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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수 없는 나라 - 집안의 압록강[4]

양효성 2011. 3. 25. 23:59

         갈 수 없는 나라 - 집안의 압록강[4]

 

국내성에서 : 集安은 문자 그대로 國內城 - 高句麗의 首都다. 지금 그 땅은 압록강 건너에 있다. 국경이 잘못된 것이다. 언제부터였을까? 조선시대였던 14세기? 아니면 그보다 멀리 高句麗가 무너진 7세기인가? 아니면 평양으로 수도를 옮긴 때였을까?

통화에 도착한 것은 늦은 밤이었다. 역 건너편 2星 쯤 되는 호텔에서 꿈도 꾸지 않고 잘 잤다. 역 광장으로 나가 집안까지 하루를 쓰기로 하고 택시를 빌렸다.

시내의 박물관은 문이 닫혀있었고 벽화로 유명한 그 고분도 모두 닫혀있었다. 영문을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언젠가 PD수첩에서 방영한 벽화도난사건인지도 모르겠다.

환도산성은 국내성을 옹위하는 외성으로 작은 흐름을 안고 아늑한 분지를 이루고 있었다. 사진으로만 고분군은 역시 사진은 현장을 담는데 한계가 있음을 실감케 했다. 이에 비해 시내에 있는 국내성은 허물어지고 낮아져 7층아파트 사이에 길게 이어져 있었다.

2004년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한 타이틀은 Capital City & Tombs of the Ancient Koguruo Kingdom인데 그 성은 너무 허술해보였다.

 

점심을 먹고 다시 압록강으로 나섰다. 산성과 국내성과 압록강- 영락없이 背山臨水의 아늑한 집터였다. 平壤에 가보지 못했지만 그 大同江이나 서울의 漢江이나 모두 이런 모양의 확대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네 번째 국경 : 점심을 먹고 서점에서 고구려벽화에 관한 책을 몇 권 샀다. 중국인들이 이 集安에 이렇게 관심이 깊은 줄 채 몰랐었다. 산책을 겸해 압록강변으로 나갔는데 초겨울의 햇살을 즐기는 시민들이 난간에 제비처럼 기대있었다. 수풍과 단동에서 보던 하구와 달리 강둑은 의외로 낮고 강 건너는 육안으로 잡힐 듯 가까웠다. 이곳 유람선이 그렇듯 배는 강심을 따라 상류로 거슬러 오르다가 되돌아오는데 장마 때는 물에 잠길 강 가운데 모래언덕은 어느 나라 땅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하기야 여기는 중류이니까 당연히 강폭이 좁을 밖에...저쪽 강변의 굴뚝에서는 잿빛 연기가 희미했다.

내친 김에 국제열차가 지나는 철교까지 가보기로 했다. 경비대 사무실로 안내되어 여권을 보여주고 이적사항을 기록하고 ‘사진촬영엄금’이라는 안내원의 지시를 따라 철교에 올라섰다. 아마 625인지 전쟁의 상흔이 그대로 남은 초소의 부서진 창문을 통해 건너편이 빤히 바라다 보였다. 모래섬에도 농사를 짓는 흔적이 있었다. 건너편 비탈의 공장들은 초라해보였다.

철교의 한 가운데 이르자 앞서 가던 초소의 군인은 정지의 신호를 했다. 한 걸음만 더 걸으면 어찌되었던 북쪽의 땅이었다. 건너편은 만포진으로 어디서 이름을 들어본 것 같은데 고구려가 평양으로 갔을 때는 이 길로 가지 않았겠는가?

 

女眞族과 만포진 : 조선을 개국한 사람은 女眞과의 관계가 깊다.

여진족이 조선을 자주 침범한 것은 生必品때문이었는데 태종 때에는 鏡城과 鏡源에 무역소를 개설해 말과 海東靑, 山蔘, 毛皮를 가져오면 綿布, 麻布, 米豆, 鹽藏, 農具, 종이 등으로 바꾸어주기도 했다.

 

明이라는 大國에 外交의 중점을 두었지만 女眞과는 교린의 관계[交流]를 유지하고 서울에 북평관이라는 요즘의 대사관을 개설해주었는데 그곳이 지금의 혜화동이다. 明나라의 눈치 때문에 무역소를 폐쇄하고 한때 이 滿浦鎭에서 식료품을 제공했다니 이 자리가 새삼스러웠다.

 

帝國이 盛하면 반드시 衰하는 것이 歷史의 輪回여서 明나라는 저 유명한 北京의 명13릉 가운데 발굴 개방하는 주인공인 萬曆皇帝에 이르러 국고가 메마르고 우리 또한 200년 이성계가 이자겸의 후손이 아니라는 승인을 이 황제에게 받아내고 自祝하다 함께 壬辰年의 倭亂을 맞게 되었다.

