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집으로 - 2월1日 月曜日
깨어보니 창밖엔 영상 10도의 겨울비가 내린다. 비가 내리는데도 구마모또 성은 선명하게 유리창에 가득하다. 온통 푸르름에 뒤덮여...게다가 4층의 지붕에 일본식 정원을 꾸며 공원도로를 가리고 구마모또 성과 연결된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했다.
이 호텔은 아름다운 경관을 배경으로 일본식 결혼이 자주 열린다. 1-4층은 각종 연회장과 식당과 커피숍이고 4층의 일부와 5-6층이 객실이다.
KKR호텔창문에 비친 구마모또 성-4층의 일본정원이 공원길을 건너 마치 성과 연결된듯
공간처리가 깔끔하다. 아직 성에는 조명등이 켜지지 않았다.
4층의 일본식당[和食] 통유리창에서도 구마모또 성이 한 눈에 들어온다. 그 창가에 앉아 ‘낫도’의 봉지를 뜯는다. 이 일주일 아침마다 매일 ‘낫도’를 먹었다. 된장국에 죽을 뜨고 참치 한 점 두부 등등 - 그리고 과일 한 조각과 커피를 마신다.
마쯔리의 걸인 : 비싼 비행기표를 사서 외국여행을 하는 경우에 월요일은 정말 불편한 날이다. 박물관이 모두 휴일이니까...루블이 쉬면 오르세이가 연다. 파리는 현명하다. 구마모또 공예관과 미술관 별관이 호텔과 한 집 건너 있으니 기가 막히게 좋은데 월요일이다. 다만 별관이 오늘 연다니 빙고! 그런데 웬일일까? 문이 닫혀 있다. 길 건너 웅본신사에서 축제가 열리니 이번에는 축제에 걸린 것일까? 비는 더욱 세차게 내린다.
우산 한 개에 어깨를 붙이고 축제장으로 간다. 사람들은 먼저 신사에 들러 신발을 벗고 무릎을 꿇고 厄을 면하게 해달라고 축원한다. 厄[原罪]을 품고 태어난다는 기독교 사상과 神道는 태생적 동류일까? 축제의 마당에는 온갖 깃발이 숲을 이루고 흰 천막 안에는 빗소리를 伴奏삼아 온갖 부적을 팔고 있다. 간단한 먹거리도 팔고 있고 마당에서는 북소리와 용트림이 한창이다. 鼓手는 웃통을 벗어버리고 양손으로 북위에 현란한 실루엣을 만들어 낸다. 둥둥둥..북소리는 고성의 담벽을 허물듯 성내를 진동한다. 우산속에서 사람들은 빗소리와 또 우산에서 메아리치는 그 소리에 가슴을 떨며 액을 떨치고 신의 경계로 한 걸음 다가선다.
어느새 옷을 갈아입은 고수는 잠시 내게 포즈를 취해준다.
양력2월1일 熊本神社에서 거행되는 初午大祭-모든 災厄을 막는 祝祭다.
우리는 길을 건너 공원에서 비를 피할 처마를 찾는다. 공원의 벤치는 주인을 잃고 모두 매화떨기와 함께 비에 젖고 있다. 딱 한 곳의 돌로 기둥을 세운 정자에는 이미 주인이 있다. 어디서 구했는지 저쪽 기둥에 안락의자에 두툼한 이불을 얹어 놓고 그 앞에는 때묻은 가방이 하나! 건너편 기둥에 기댄 덥수룩한 검은 수염은 그 방랑의 연륜을 말하고 또한 아직 방랑할 나이가 아님을 알린다. 내 기둥 맞은편에는 집사람이 빗줄기를 세고 있다.
저 사람은 어젯밤 TV에서 본 그 무연고 노인 가운데 한 사람일까? 연고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 인연의 끈이 희미해진 것이지! 그는 지금 우리와 같이 빗줄기를 인연으로 오늘을 보낼 것이다. 그 빗줄기를 빗대어 우리는 서로 다른 기둥에 기대어 애써 외면하고 있다.
