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벳부의 모래찜질-1월29일 금요일
벳부가는 길 : 버스정류장 대합실에는 시간이 되면 사람이 모인다. 시간표에는 3시15분인데 10분 전에도 버스가 보이지 않는다. 이러다 휙 지나치면 어떻게 하나? 이 시간이면 벳부로 가는 승객이 짐을 들고 움직일 텐데 아무도 일어서지 않는다. 조바심이 난다. 이럴 때 카운터에 버스가 제 시간에 오나요? 라고 물으면 ‘네!’ 이러면 되는데 상대방은 엉뚱한 표정을 짓는다. ‘왜요?! 안 온다는 정보라도 들으셨나요?’ 마치 자기가 모르는 정보를 갖고 있느냐며 놀라는 표정이다.
극히 정상적인 사회에는 예외가 드물다. 예외는 예외지 다른 방법이 없다. 오슬로에서 열차가 파업을 하고 운행이 중지된 황당한 경험을 했다. 그런데 승객들 누구도 동요하지 않았다. 전광판에 파업을 알리는 문자와 꼭 가야할 사람은 광장에 마련된 버스를 타라는 것!
옛날에 시골 버스가 펑크도 나고 손님이 없다고 운행을 하다가 중단도 하는 경험이 뇌리에 박힌 나는 꼭 한마디 물어서 얼굴을 깎는다. 독일 어린이들은 짜증을 잘 내지 않는다. 세종로 시내버스 정류장의 시간표와 달리 10분이 지나도 버스가 오지 않으니 화가 치미는데 부모는 설득할 말을 찾지 못해 얼굴이 발갛다. 이것은 얼마 전의 실화다.
벳부 가는 길- 마른 풀과 드문드문 잡목이 쓸쓸한 겨울산의 속은 온천물로 뜨겁다.
가는 띠에 감긴 버스가 보이는데 이산을 넘으면 50분 거리에 바다와 벳부가 있다.
시간이 다 되었다. 기다리다 못해 주차장으로 돌아가 보니 버스가 이미 승강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후유!’ 승객은 우리 두 사람뿐이다. 버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떠난다.
한 눈에 들어오는 유후인 마을을 감고 버스는 유후다께[由布岳]를 뱀처럼 감고 오른다. 가까이 억새 그 뒤에 억새밭이 펼쳐지고 잡목림이 듬성듬성 보이고 정상에 해풍에 시달리는 풀과 바위와 나무들이 보인다. 어젯밤에는 저 산이 부처님 이마의 夜光珠처럼 달을 머리에 이고 있었다.
버스는 단숨에 산허리를 돌고 돌아 고개를 넘고 이제 곧 바다가 보일 것이다. 급경사로 올라온 만큼 버스는 급하게 내려간다. 구마모또-아소-유후인-벳부 이렇게 하룻밤씩 자면서 쉬엄쉬엄 가는 이 길이 바로 관광이요 절경이다.
관광안내소 : JR역 서쪽 입구에 내렸다. 방향 감각이 없으니 山쪽이라고 하자. 반대쪽은 바다고 대합실은 동서로 뚫려있으니까...기찻길을 어떻게 건너가느냐고? 기차는 2층으로 지나간다. 대전 KTX를 지하화하자고 한 일이 있었다. 이 사람들은 산비탈을 이용해 기차를 지하로 보내지 않고도 편하게 다닐 수 있고 도시도 양분되지 않았다. 안내창구의 여직원은 컴퓨터를 켜고 어떤 등급의 숙소를 찾느냐고 묻다가 건너편 관광안내 데스크를 소개해준다. 여직원은 뜻밖에 한국어를 잘 한다. 이런 손님들이 많은지 매뉴얼을 펼쳐주면서...
‘아무래도 호텔이 편하지 않으시겠어요?’
호텔 사진과 방과 가격을 그림 지도 위에 붙여 놓았다. 한 호텔방에서 바다가 반 쯤 보였다. ‘정말 바다가 보이는 방에서 잘 수 있나요?’
그렇다고 한다. 집사람 고향은 바닷가요, 나도 오영수의 ‘갯내음’을 실감한 경험이 있다. 일본 사람들은 한국의 소금을 ‘맛이 있다’고 한다. 독일 소금은 머리가 쭈뼛할 정도로 짜다. 일본 소금은 좀 싱겁다. 그래서 한국의 고기가 맛있고 동해안의 생선이 담백하고 기름지며 서해안의 생선과 젓갈이 짙고 깊은 맛이 있는 것일까?
두말할 필요 없이 그 여관을 짚었다. 안내원은 휴일전 요금이 10%정도 비싼데 괜찮으냐고 했다. OK!
두 가지를 더 묻는다.
