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령대로

새천년 新 Silk Road의 關門 釜山-竹嶺大路의 朝鮮通信使

양효성 2010. 6. 13. 05:12

 

새천년 新 Silk Road의 關門 釜山

-竹嶺大路의 朝鮮通信使

 

 

  내 서가에 400년동안 미라가 된 고문서에는 임진왜란 終熄 10년만인 1609년(광해군 1년)己酉約條와 함께 죽령-조령-추풍령-水路 등 네 방향의‘倭使進京路’가 적혀있다. 'Back to the Future'라는 영화가 있었는데, 과연 인간이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지난 가을 10월11일 세종로의 도로원표에서 부산을 향해 충주-단양-죽령-풍기-경주를 거치는 31개의 역원을 더듬으며 나는 400년 前으로 걸어 들어갔다.

 

왜인조경통로-중로, 좌로, 우로라는 글이 보이는데 나는 평구 봉안으로 시작되는 左路를 걸었다.

 

 

 

  부은 다리를 끌고 강을 건너고 고개를 넘고 마을을 지나며 千里를 둘러보아도 말 한 마리, 주막의 마루 한 조각 역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았다. 1886년 역원의 제도가 廢止된지 100년에 이렇게 먼지 한 톨 남기지 않고 사라져버린 騎馬民族의 역사는 신기루였나?

 

  두 달을 걷고 걸어 부산이 보일 즈음 어디서 이 걸음을 멈출까 망설이다가 해풍에 흔들리는 석양을 이고 부산박물관에 이르러‘東萊府使接倭使圖’앞에 섰다. 하얀 화폭에 목탄으로 선만 그어졌던 옛길위에 이 병풍은 행인과 말과 숲과 언덕의 총천연색으로 나를 맞아주었다. 황릉의 문이 열린 기분이었다. 묻고 물어 이 그림 속으로 좀 더 가까이 걷자 조선통신사 여행경로와 행렬도가 그려진 타일벽이 보였다.

 

 

  죽령대로에서 ‘혼자 걸으시니껴?’이렇게 물어오면 속으로,‘ 아니오! 조상들과 함께 걷고 있지요!’라고 되뇌면서도 過客-行商-傳令 등등 그 조상의 모습은 뚜렷하지 않았다. 이 벽에서 드디어 한 사람이 떠올랐는데, 1763(영조35)년에 안동에서부터 함께 걸어온 고구마(甘藷)大使 趙曮(1719-1777)이었다. 그 일행이 신녕에서 추석 망궐례를 지내고 旣望에 영천 朝陽閣에 이르렀을 때의 광경을 書記 김인겸(1707~1772)은 4/4조의 운문으로 日東壯遊歌에 이렇게 적고 있다.

                                   

  과거와 현재는 보는 사람에 따라 달라진다.

  나는 쌈지공원의 마상재(2005.12.9)를 1763년의 영천 朝陽閣에서 본다.

  이 정자는 초창기 대일외교의 정몽주와 인연이 있다.

  영천은 대구, 포항, 안동, 경주와 모두 1시간 거리로 여기서 통신사행렬이 재현되기 바란다.<재현되었다는 소식을 다음에 들었다>

 

 

  淸晨(청신)에 秣馬(말마)하여 永川으로 바로 가니/

  邑地(읍지)도 웅장하고 안세도 광활하다/

  여기는 대도회라 전례로 연향하매/

  감사도 친히 오고 列邑이 많이 왔네/  

  조양각 높은 집에 鋪席(포석)을 장히 하고/

  순사와 삼사신이 다 주워 올라앉아/

  그 버거 사 문사를 차례로 좌정하고/

  풍류를 치오면서 잔상을 드리오니/

  찬품도 거룩하고 기구도 하도할샤/

  군관과 원역들은 이 연석에 못 든다고/

  연상을 각각 받고 딴 좌에 앉았구나 /

 

 ‘여기는 大都會라 前例로 宴享하매’라는 구절이 있는데 죽령대로에는 여주, 충주, 안동, 영천- 이 네 곳에서 일본 사신을 접대하게 되어 있고 부사(李仁培)일행이 돌아갈 때 이 길을 이용했다. 2005년 겨울 일출이 아름다운 아침 나는 갈대를 스치는 겨울바람 속에서 당시의 마상재를 그려보았다. 그리고 일주일 뒤 그 마상재를 부산 쌈지공원 조각상으로 다시 한번 구경했다. 과거와 현재가 합성되는 순간이었다.

 

  눈앞의 너른 들에 혁통처럼 길을 닦아/

  볼품 좋은 닫는 말게 마상재를 시험하니/

  그 중에 박성적이 좌우 칠보 날게 하고/

  송장거리 등니장신 일등으로 하는구나/

  사방에 관망할 이 양식 쌓고 두루 모다/

  좌우에 미만하니 몇 만인 줄 모르괘라/

 

 

  이번 추석에 부산의 통신사행렬이 금호강을 건너고 조양각에서 마상재가 있었으면 한다.

