이긴 종이에 쓰인 글자가 돌 위에서 정으로 쪼아질 때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도 勘案(감안)해야 할 것이다.


다른 한 쪽에서는 이 비석이 하고자하는 말에 관심이 많을지도 모른다. 이른바 메시지라고나 할까? 춘향전 변사도 탓인지 頌德碑(송덕비)라면 뭔가 냄새가 난다는 사람일지라도 글자를 돌에 새길 정도라면 그 시대의 의미를 한번은 눈여겨보아야 하지 않을까?


시대 배경은 중국 중평(中平) 3년으로 AD186년이다.

이 돌은 동한영제 후한(後漢) 영제(靈帝:재위 168∼189)中平3년(186) 지금 태안시 東平縣에 세웠던 것인데 명나라 초기에 발견되었으니 천년 이상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었다.

우리나라로는 신라(新羅) 벌휴이사금(伐休泥師今) 즉위 3년, 고구려(高句麗) 고국천왕(故國川王) 즉위 8년, 백제(百濟) 초고왕(肖古王) 즉위 21년에 해당된다. 이 시기는 184년 황건적으로 나라가 어수선하고 동양의 고전이 된 三國志演義의 무대가 이미 차려진 때였다. 이보다 10년 전 영제(靈帝) 희평(熹平) 3년(174)에 조조는 20세로 낙양북부위(洛陽北部尉)에 올랐었고 184년 황건적의 난은 장각의 급사로 막을 내렸지만 낯익공손찬이나 손견 등이 그들을 진압해 주가를 높였다. 189년, 영제는 국내가 한층 시끄러운 가운데 34살 나이로 붕어했지만 십상시와 苛斂誅求(가렴주구), 부역으로 민심은 완전하게 떠나게 되었다. 220년에 그 한나라가 막을 내리자 삼국지연의도 마지막 장을 넘기고 그 뒤를 이을 조조도 함께 눈을 감았다는 史實(사실)을 우리는 기록을 통해 알고 있다.


이 비석에는 황건적과 관련하여 이런 구절이 남아있다.

[...黃巾初起燒平城市斯縣獨全... : 황건적의 초기에 평성시를 불태웠을 때 이 고을만은 홀로 온전하였다.]

오늘도 그리 다르지 않은 苛斂誅求(가렴주구)와 賦役(부역)에 대하여...

[蠶月之務 不閉四門 腊正之祭 休囚歸賀 : 양잠하는 달에는 四方 城門을 닫지 아니하고, 腊으로서 百神에게 제사를 지냄에 죄수를 놓아주어 집으로 돌아가게 했다/ 八月算民 不煩於鄉 隨就虛落 存恤高年 : 8월 人丁稅(漢代) 부여함에 鄕을 번거롭게 하지 않았고 수시로 농촌을 찾아 고령자들을 위로하고 구휼하여...路無拾遺 犁種宿野.... : 길에 떨어진 것을 줍는 사람도 없고 쟁기와 씨앗을 들에 두어도 넘보는 자가 없었다...]


비문의 문단은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장천과 가문의 내력 : 장천은 진류(陳留)의 기오사람이라는데 진류는 지금 카이펑(開封)의 남쪽이다. 장씨들은 그의 선조로 장중[周나라], 장량, 장택지, 장건 등이 모두 나라에 기여했다.

[2]장천의 이력[곡성의 장] : 경방이 지은 ‘周易’을 익혀 穀城의 長과 蕩陰의 首領으로 수행한 공적과 덕행.

[3]장천에게 바치는 찬사와 비석을 세우는 연유

[碑陰 : 부기] 비석을 세운 사람들과 비용 : 위숙진 錢五百 등등

이 비석에는 인명과 지명과 함께 공자와 노자와 수많은 고사가 등장한다. 학자들에 의하면 문맥에 맞지 않는 글자 또는 誤字(오자)도 있다고 한다. 명나라 때 발굴되었다니 천년이상 그 존재가 어둠에 묻혀있었다. 그래도 한번 살펴보는 것으로 무언가 세월의 벽을 뛰어넘는 영감이 떠오를지도 모른다. 백과사전과 여러 블러거들의 글을 참고했는데 그 姓銜(성함)을 밝히지 않아 죄를 묻는다. 아울러 우리말로 풀어본 것은 대부분 자의적인 곳이 많다는 것을 밝히는 것은 원문을 옮겨둔 것으로 그 허물을 조금이라도 면하려한다.


