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에서... 미술관에서...

2千年前 농촌이 부활하다-광주박물관 신창동 유적 전시실

양효성 2010. 11. 10. 02:23

 

 

           2千年前 농촌이 부활하다-

                        광주박물관 신창동 유적 전시실

 

 

국립광주박물관에서 오랜만에 눈에 확 들어오는 전시실을 발견했다. 사적 375호 창동유적에서 출토한 물품들이다. 한마디로 2100년 전 극락강 주변에서 살던 조상의 모습이 송두리째 발견된 것이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우리가 박물관에 식상했던 것은 천편일률로 어느 박물관이든 석기시대의 돌맹이와 청동기의 칼과 창 등 출토지와 용도가 아리송한 긴 전시실을 통과하며 흥미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요즘은 방추차나 어망돌, 수레나 마구의 부속 들을 그림이나 지도와 함께 해설함으로 이런 지루함을 많이 덜게 되었다.

 

신창리 전시실이 동일한 시대구분이 주는 지루함을 단숨에 털어버린 것은 농경사회의 모습을 사실 그대로 보여주는 출토품이 다양하고 완전한 모양으로 진열되었기 때문이다.

 

목재로 된 농기구, 베틀 바디, 발화구[불을 일으키는 도구], 신발골, 실감개, 목검과 칼집, 낫자루, 소쿠리, 싸리비, 자리방석, 어망추, 현악기와 타악기와 수레바퀴, 저장용과 음식그릇과 수저 등등 여러 가지 토기, 주거지, 탄화미, 오이씨, 장례형식을 보여주는 옹관, 인골, 참돔과 멧돼지뼈, 호도와 오이씨, 소나무와 오리나무 꽃가루, 편충 회충 알 등 일상생활이 고스란히 햇빛을 보게 된 것이다. 특히 현악기의 부분, 칼자루, 쟁기자루, 부채 손잡이. 활 등의 목재류가 온전하게 보존된 것은 이곳이 저습지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금부터 2천년전 우리는 기록의 공백인 삼한 시대였고 중국의 漢나라와 비슷한 시기다. 후난성 장사에서 마왕퇴의 고분이 발굴되어 당대의 귀족생활이 고스란히 드러났다면 신창동의 유적은 한 마을의 생활이 그대로 드러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왕퇴의 유물들을 직접 보았을 때의 감동이 새롭다. 중국에는 또 이 시기의 한자교본인 急就章이 脫字없이 전해오고 있다. 나는 그 글자가 지시하는 사물의 사진과 함께 이 책을 번역하기 위해 1년간 중국에 머물며 각지의 박물관을 돌면서 1만장의 사진을 찍었었다. 그 책에는 빗[梳]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그 옆 페이지에는 마왕퇴에서 출토된 5.5Cm에 74개의 살이 있는 정교한 빗을 원색으로 옮겨 놓았다. 또 중국에는 1만년 전 빗을 비롯해서 淸代에 이르기까지 빗만 가지고 책을 쓴 사람도 있다. 그 책을 사면서 왜 우리에게는 그런 문물이 남지 않았는지 애석해했었다. 그런데 이 박물관에는 그와 아주 닮은 빗이 전시 되어 있다. 또 진시황의 병마용에서도 마왕퇴에서도 가래[삽 비슷한 농기구]가 나왔는데 이 전시실에도 가래가 있다. 마차의 바큇살이나 현악기 등은 완벽한 모습은 아니지만 당시의 모습을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또 하나 인상적인 것은 바람개비 문양인데 이 무늬는 세계 공통으로 햇살을 상징하며 뒤에 卍자로 변했다고 윤지향 박사는 말한다. 그 모습은 쓰촨 청두[成都]의 金沙遺蹟博物館에서 본 ‘太陽神鳥’와 너무 흡사했다. 太陽神 새는 三足烏와 同義語로 보아 틀림이 없다. 중국인들은 이 유적지에 박물관을 세우고 또 발굴현장을 병마용과 같이 비행기 격납고처럼 지붕을 씌워 보호하고 있었다. 西安의 선사유적도 마찬가지였다.

