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일고 학생독립운동 기념관
광주학생독립운동사건의 배경은 일제의 愚民化 정책과 차별 및 억압이었다. 일제는 조선인들을 우민화하기 위해 고등교육을 제한하고, 직업교육과 일본어·일본사 교육 등을 실시하였고, 학생들의 자유로운 토론과 비판, 자치활동을 금지하고 조선인 학생을 무시하는 등 식민지교육으로 일관하였다.
이 짧은 문장을 통해 지금의 교육에 혹 이런 殘影이 남아 있지 않나 반성해볼 일이다. 주입식 교육, 외국의 숭상, 학생의 자립의지 박탈 등 만일 우리 손에 의해 그런 殘像이 지워지지 않는다면 그만큼 우리의 걸음은 더뎌질 터이니까...신문은 중학생 졸업 정도의 수준을 유지한다든가, 漢字는 어려워서 배우기 어렵다거나...그런 이야기들이 한 때 유행했다. 학생들의 자유로운 토론과 비판, 자치활동 등이 새삼 생각되는 이유다.
당시 조선인 학생들은 일본인 교육자들의 억압과 무시 그리고 우민화정책으로 항일의식이 싹트고, 광주의 여러 고등보통학교(중고통합과정)에 성진회, 독서회 등의 비밀학생조직이 생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1929년 10월 31일 나주역에 도착한 광주발 통학열차에서 내린 일본인 중학생들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인 박기옥 · 암성금자 · 이광춘의 댕기머리를 잡아당기며 희롱하는 광경을 목격한 박기옥의 사촌동생 박준채가 항의하다 난투극이 벌어진 것이 학생운동의 시발이었다.
편파적 수습과정의 결과로 축적된 분노는 1929년 11월 3일(일요일) 불이 붙었다. 이날은 일본에게는 메이지유신의 상징인 메이지 천황의 탄생을 축하하는 明治節이었지만, 조선인들에게는 음력 10월 3일로 고조선 건국을 기념하는 開天節이었다. 한국인의 시조를 기념하는 날에 일본 천황의 생일을 '기미가요'를 불러서 축하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조선인 학생들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리고 下校길에 일본인 학생들과의 충돌사건을 불공정하게 보도한 광주일보에 몰려 들어가서 항의하는 것으로 반일감정은 폭발하기 시작했다. 이어 광주고등보통학교의 조선인 학생이 광주중학교의 일본인 학생들에게 테러당하는 일이 벌어지면서 폭력사태가 발생하였다.
이 운동이 1930년 3월초까지 학생들을 중심으로 항일시위 만세운동으로 계속되어 만주지역의 한인 거주지까지 확대되며 참가학교가 323개교에 달했으며 기미년 만세운동이래 최대의 독립운동이었던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11월3일은 그런 학생의 날이었는데 그 행사가 점점 퇴색되어가는 這間의 사정은 미루어 짐작할 수밖에 없다.
학생운동기념관 - 뒤 정공원에 학생탑이 있다.
복도에는 졸업생들의 그림들이 걸려 있다.
40회 졸업생의 유화
광주광역시 기념물 26호
학생운동 참여학교 및 자료
운동에 참여한 330개 학교의 명단
21명의 튀학을 보도한 당시 광주일보
학생운동 관계 자료
이름없는 별들이라는 영화가 1960년대에 만들어졌다. 황해남 주연에 광주서중학생들이 촬영에 참가했다.
투옥돤 광주서중 출신들에는 나금주 선생[2차 맨 왼쪽]도 보인다.
옛 서중일고 모습- 그 교사 자리에 기념관이 서고 반대편에 새 교실이 지어졌다.
옛 교복들
독립운동 민주화 그리고 통일을 지향
교지는 역사를 말한다
옛 교과서
60년대의 교과서
개화기의 교과서
일제시대의 교과서
동문들은 이날을 잊지않고 매년 모인다.
지금 광주일고에는 옛 校舍를 헐고 그 자리에 학생운동 기념관을 세워 그 뜻을 기리고 있다. 學生塔은 역대 대통령의 헌화장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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