漢故榖城長蕩陰令張君表頌

君諱遷 字公方 陳留己吾人也 君之先出自有周 周宣王中興 有張仲 以孝友為行披覽詩雅 煥知其祖 高帝龍興 有張良 善用籌策 在帷幕之內 決勝負千里之外 析珪於留 文景之間 有張釋之 建忠弼之謨 帝遊上林 問禽狩所有 苑令不對 更問嗇夫 嗇夫事對 於是進嗇夫為令 令退為嗇夫 釋之議為不可 苑令有公卿之才 嗇夫喋喋小吏 非社稷之重 上從言 孝武時 有張騫 廣通風俗 開定畿寓 南苞八蠻 西羁六戎 北震五狄 東勤九夷 荒遠既殯 各貢所有 張是輔漢 世載其德 爰暨於君 盖其繵縺 纘戎鴻緒 牧守相係 不殞高問 孝弟於家 中謇於朝 治京氏易 聰麗權略 藝於從政 少為郡吏 隱練職位 常在股肱 數為從事 聲無細聞 徵拜郎中 除穀城長 蠶月之務 不閉四門 腊正之祭 休囚歸賀 八月算民 不煩於鄉 隨就虛落 存恤高年 路無拾遺 犁種宿野 黃巾初起 燒平城市 斯縣獨全 子賤孔蔑 其道區別 尚書五教 君崇其寬 詩云愷悌 君隆其恩 東里潤色 君其仁 邵伯分 君懿子棠 晉陽珮瑋 西門帶弦 君之體素 能雙其勛 流化八基 遷蕩陰令 吏民頡頏 隨送如雲 周公東征 西人怨思 奚斯讚魯 考父頌殷 前喆遺芳 有功不書 後無述焉 於是刊石豎表 銘勒萬載 三代以來 雖遠猶近 詩云舊國 其命惟新 於穆我君 既敦既純 雪白之性 孝友之仁 紀行來本 蘭生有芬 克岐有兆 綏御有勛 利器不覿 魚不出淵 國之良幹,垂愛在民 蔽沛棠樹 温温恭人 乾道不繆 唯淑是親 既多受祉 永享南山 干祿无疆 子子孫孫 惟中平三年 歲在攝提 二月震節 紀日上旬 陽氣厥析 感思舊君 故吏韋萌等 僉然同聲 賃師孫興 刊石立表 以示後昆 共享天祚 億載萬年


그의 이름은 遷(천), 자는 公方(공방)이며, 陳留(진류: 현 開封 남쪽 하남성 淮陽) 己吾 사람이다. 그의 선조는 周(주)나라에서 나왔으니 周나라 선왕이 중흥할 때에 張仲(장중)이란 사람은 효도와 우애를 일삼았으니, 詩經의 小雅를 보면 그 조상을 훤히 알 수 있다.

高帝께서 나라를 세우실 때 張良(장량)은 계책으로 군막 안에서 천리 밖의 승부를 결판내어 留(진류의 땅)의 제후로 봉해졌다. *析珪(땅을 반으로 나누에 반은 천자에게 반은 제후에게 둠) 文帝와 景帝시대에 張釋之(장석지)란 사람은 충성으로써 임금을 보필하는 계책을 많이 올렸다. 황제가 상림원에 거동하시어 苑(금수를 길러 황제에게 제공하는 곳)에서 기르는 짐승의 숫자를 우두머리[令]에 묻자 미처 대답을 못했다. 이에 다시 색부(嗇夫:하급관리인)에게 물으니 자세히 아뢰었다. 이에 색부로 令을 삼아 진급 시키고 令을 색부로 삼으려하자, 석지가 不可함을 아뢰기를 “苑令은 公卿의 才量이 있고 색부는 지질구레한 일만 재잘거리는 小吏의 자질로 社稷의 동량이 아닙니다.”고 하니 황제가 그 말을 따랐다. 孝武帝 시절에 장건이란 사람은 널리 변방의 풍속에 익숙하고 국토를 개척하였으니, 남으로 여덟 만족을 복속시키고 서쪽으로 여섯 융족을 예속시켰으며, 북으로 다섯 적족을 떨게 하고, 동으로 아홉 오랑캐를 근신하게 하여 거칠고 먼 지역과 교류하여 각각 특산으로 공물을 바치게 하였다.


張씨들이 한나라를 보좌한 공덕은 대대로 이어져 君에 이르러서도 왕업을 떠받쳐 牧(州郡의 長官)과 守(郡官) 등의 지방관들이 서로 이어 명예를 드높였다. 집안에서는 효도하고 공손하며, 나라에는 충성하고 충직하였다. 君은 京氏의 周易(西漢 京房作)을 익혀 權變과 策略에 밝았고, 정사에 능숙하여 젊어서는 郡의 일을 맡아보았고 그 일을 잘 수행하여 황제가 믿고 기대는 신하가 되었다. 여러 번 從事官이 되어 잡음이 없었고, 郎中의 직위에 곡성의 수령으로 제수되었는데 양잠하는 계절(夏曆 3月)에는 四方의 城門을 닫지 아니하고, 그믐과 정초에는 죄수를 풀어 집에서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8월 의 人丁稅(漢代)를 부과함에 마을사람들을 번거롭게 하지 않았고 수시로 촌락을 찾아 고령자들을 위로하고 구휼하였다. 길에 떨어진 물건을 줍는 사람이 없었고, 쟁기와 씨앗을 논밭에 두어도 손대는 사람이 없었다. 황건적이 蜂起한 초기에 平城市는 불탔으나 이 縣만은 홀로 안전했다.