다시 ‘荒城의 달’ : 우리는 다리를 건너 다시 가미도리에 들어선다. 예쁜 전차가 가로지르고 다시 백화점이 드러나고 이윽고 투명유리가 하늘을 가린 시장에서 우산을 접는다. 그 사이 우산을 하나 더 사기로 한다. 화장품 가게에 들러 딸애의 입술연지를 하나 산다. 그 아이가 입술연지를 바를 나이를 나는 잊어버리고 살았다. 시집으로 가고 아이를 낳고 힘들게 살고 있는 아이를 잠시 생각해본다. 蔦屋書店[蔦는 담쟁이로 蔦屋이면 아이비 하우스라는 말일까?]입구에는 金-土 아침 4시까지 영업이라고 씌어 있는데 정말일까? 혹 지명연구를 계속할 수 있을까 싶어 규슈의 상세지도 한 권과 구마모또 방송국 개국50주년을 기념하는 ‘映像으로 본 熊本 50年’ DVD를 샀다. 그리고 ‘荒城의 달’을 찾았더니 길 건너 백화점 지하의 약도를 그려준다. 백화점 프라다는 입구부터 명품 전시관이다. 지하의 음반가게 아르바이트 여직원은 이 노래를 모른다. 경리가 매니저를 불러내고 그는 어렵사리 찾아온다. 벳부에서 산 것은 반주가 오케스트라인데 단조로운 피아노 반주에 나이 든 남성의 목소리로 이 노래를 듣고 싶어서다. 도밍고-파바로티-카를로스의 음색을 구별 못 하는 음치가 이렇게 까탈을 부리는 데는 이유가 있다. 맨 처음 이 노래를 어머니가 테이프를 사와 들려주었을 때 그 목소리를 듣고 싶은 때문이다.
그때 가수는 ‘바바 ...’ 이렇게 시작되는데 그 이름을 잊었다. 책의 천국 중국에서 책 사기가 힘들고 전자왕국 일본에서 음반 사기가 힘들다는 것은 이미 오래 전에 겪은 일이다. 그는 어렵사리 그 노래를 찾아왔지만 그 목소리는 아니다. 그 CD에 얹어 미조라 히바리의 ‘悲しい酒’를 샀는데 ‘水仙’은 들어있지 않았다.
고이즈미 야쿠모의 고택 - 그는 여기서 1년을 살았다. 매화는 비에 젖어 막 봉오리를 터뜨리고 있다.
고이즈미 야쿠모[小泉八雲]의 매화 : 백화점 뒷골목에 고이즈미 야쿠모[小泉八雲]의 고택이 있다. 우리나라에도 개화기의 선교사들이 서양문물을 우리에게 전해 주었고 ‘민주주의’라는 시대의 담론은 그렇게 지금까지 숙제로 남아있다.
야쿠모(1850.6.27-1904.9.26) 그리스 서쪽 이오니아 바다의 그리스령 섬 레프카다에서 아일랜드인 아버지와 그리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이주해 기자가 되고 다시 일본에서 특파원으로 일했다고 한다. 이곳 구마모또 제5고등학교에서 영어교사로 일하다가 시마네[島根] 마쯔에[松江]로 옮겨 섬세한 필치로 일본에 관한 수필과 단편을 발표하여 세계에 일본을 소개하는데 이바지했고 그곳에도 동상과 고택과 기념관 등이 남아있다. 귀화 전 이름은 그가 태어난 섬 이름을 딴 것인지 라프카디오 헌(Lafcadio Hearn)이다. 맨 처음 일본을 찾았을 때 하기[萩]와 이즈모[出雲]를 거쳐 이 마을에 들렸었고 시골 기차와 호수가 기억에 남는다.