1. 1 Day Ticket
2. 地獄溫泉-美術館-모래찜질
기다렸다는 듯 두 장의 팜프렛을 꺼내 동그라미를 한다. 버스 노선도와 버스표 사는 곳을 알려주면서 ‘브루-’ 파랑색 버스만 타야한다고 강조한다[뒤에 보니 붉은 띠를 두른 오이따교통도 있었다]. 그리고 지도에 동그라미를 하면서 해변의 모래찜질과 미술관과 온천가는 방법을 알려준다.
‘추워요!’
모래찜질을 표시하면서 떠는 시늉을 한다. 나도 찜질을 할 생각은 없다. 규슈의 남단 이부스키의 모래찜질을 여기서도 한다니-바다에서 뜨거운 물이 솟는다는 것을 믿을 수 없어서 가보고 싶은 것뿐이다. 나는 감사의 인사를 한다.
유리문을 밀고 나오니 벳부역 아케이드 깜짝 쇼핑에 나섰던 집사람의 손은 비어있었다. 광장을 나와 10분이라는 길을 바다를 향해 걷는다.
화랑 쇼윈도에는 칠흑을 바탕으로 미명의 유목민의 우수를 자아내는 100호 정도의 그림이 눈길을 끈다. 길을 다시 건너면서 오른쪽으로 재래시장이 보인다. 알고 보니 집사람은 오뎅이랑 밥 위에 얹어 먹는 후루가게나 인형을 사고 싶어 한다. 내일 오기로 하고 음반가게에서 ‘고죠노스키’가 있느냐고 묻는데 찾지를 못한다. 내일 다시 오겠다고 돌아선다. 집사람은 외손녀와 일본 서민들이 사는 정겨운 모습 - 그런 것을 보고 싶어 한다. 이런 것들이 모두 나이 탓일까? 아니면 사랑일까? 건널목에는 K대 야구선수들이 보인다. 프로선수들의 전지훈련은 봐왔지만 세상이 이렇게 변했나? 백화점 지하도를 건너니 해변 공원이 깔끔하고 그토록 그리던 바다가 보인다. 아침 식권 두 장을 내놓고 선택하라고 한다. 양식과 和食 - 집사람은 양식, 나는 和食 - 방에 들어와 바다와 공원을 바라보며 연방 어렸을 때의 부산을 닮았다고 즐거워한다.
호텔 창무에서 바라본 야경-앞은 해변공원 왼쪽으로 탁 트인 바다가 보인다. 왼쪽으로 돌면 해변 산책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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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와 나 : 공원은 반듯하다. 그 건너에 ‘그대와 나-You Me'라는 네온이 휘황한데 줄지어 차가 옥상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니 분명 대형 마트다. 창으로는 바다가 보이고 욕조의 물은 매끄럽다. 잠시 몸을 담그고 10층의 온천과 옥상의 노천탕을 돌아본다. 이 탕의 물도 철분이 함유되어 있나? 유황냄새를 풍긴다. 이만하면 하루의 피로를 씻기에 충분하다.
여기서 이틀 자고 기차로 구마모또에 돌아가 하루 쉬고 공항에 가면 되니까 짐도 돈도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남은 돈으로 사고 싶은 것을 사게 하면 된다. 공원을 가로 질러 마트의 문을 여니 일본인들의 생활 속으로 들어간 듯 친근해진다. 3층에서부터 내려오며 책과 음반-인형 옷과 기념품 가게 등을 둘러보고 1층에서 바구니를 들고 장을 보기 시작한다.
쇠고기는 좋은 부위가 100g 1,200円인데 우리보다 비싸다고 한다. 쌀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밥값이 비쌀 수밖에...그렇다면 엥겔계수가 높다는 이야기인데...그렇다면 세계 제일의 독서열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그들의 월급이 궁금할 밖에...
집사람은 수고했다고 세일하는 스위스제 겨울운동복을 사준다는데 나는 고개를 젓는다. 이번에는 아사히맥주 여섯캔 한 묶음을 사준다는데 OK! 한 참 있더니 김밥에 미소시루와 조금 기다려 10시의 세일 빵을 대열에 끼어 야무지게 한 살림을 한다. 미소시루는 뜨거운 물에 풀면 되는데 국그릇이 없다. 다시 3층의 기념품코너에서 나무를 깎아 만든 그릇을 두 개 샀다.
영상10도의 겨울바닷바람을 맞으며 돌아오며 저녁은 미소시루를 풀어 김밥을 먹기로 했는데 젓가락이 없다. 중국어로는 ‘콰이즈’가 생각나는데 왜 일본말은 머리에 떠오르지 않을까 하다가 번개처럼 ‘와리바시’ 생각이 난다.
