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촌가는길

임진년 대보름 천안 봉양리 장승제[오동촌 가는 길 17]

양효성 2012. 2. 9. 20:54

 

        임진년 대보름 천안 봉양리 장승제 [오동촌 가는 길 17]

                                     

 

굿판을 벌려 한 해 마을의 평안을 기약할 수 있다면 밤바람이 차기로손 대수랴? 하물며 멍석만한 보름달이 떴는데...

날씨도 정세도 꾸무럭한 이번 대보름에도 이곳의 보름달은 몹시 맑았다.

경부고속도로가 독립기념관을 지나 천안휴게소 쯤에서 동서로 갈라놓은 마을이 천안시 동남성남면이다. 세성산성이 있어서 성의 남쪽이라고 그런 이름을 붙였을까?

‘세성산성이 동학군이 최후를 맞은 곳입니다.’

이곳 향토사학자인 장세균 씨[‘갑오농학혁명과 천안’ 著者]는 돌모랭이에게 전화를 하고 나는 그 틈에 끼여 오랜만에 장승제를 보게 되었다.

‘밤실하고 한절우[큰 절이 있었던 大寺村] 마을이 널뛰기를 해서 저 앞 거문돌[검은 돌 : 마을 이름]이 보이면 그해 흉년이 든다고 저 둑에 검은 돌이 안 보이게 미루나무를 심었다는 이야기가...’전해 내려온다고 면장 조한수 씨는 마을 사람들과 어울려 이야기꽃을 피운다. 검은 돌과 기단만 남은 절 이야기는 돌모랭이의 친구들이 언젠가 데려다 주겠다고 한다.

 

백 마디의 말보다도 무리지어 개울 옆에 서 있는 느티나무들이 역사를 알린다. 神市의 시대처럼 이 그늘이 마을의 일과 놀이와 神聖의 장소였는지도 모른다.

충남도무형문화재로 등록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다. 장승제를 유지하는 모임의 회장은 류인근 씨, 예능보유자는 김종린 씨다. 장승으로 쓰일 나무는 박종혁, 깁주동 씨가 골라 옮겨 오고 류동열 씨가 다듬어 김도영 씨가 새기고 최해명 씨가 ‘東方靑帝大將軍 西方白帝大將軍’글씨를 썼다.

초헌 아헌 종헌 의 순으로 獻爵이 이어지고 촤해석 씨는 마을의 안녕을 비는 축문이 장중하게 읊어진다. 우둥불은 타오르고 달은 중천에 淸光圓을 그리고 마을 사람들이 잔을 들어 장승에게 절을 한다. 이어 집집마다 소원을 담은 글을 적어 장승에게 빌며 태워 하늘에 올리는 燒紙의 儀式이 행해진다. 이어서 飮福으로 마을 사람들은 추위를 잊는다. 달은 휘엉청 푸른빛을 비추고 사람들의 얼굴은 발갛게 봄기운을 탔다.

 

祝祭- 神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행복을 기원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축제는 까마득한 시절 일본으로 건너가 그들의 생활이 되었고 이제는 온 세계 관광의 트렌드가 되었다. 어쩌면 이 굿이야말로 韓流의 元祖인지도 모른다. 한 때 굿을 찾아 사진을 찍는 일군의 작가들이 있었다. 나도 그 사진집을 사서 보곤 했다. 엉겁결에 돌모랭이를 따라 나선 길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소중한 문화체험을 했다.

 

서울의 상도동에는 장승백이라는 지명이 버스가 지나다니는 오늘도 어엿이 남아있다. 이는 당연히 村이라는 漢字가 나무(木) 옆에 ‘촌(寸)’이라는 소리를 달고 있는데 그 나무가 바로 장승이다. 邑落國家라는 말이 있다면 고대에는 당연히 村落國家라는 말도 존재한다. 그것이 이곳 향토사학회의 과제다.

 

 

    

우둥불은 타오르고

 

고목의 밑동이 마을의 연륜을 대신하고

 

보름달 아래 마을의 장승이 새단장을 했다.

 

 

헌작이 이어지고...

 

서방을 지키는 장승에도-

 

동방을 지키는 장승에도 술을 바치고-

 

축문이 이어진다.

 

'세차임진정월...'로 시작되는 축문 

 

 

 

면장님도 마을사람들과 큰 절을 하고...

 

집집마다 소망을 비는 축문이 살라지는 소지의식이 진행되면...

 

마을 사람들의 음복의 차례다. 임진년의 大豊을 기원한다.

 

 

** 한 나라는 당연히 어린아이를 교육하고 노인을 奉養하고 치안을 유지하고 자연과 더불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울타리를 만들어야 한다. 마땅히 돈을 맡길 은행도 없고 경찰도 믿을 수 없어 시골마다 무슨 전화경찰[텔레캅]이니 세콤이니 경찰 일자리를 창출하고 법원도 믿을 수 없어 변호사가 불티나고 병원도 정말 인술을 베푸는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다 보면 없던 병이 생길 지경이다. 학교에서 배우는 것이 친구 밀쳐내기 시험지옥이고 폭력을 먼저 배우다 보면 또 나라의 장래는 어찌 될까? 게다가 가르침의 으뜸이라고 宗敎라는 이름을 바친 그곳에서 과연 모시는 분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는 從敎人들은 또 얼마나 될까? 민주주의를 팔고 사랑과 布施를 파는 지도자들은 없는가? 내 집은 내가 지키고 내 마을은 내가 가꾸는 구조조정이 필요한 시대다. 한 때 초가를 헐고 당집을 태우고 새마을을 만들던 시대가 있었다. 꼭 그 시대가 어떻다는 것이 아니라 흐름을 보아가며 좌우의 균형을 맞추는 지혜가 필요한 때다. 그 하나의 나라를 급진 진보보다 더 개혁적으로 수행하던 사람들이 어느덧 보수라는 간판을 들고 변모된 그 옛날을 붙들고 있다. 금융이나 축산보다도 종교 교육 이념 철학 가치관 그런 FTA를 숙고할 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