 

신창동유적지는 1963년 옹관묘 조사를 시작으로 1992년 발굴로 국내 최초의 저습지유적이 확인되었었다고 한다. 뉴스에 의하면 국립광주박물관은 2009년 미조사 구간 발굴조사를 통해 저습지의 범위와 주변 생활유구를 조사하면서 싸리비와 나무용기, 쐐기 등의 목제유물과 재첩 껍데기, 핵과류 씨앗 등의 유기물질을 추가로 발굴했다고 한다.

삼국시대 집자리 10기를 찾아냈는데 이 집들이 서로 중복되어 각 집자리의 형식과 선후관계 뿐만 아니라 각 집자리에서 출토된 유물의 편년체계 수립이 가능해졌다고 한다.

안쪽에 칠(漆)을 한 후기신라의 토기로 출토해 칠기 생산 관련 자료도 확인되었는데 東國輿地勝覽에는 漆을 많이 사용해서 극락강을 칠천이라고 했다는 기록도 있다고 한다. 신청동은 본래 마지(馬池)면이었는데 1914년 모신(매결)과 선창의 한 글자 씩 모아 신창(新昌)이 됐다고 한다. 운암산 기슭 월봉과 황우봉 사이로 호남고속국도와 1번국도가 지나가고 두 길 사이의 ‘주막샘골’이 바로 이 유적지라고 한다. 박물관에 가면 문화해설사의 친절하고 자세한 해설을 들을 수 있는 것이 또 하나의 즐거움이다.

 

 

왼쪽에 2000년 전의 곡물들이 보인다

 

나무로 만든 농기구들

 

왼쪽의 목재 절구공이와 오른쪽 돌확과 공이

 

중앙의 시루로 음식을 쪄서 먹은 것을 알 수 있다.

 

수저와 여러 그릇들 가운데 머그잔도 보인다.

 

입이 넙적한 그릇들은 국물을 담았는지도 모른다.

 

아래 오른쪽에 구절판처럼 칸을 나눈 반찬그릇이 보인다.

 

귀가 달린 저장용 대형토기

 

나무로 깎은 손잡이가 있는 가래는 벼를 쓸어답기 알맞아 보이는데...가래를 닮았다. 

 

왼쪽의 목제 얼레빗은 뒷날 영암 명물 참빗의 원조인가?

오른쪽은 요즘의 라이터- 마찰로 불을 일으키는 도구 

 

 

당시 마을의 지도자는 무당이었을 것이다.

중앙에 옻칠을 한 칼집이 보인다.

 

옷감을 짜던 베틀의 실패와 가락바퀴-바디 등

 

나무 쐐기

 

오른쪽에 마차의 바퀴통과 바퀴살이 보인다.

 

바람개비 모양의 칠기는 ...

 

태양의 빛을 상징했을것인데...

 

중국 성도의 진사유적박물관에는 태양신의 새라는 金製 문양이 전시되어 있는데

신창동의 문양과 닮아 보인다.

 

이 박물관은 비행기 격납고처럼 유리로 천정을 덮어 발굴현장을 보존하고

에스칼레이터가 설치된 박물관은 초현대식 설비를 갖추고 있다.

중국인들의 문화존중을 실감할 수 있다. 

 傳統創新-溫故知新-實事求是라는 표어는 지금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현악기의 통판에는 줄을 맨 구멍이 보인다.

 

일종의 타악기로 이들은 베를 짜서 옷을 입고 농경으로 식생활을 해결하고

 음악을 즐기며 마차를 이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00년 전 극락강에서-

 

 

 

 

우리가 ‘인간의 역사’를 前提하는 한 發展이라는 말이 있을 수 있다면 進展된 인류의 삶과 정신을 공동체가 共有할 수 있는 경우에 국한된다는 것을 되씹어볼 필요가 있다. 만약 일부에 편중된 고급문화가 저급문화를 옥죄거나 공격을 일삼는다면 파괴와 共滅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박물관에서 또 유적지에서 지나간 사회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과연 얼마나 협동과 나눔을 통해 인간적인 유대를 유지해왔는가를 돌이켜 보는 것은 이기적인 욕망의 사슬에서 괴로워하는 현대인들에게 하나의 틈새를 열어주는 한 줄기 빛이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