옛집은 월요일이니 문은 닫혀 봄비에 젖고 있다. 우리나라의 삼성무역센타에 한옥이 한 채 있다면 그대로 두었을까? 이곳은 구마모또의 명동이다. 한 외국인이 겨우 1년 살았던 평범한 일본 집을 그대로 두고 그 앞에 소공원도 꾸며 놓았다. 입장료도 200원円인가 만만치 않은데 이 사람들의 문화사랑을 다시 생각게 한다. 문은 닫았지만 외관은 훤히 보인다. 돌아가 보니 매화가 청초한데 밑동은 고목이 되어 잘려 나가고 그 뿌리 곁에 땅으로 늘어진 한 가지에 꽃이 피었다. 신기 했다. 검둥이를 찔러 보라! 그 피도 검은지! 그런 절규를 읽은 기억이 있다. 이렇게 죽어버린 검은 가지에서 피는 꽃은 또 어찌 그리도 하얗고 싱싱하냐? 그렇다면 노년의 정신에서도 그런 어리디 어린 순순한 정신이 피어날 수 있는 것일까?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 : 12시. 비는 그치지 않는다. 적당한 찻집이 눈에 뜨이지 않는다. 택시를 타고 중앙여고 옆에 있는 소세키의 고택에 가면 멋진 찻집이 있을까? 택시 운전수는 우리가 한국 사람인 줄 알아보고 ‘안녕하십니까?’ 로 시작해서 어디로 가는지 등등 한국말을 한다. 대마도에서 모든 표지판이 한글로 되어 있는데 놀랐고 아소 온천장에는 목욕 주의사항을 한글로 적어 놓았고 한글 리플렛이 있고 한국어로 인사하는 소학생이 있다. 이런 현상은 어디까지 갈까?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 1867.2.9-1916.12.9)는 일본의 소설가이자 평론가, 영문학자로, 본명은 ‘나쓰메 긴노스케’(夏目金之助)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吾輩は猫である)’, ‘마음(こころ)’ 이 유명하고 모리 오가이(森鴎外)와 더불어 메이지 시대의 대표적 작가. 소설, 수필, 하이쿠,한시 등 여러 장르에 걸쳐 다양한 작품은 전집으로 출간 되었고 후배 작가들에게 영향을 끼친 바크다. 그의 초상은 지금 천엔(千円)권에 찍혀 있다.
‘나는 고양이로 소이다’의 나쓰메 소세키의 고택 - 중앙여고 옆에 지어진 이 집은 당시의
관사가 아니었나 싶다. 오늘은 월요일! 양관에 가려 본채의 왜식 기와지붕만 보인다.
이 집은 구마모또의 다섯 번째 살았던 집이다. 이사를 여러번 한 것 같은데 아마 관사였는지도 모른다. 문이 굳게 닫힌 안으로 洋館의 유리창이 왜식집과 이어 있다. 우리 작가들의 기념관은 더러 있지만 삶의 현장은 잘 보존되어 있지 않다. 그가 글을 쓰던 책상과 그 책상에서 바라보이는 정원을 보고 싶었을 뿐이다.
다시 생각해보면 선생님이 학교 관사에 사는 것이 얼마나 좋은가? 학교가 곧 집인 선생님들은 사실 먼저 선생님이 살 집을 마련하고 스승을 모신 뒤에 학생들을 모집해서 가르친 전통을 생각하게 한다. 내가 고등학교에 다니던 때 그 학교는 서울의 도심에 있었지만 운동장 뒤 관사에서 선생님들이 출근하시곤 했다. 일본은 교우주택이라는 제도가 있어서 집 걱정은 없다고 들었는데 지금도 그런지 모르겠다. 중국은 지금 무너져가고 있지만 정말 이런 제도가 잘 되어 있다. 학생과 선생이 한 울타리에서 기숙사와 관사로 공동생활을 하고 있으니 학교가 곧 私塾이다. 미국에는 아예 마을 자체가 대학이어서 명실상부 대학촌이라는 말도 있다하니...
미야모도 무사시 : 비는 시름도 없이 다그치지도 않고 꾸준히 내린다. 강물이 엄청나게 붇고 흐름이 빨라졌다. 아소에서 밤새 흘러온 물일까? 호텔로 걸어 돌아갈 수 있는 거리다. 그 강가에 미야모도 무사시가 살았다는 팻말이 있는데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한다. 요시가와 에이지[吉川永治]의 宮本武藏은 젊은 시절 우리들의 애독서였다.
전남대학교 검도동아리인 낭도회의 카페에는그에 대한 소개가 잘 되어있다. 잠간 빌려 오면
미야모또 무사시는 1584년 미마사까(美作)국 요시노(吉野)군 타께야마(竹城) 성 밑의 사노모(讚甘) 마을 미야모또(宮本)에서 출생했다. 그의 家系는 하리마(播磨)의 호족인 아까마쓰(赤松)씨의 일족인 衣笠씨에 뿌리를 두고 있어...중략...