작은 직책도 만족한 子賤과 같은 일을 하면서도 불만인 孔蔑은 추구하는 바가 서로 달랐으니 尙書의 五敎(父義, 母慈, 兄友, 弟恭, 子孝)로서 君은 그 너그러움이 으뜸이요 詩經에 군자의 얼굴과 기상이 和樂하고 端雅하다 하였으니(詩云愷悌君子民之父母...) 君이 그 은혜를 입은 사람이었다.

東里(춘추시대 정의 충신 공손교)의 다듬고 다듬은 문장처럼 그도 어짊으로 교우하고 邵伯(西周人)이 감당나무[棠]아래서 송사를 풀어주자 주민들이 감동하여 그 나무까지 사랑했듯 그에게도 백성의 사랑이 미쳤다. 晉陽(진양)이 부드러운 소가죽을 어루만져 여유를 찾고 西門서문이 활을 허리에 차 긴장을 늦추지 않았듯 君은 수행으로 인품을 이루었다.


널리 교화한지 8년에 蕩陰(탕음)의 수령으로 자리를 옮김에 지방의 官吏와 백성들이 따라가며 환송함이 구름과 같았다. 주공이 동쪽을 정벌함에 서인이 자신을 정벌하지 않음을 원망하고 奚斯는 魯나라를 기리었고 고부(宋)는 殷나라을 칭송하였는데 前時代 哲人들이 아름다운 행적을 남겨 공적이 있으나 기록되지 아니하고 후에도 저술됨이 없어 이에 돌에 새겨 대강 표하여 만세에 남기고자 하니(銘勒) 夏殷周 이래로는 비록 머나 오히려 가까운 것 같으니 詩經 에 이르기를 “나라는 비록 옛 땅이지만 그 명을 새롭게 함”과 같다.

아! 아름다운 우리 어른이여!

돈독하고 순수하시니 성품은 白雪이요 효도와 우애는 인륜의 근본이도다.

행적을 기록하여 근본을 인품을 그리나니, 난초가 피어나면 향기가 있는 법.

어릴 적 조짐이 있더니, 관리가 되어서는 공적을 이루었네.

날카로운 물건은 드러나지 않나니, 고기가 연못에 잠겨있는 것과 같다네.

나라의 훌륭한 기둥이요, 백성들에게 사랑을 베풀었도다.

자그마한 감당나무 아래에 온화하고 겸손한 사람이로다.

하늘의 도리는 어긋나지 않으니 오직 착한 사람을 친애하는 법

많은 복 이미 받았으니 남산과 같이 영원히 누리리라.

복록이 무궁하사 자자손손 누리소서.

중평 3년 태세는 병진년[AD186] 2월 우레 울리는 철

기일은 상순에 양기는 흩어져 올라오는데

옛 주군 그리워서 옛 서리 위맹 등 모두의 이구동성으로

석공인 손흥에게 일을 맡겨

돌을 잘라 표를 세워서 후손에게 보이노라.

억세 만년에 하늘의 복 함께 누리시라.


**이 글을 길게 쓴 까닭은 무엇일까? 한마디로 하면...원본-진본-진품-진적-오리지날 ...뭐! 그런 강박관념...拓本(모두들 이렇게 쓰는데 搨本이 맞는 말이다)은 이 비석을 베낀 것이다. 그 원본이 서첩에서는 크기와 세월의 흠집들이 왜곡되어 출판된다. 또 그 자리에서 그 크기의 세월을 느껴본다는 것...

법첩으로만 보았던 그 실체를 대했을 때 조그만 떨림이 있었다.

*

*이 비석은 지금 태산아래 岱廟에 있고 원래 태안시의 서쪽에 있는 동평현의 향교에 있었다고 한다. 왜 여기 그 비석을 세웠는지? 혹 장천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자세하지 않다. 그가 벼슬을 한 穀城과 蕩陰은 어디일까? 山東동평호 부근의 谷城이 아닐까? 또 하남성의 湯陰은 아닐까? 추측해볼 뿐이다...태안의 서남쪽에는 이보다 앞선 서기168년의 衡方碑(형방비)가 있었다. 이른바 漢故衛尉卿衡府君之碑...또 태안의 동쪽에는 서기272년의 晉任城太守夫人孫氏之碑가 있다. 이 비석 또한 장천비와 지금 나란히 대묘에 보관되어 있다.


오리지널 장천비...3.5Cm의 글자...之內決勝負...夫嗇夫事對...등의 글자가 보인다.


장천비의 본 모습...높이 약2미터


역대비각진열


형방비...


형방비의 부분


손씨 부인비


태안에는 약2600여 석각이 있고 모두 유네스코문화유산으로 기록되었다


수목과 비림으로 대묘는 세월을 느끼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