통신사박물관에는 음식상이 차려져 있고 통신사의 행차와 400년의 기록이 있고 또 역사의 대사관이 있었다. 나는 그 대사와 영사의 茶대접을 받고 부산포에서 끊어진 바닷길의 통신사비자를 받아 죽령대로를 이을 수 있었다. 길은 이어져야 한다. 이어진 만큼 문화는 풍부해진다. 이 비자로 현해탄을 건너 이즈하라 고려문을 지나 시청과 박물관에서 ‘2005년 통신사’의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文化의 十字路에 사는 그들은 倭寇가 아니라 文人이었고 백제의 문화를 싣고 눈구름은 아리아케(有名山)위에 돛폭을 세운 듯 빠르게 규슈로 흘러갔다. 멀리 京都를 지나 東京에 이르는 통신사의 길을 그려보았다. 國分寺와 崔益鉉의 墓所를 참배하고 이 마을 유일한 커피숍에서 聖德太子의 肖像이 그려진 1만엔권을 바라보면서 아사히비루를 마셨다. 그리고 嚴原町鄕土館의 藤井 樣에게 이런 글을 남긴 뒤, 손자에게 줄 鳶을 사들고 일단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 첫눈 그림자/ 香氣만 남겨놓고/ 阿蘇로 가네/ ’

 

  21세기는 생산이 경제이던 과거에서 유통-통상-무역-교류가 경제인 시대가 되었고 태평양과 인도양을 잇는 부산 新港도 그런 의미가 있다. 실크로드에 통상은 끊겨도 문화는 남고 그 文化가 부활하여 다시 경제를 살릴 것이다. 더구나 부산은 慶州와 京都를 잇는 길목이다. 그 京都의 廣隆寺에서 半跏思惟像을 보고 경악했던 기억이 새롭다. 신라가 일본에 전해준 그 木佛은 재료가 다를 뿐 一卵性雙生兒였다. 조선통신사의 길은 과거에도 미래에도 이런 含意가 있고 우리는 그 행렬에서 과거를 보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보는 것이다. 알만한 사람들은 한국에 남은 日帝의 殘滓보다 일본에 더 많은 한국의 전통과 역사가 溫存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길을 걷다보면 自然에는 善惡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오직 生存만이 있을 뿐이다. 人間에게만 선악이 있다. 韓日關係는 隔海相望(申叔舟)- 一衣帶水 - 脣亡齒寒의 관계라고들 한다. 挑戰과 應戰이라는 말이 있는데 문화란 싸우면서 성장한다고 해야 할지?! 이제 싸울 만큼 싸웠으니 클 때가 되었을까? 좋은 시민이 다수가 되면 좋은 사회가 된다는 것이 민주주의의 장점이다. 누가 뭐라 하든지 열린 마음끼리 多數가 만나면 世上을 바꿀 수 있다. 문화가 발전한 시대에는 교육이 활기가 넘쳤다. 신라의 화랑은 시청각교육 정도가 아니라 五官으로 名山大川에 부딪쳤던 야외수업-체험학습을 했기 때문에 나라가 강했던 것이다. 두 나라의 남녀노소가 ‘未來大使’가 되어 이 修道의 길을 떠났으면 한다.

 

 

  일본에 있는 푸른 눈의 친구가 모리구치(守口)에서 시나가와(品川)까지 동해도 53次의 판화를 年賀狀으로 보내주곤 했다. 나도 죽령대로 31次의 엽서를 만들고 싶었는데 아직 손도 대지 못하고 있다.

 

  길의 종점에는 항상 나그네의 理想鄕이 있다. 조선통신사들은 平和와 友好라는 理想을 향해 나라의 이름을 걸고 먼 길을 갔었다. 1607 (선조40년 慶長12년 丁未)년에 에도정부 수립 후 첫 통신사가 渡日했으니 내년이면 그 400週年이 된다. 가능하다면 丙戌年 개띠 還甲이 되는 이번 9월에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라는 주제로 부산에서 동경까지 1,310里그 ‘茶屋の 灯’ 浮世繪 속으로 걸어가 보고 싶다. 마음만 먹으면 어떤 일도 할 수 있다. 마음이 맞으면 함께할 수 있고 더 큰일을 할 수 있다. <아직 이 일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

 

  소년이 묻는다. -할아버지! 과거로 들어갈 수 있어요?! -그럼 과거로 들어가 보면 비로소 미래가 보인단다. -할아버지는 그 미래가 보이세요? -음 어렴풋이... 그래서 좀 더 東京까지 가보려는 거야! 내가 가면 너도 뒤따라 올 수 있으니까! ........ *

 

 

대마도에서...

 

                  

 

 ** 이 글은 朝鮮通信使 2006년3월 통권12호에 실었던 草稿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