그가 전국시대를 지나 이곳까지 흘러와 ... 조각에 비범한 재주를 발휘해, 히고(肥後-熊本의 옛 이름) 이와또야마(岩戶山)의 보물인 부동명왕상이 유명하다...그는 茶, 連歌, 俳諧, 軍學에 능통한 이치를 오륜서의 地의 卷에서 ‘만사에 있어 나에게 스승은 없다. 병법의 이치로서 말하면, 모든 예술, 모든 재주는 모두 한가지 길로 통하지 않는 것이 없다’고 단언하고 있다.
그가 이곳에 온 것은 57세 때로 히고(肥後)의 호소카와 타다토시(細川忠利)의 초청으로 쿠마모또에서 벼슬을 살게 된 인연이었던 듯하다. 2년 뒤 그는 이곳에서 門戶를 닫고, 은둔생활에 들어가 1645년 5월 19일 세상을 떠났다.
강물은 어제의 푸르름이 아닌 아소의 분진처럼 잿빛을 띠고 흙탕물을 일으키며 흘러간다. 샛길을 돌아 호텔로비에서 커피를 마신다. 물오른 가지의 물방울이 수정처럼 빛난다.
집으로 : 오후 2시 맡겨둔 짐을 찾고 현관의 택시를 타고 교통센터로 가서 공항버스를 기다린다. 이제 공항에 가면 J를 만나게 될까? 그 수호천사가 오늘도 나와 있을까? 벳부에서 그에게 줄 선물을 사기로 했는데 특산물이 좋을 것 같아 귤을 생각했지만 상할까봐 그것도 께름했다. 집사람이 여기저기 기웃거린다. 돌이켜 보면 산 것도 없지만 선물은 여기 지하나 백화점에서 사는 것이 제일 편리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사람이 화과자를 사왔다.
이제 이미 생각하고 알아둔 대로 기계처럼 움직인다. 나이가 들면서 급하게 차에 오르는 버릇은 없어졌다. 살아가면서 ‘알만하면 일이 끝난다.’는 말이 자주 떠오른다. 낯익은 거리들이 순간순간 사라져 간다. 하루에 어떻게 한 고을의 인심을 알 수 있으랴! 그래도 走馬看山은 오픈카에서 바람[風俗]을 쐬어본 것이지만 밀폐된 창안에서 에어컨을 켜고 오관을 마비시킨 채 쾌속으로 지나가는 車馬看山 - 이런 여행은 무엇이라 해야 할지!
동시통역기 : 버스에서 내려 수속의 대열에 서자 한국으로 여행하는 일본 단체 관광객과 한국관광객이 반씩 자리를 잡는다. 다행히 J를 다시 만나고 집사람은 반가워한다. 동료인 일본 처녀도 한국말을 잘 하고 한국에 가서 살고 싶단다. 덕택에 정말 즐거운 여행이었다.
이 비행장은 짐 검사를 먼저 하고 자리를 배정 받고 2층으로 올라간다. 갈 때는 롯데 설문조사- 이번에는 동시음성번역기 실험이 한창이다. 이번엔 내가 번역기 앞에 앉아 문제지를 따라 ‘버스정류장이 어디입니까?’ 등등의 코멘트를 읽으면 직원이 번역기를 누르고 나는 그 한국어를 본다. 줄임말-생략-도치-방언-속어 등등 삼천만의 언어습관이 다 다른데 그것을 문자영상으로 치환할 수 있다는 생각을 어떻게 했을까? 일본어로 된통 고생을 한지라 이기계가 새삼 신기했다.
출국장 안의 면세점은 너무 작았다. 아마 시골 고등학교의 매점 정도의 넓이일까? 소주를 두 병 샀다. 한국소주가 위스키 값과 같던 기억을 떠올리며...비행기에 오르자 한국 신문이 있고 카스도 한 캔 준다. 단숨에 비행기는 날이 저문 인천공항에 우리를 내려놓는다.
나오지 말랬는데 기어이 빨간 코트에 빨강 모자를 쓴 요정이 소리를 지른다.
‘할머니-어서 오- 셰- 요- 오오! 하버지 제 여-깃-어요오!!’
인천대교의 주탑이 오색등으로 우리를 빨아들일 때 집이 가까워 온다는 것을 알았다.
인천대교 야경
<다음은 끝으로 여행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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