카운터에서 ‘와리바시 두 개만 주세요!’는 처음으로 딱 부러지게 일본말을 하고 또 즉시 얻었다. 유까다를 바꿔 입고 온천물에 몸을 담근 뒤 창가에서 맥주를 마시며 장국에 김밥을 먹었다.
TV에서는 노모를 살인한 패륜아와 또 다른 살인 이야기가 나오고, 벳부의 온천, 오이따의 감귤에 이어 인도네시아 소녀인가 입명관 대학에 다니면서 식당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소녀 이야기가 흘러간다. 물론 눈치 반, 화면 반, 자막 등을 얼버무려 멋대로 보는 것이지만...
벳부 이틀 째 -1월30일 토요일
미술관 앞의 모래찜질 - 나가사키 방송국에서 특집 촬영중인데 아코디온 악사의 옛노래가 머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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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찜질과 미술관 : 새벽에 세면 대신 10층에서 또 잠시 알몸을 물에 담갔다. 히뿌연하게 날이 밝아오고 파도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공원에는 산책하는 사람들...이윽고 어제 보았던 K대학 야구부의 스트레칭하는 구령이 들려온다. 자동차들은 소리도 없이 미끄러지고 갈매기도 울지 않는데 기합소리만 우렁차다.
아침은 매우 정갈했다. 집사람은 내일은 화식을 주문하겠단다. 공원을 잠시 거닐다 호텔을 나선다. 지도를 들고 모퉁이를 돌아 西鐵交通호텔 1층 관광센터에서 하루 버스표를 900円에 두 장을 사고 정류장을 물어보는데 길 건너 왼쪽인지 오른쪽인지 헛갈린다. ‘L’자로 꺾어야하는데 운전대가 오른 쪽에 있으니 우리와 반대쪽이고 그러면 맞는 셈인데 하마터면 반대쪽으로 갈 뻔했다. 이 버스 이름은 ‘가메노이’인데 한자로는 ‘龜[거북이]’다. ‘곰터’인 구마모또나 거북이인 ‘가메’나 ‘上’이나 모두 ‘’이요 신성의 의미다. 오사카 등지에서 오는 거대한 페리가 정박한 선착장을 지나 六勝園에 내리니 바로 미술관 그리고 해맑은 해변 공원에서 가슴이 탁 트인다.
온천은 바로 이 해변공원에 있다. 헐렁한 浴衣를 걸친 사람들이 검은 모래에 누우면 삽을 든 부인네들이 모래를 덮어주고 햇빛을 가리도록 손바닥만한 우산으로 얼굴을 가려준다. 김이 무럭무럭 솟는데 찜질이 끝나면 바로 옆에 있는 욕탕에서 씻어내는 모양이다. 마침 아코디온을 어깨에 걸친 노악사 듀엣이 나가사키 방속국에서 온 촬영팀과 ‘6시 내고향’ 같은 프로를 찍고 있다. 한참을 생방송으로 재미있게 보았다.
벳부시립미술관의 로비-2층의 전시장은 인구 15만의 도시에 알찬 그림을 볼 수 있다.
지금은 아시아비엔나레 전시중-촬영금지지만 아래층에서 한 장의 그림은 찍을 수 있다.
미술관은 현관문을 밀자 환상적이었다. 유리창 가득히 파도가 밀려왔으니까-이 유리창이 그대로 살아있는 그림이었다. ‘벳부 아시아 현대미술비엔나레’를 열고 있었는데 촬영금지 - 1월24일부터 2월23일까지 한 달 동안 전시를 하는데 교육위원회 예술문화진흥회 교육위원회 미술협회에 각 방송국과 신문사 및 대학들이 후원하고 있었다. 하나의 그림을 위해 많은 기관이 힘을 보태는 것이 부러웠다. ‘이또 히로부미의 유체를 발견하다’는 중국신문 위에 애꾸눈의 사나이를 오버랩한 그림 옆에 위안부[Warsito 作]가 나란히 걸려 있었는데 기억에 남는다. 이 그림 옆에 정복의 수위가 부동자세로 서 있는 것이 께름했다. 아래층의 좀 높아 보이는 분에게 그 한 장을 찍을 수 없느냐 물었더니 매우 난처한 표정으로 그냥 현관의 정경이나 한 장 찍으라고 부드럽게 말한다.
아래층 구석에는 민속품과 농기구들이 전시되었는데 한국이나 남방에서 전래되었을 이런 문화가 어떻게 변용되었는지 궁금했다. 圖錄을 한 권 샀다. 다시 해변으로 나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 이 글은 다음 블러그 '주막의등불' 과 까페 'cafe light'에 연재되고 있습니다..
<다음은 지옥온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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