 

만포진이 아닌 義州[新義州는 이 義州의 강변도시로 새로 건설된 뉴타운이다.]로 피난했던 宣祖에게 누루하치가 사신을 보내 원조할 뜻을 비친 것도 이런 因緣인데 속내를 알 수 없다는 여론에 성사되지는 않았다. 아무튼 명나라의 원군이 만주를 비운 틈새에 여진족은 1616년에는 後金을 세우고 태종에 이르러 淸나라로 개명한 뒤에는 丁卯胡亂과 丙子胡亂을 일으켰다. 우리로서야 오랑캐의 난동이지만 그들로서는 형식상이든 현실적이든 전쟁이요 그 전리품으로 종주국의 행세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廣開土王 父子 : 우리 역사에서 가야를 포함한 四國時代처럼 경계선이 자주 바뀌고 또 모호한 때도 없었다. 인구도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는 적었고 또 그만큼 국토도 간선도로를 제외하면 왕래가 드물었다. 아무튼 그 경계는 들락날락하기를 고무줄처럼 했는데 광개토대왕은 그 경계를 한참 넓힌 분이었다.

도 한 가지 우리의 역사 가운데 가장 확실한 기록을 남긴 분이 廣開土大王인데 그것이 바로 이곳에 새겨진 廣開土大王의 碑다. 독립기년ㅁ관에 實物大의 모형이 있지만 이곳에서 보는 그 웅대한 모습은 새삼스럽다. 풍우에 시달리는 이 비석에 비각을 처음 세운 분은 진주출신의 사업가로 알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중국에서 유리문을 달고 보초병을 세운 뒤 엄금 촬영금지다. 이 보초병은 내가 중국에서 보았던 사람으로는 제일 엄중한 자세와 제지를 했다. 이 碑文은 건국설화로부터 대왕의 당부까지 고구려사의 요약이라고 할 수 있고 또 여러 권의 저서가 출간되었다는 것만 적어둔다.

 

대왕의 왕릉은 석축이 많이 무너지고 또 封墳위로 볼썽사나운 계단이 가설되었는데 무덤은 텅 비어 있었다. 이 王陵에서 마주보이는 산자락에는 ‘동양의 피라미드’라고 자랑하는 장군총이 있었다. 그 높이는 13.1m로 거의 5층높이에 달했다. 혹 鳥葬의 유습이 개량된 것일까? 大王의 屍身은 지하에 묻지 않고 탑처럼 그 상부의 석실에 안치했던 흔적이 신기했다.

 

이 고즈넉한 분지에서 말을 달리고 만주를 다스렸던 고구려인의 기상이 새삼스러웠다. 陸史가 어찌 曠野에서 ‘白馬를 타고 오는 超人’을 渴求했을 때 이들의 기상을 염두에 두지 않았겠는가?

 

해는 저물어간다. 나는 닫힌 벽화의 석실을 겨울 그림자에 남겨둔 채 通化로 돌아오는 택시에 몸을 실었다. <*>

 

 

중국에서 만포진으로 가는 국제열차의 만포진-집안 철교 - 저 멀리 북한의 검문소가 보인다.

 

뒤의 산이 환도산성

 

귀족들의 무덤군이 모여있는데 피라미드석축처럼 장군총을 닮았다.

 

환도산성은 분지처럼 산으로 둘러막혀 아늑하다.

 

환도산성을 흐르는 개울과 하루 빌린 중국택시 -

 

국내성의 성곽은 무슨 마을 돌담처럼 초라하지만 길게 아파트를 가르며 이어지고 있다. 

 

집안박물관은 굳게 닫혀있고-

 

압록강변의 저편은 북한인데 가운데 한강의 밤섬처럼 이름모를 섬이 있고...

 

그 섬에는 이런 초막도 눈에 띈다.

 

겨울 한낮의 여광에 비치는 북녘의 산하는 먹을 풀어놓은듯 역광에 번지고

 

북녘의 강변도로를 지나면

 

연기를 뿜는 공장이 손에 잡힐듯 하다

 

하류쪽으로는 그래도 푸른물이 넘실거리는데-

 

이 강변에서 쪽배를 빌려 탄다.

 

 

검문소를 지나 일제 때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 철교를 지키던 망루는 폐허가 되고 그 틈으로 보이는 것은 만포진

 

망루에서 바라본 철교의 끝은 북측 검문소다

 

만포진의 언덕에 세워진 이름 모를 건물

 

다리밑 둔치에는 지난 여름 농사를 지은듯

 

저 검문소에서 수속을 마쳐야만 이 망루에 오를 수 있는데-

 

중국측 관문

 

다리에 올라서면 만포진이 더 뚜렷이 보인다.

 

이 강폭의 좌우에서는 언어가 다르다. 왼쪽이 중국

 

여기까지가 내가 갈 수 있는 곳이다.

 

만포진의 강언덕에 세워진 건물들이 보이고...

 

광개토대왕의 비문

 

유리장에 갇혀있다.

 

왼쪽의 기와지붕이 호태왕비 비각

 

대왕의 릉에는 계단이 세워져있고

 

대왕과 왕비의 무덤은 비어있다.

 

대왕의 릉에서 마주 보이는 산에 장수왕의 장군총이 보이는데-

 

'동양의 피라미드'라는 장군총! 무덤은 여기에 있는데 평양으로 도읍은 왜 옮겼을까?

한 가운데 창문에 왕이 영면했던 것으로 보인다. 높이는 20미터가 넘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