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마모또의 일주일

[10]규슈횡단특급열차

양효성 2010. 2. 14. 23:09

 

 

[10]규슈횡단특급열차 - 1월31일 일요일

 

벳부공원 : 어제 아침 여탕에 두 사람이 있었다는데 목욕을 마치고보니 슬리퍼가 없어졌다고 한다. 무슨 ‘나무꾼과 선녀’도 아니고...카운터에서 손짓발짓 했었는데 여분의 슬리퍼가 없다고 했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보니 슬리퍼가 나란히 놓여 있더라는 것이다.

목욕을 마치고 아침을 먹고 산책을 하는데 부슬부슬 비가 내린다. 이 정도면 곧 그치겠지...오후 3시까지 온다니 구마모또에 도착하면 그치겠지!

 

한 이틀 자고나니 주변이 좀 눈에 들어온다. 바다는 비구름의 열푸른 잠옷을 입고 있어도 아름답다. 산보하면서 혹 다음에 들릴까 싶어 전면이 바다에 노출된 花菱호텔의 객실을 물어 본다. 발코니에 물이 넘치는 원형온천탕이 붙어 있고 파란 바다는 한 눈에 가득하다. 정말 아낌없이 물을 흘릴 수 있는 이 방은 아침, 저녁을 주고 1인당 25,000円이다. 그 옆의 좀 낡아 보이는 淸風호텔도 비슷한 가격이다.

 

            왼쪽에 단정한 일본부인에 비해 ‘나름대로 멋을 부린’ 10대도 아주 가끔은 눈에 뜨인다. <벳부역 앞에서>

 

11시 40분 기차를 탈 때까지 어디 들리기에는 마땅치 않은 시간이다. 일본의 여관이 다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오후 3시 입실에 10시 퇴실이니 5시간이나 공백이 있고 1시간마다 대략 10%정도의 추가요금을 요구하는 것 같다. 물론 입퇴실 앞뒤로 짐은 맡아주지만 방에는 머물 수 없다. 어젯밤 집사람은 야물게 짐을 쌌다. 그리고 내 오리털 잠바를 꺼내주며 걸치라고 한다. 다다미방을 염려해 가져온 이 잠바는 백두산 영하 40도를 견딘 경력이 있다.

10시에 호텔을 나서 지하도를 건넌다. 안내판에 한글로 조금 일찍 나서 처음으로 벳부역 락카에 코인을 넣고 짐을 맡겼다.

 

프래트폼을 확인하고 서서히 산쪽으로 산책을 한다. 비는 오락가락 둘 다 모자를 썼으니 견딜 만하다. 주택가는 면도칼로 자른 듯 단정하다. 큰길가의 천리교회당-100주년인가? 공원까지 그다지 멀지는 않다. 교회를 처음 본다. 전형적 일본식 가옥이 몇 채 보인다. 주차장을 가로지르니 공원은 넓다. 노송은 늘어지고 오른쪽으로 진달래 꽃망울이 빗방울을 머금고 막 붉은 꽃잎을 터뜨리는데 초록 대나무 숲이 그 뒤에 병풍을 둘렀다. 산책하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였다. 대나무 숲은 죽림칠현도 또 서편제의 瀟灑園 대나무 숲을 떠올리게 했다. 금방 거문고 소리와 차향기와 바둑돌 놓는 소리가 들릴 듯하였다. 이곳의 유명한 죽세공예관을 들러보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또 가까이 돌고래쇼도 있고 원숭이방목장도 있다고 들었다. 히로시마 미야지마신사에서 뒤를 쫓아다니던 사슴 생각도 났다.

 

 

그림 벳부 공원 대나무숲-기온이 따스해서 그런지 대가 굵다. 그래서 죽세공예관이 이곳의 관광명소가 되었는지 모른다.

<도심의 벳부공원에서>

 

풍비본선 : 역으로 돌아와 광장을 한 바퀴 도는데 맥주박스를 연단삼아 선거연설을 하고 있고 일요일을 맞아 청년회원들이 모여 ‘아이티를 도웁시다!’는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성의를 보였더니 따끈한 주먹밥을 한 덩이 준다. 그 사이 집사람은 김밥을 샀다. 역에서 파는 따끈한 도시락은 정말 맛있는데 이번엔 어지간히 김밥을 좋아한다.

배낭을 찾고 2층으로 올라가는데 모두 에스컬레이터 시설이 되어있었다. 이어 동화속에서 보던 빨강색 기차가 달랑 두 칸을 달고 미끄러져 들어온다.

기차 바닥은 마루가 깔려 있고 짙은 영국 정통의 감색 투피스를 입은 여차장은 절도가 잇다. 11시40분! 왼쪽 차창에 바다를 가득 싣고 열차는 오이따[大分]를 향해 떠난다. 이 기차는 풍비선 그러니까 옛이름인 이곳 풍후와 비후[웅본의 옛이름으로 히고라고 읽는데 그'히'가 'l' 곧 한국어의 ‘해-日‘이니 이곳에 한국어가 전래되었음을 미루어 알 수 있다.]를 잇는 셈이다.

 

 

 

           구주횡단특급 기관실 창문을 통해 본 열차 - 2칸을 달고 스위치백으로 아소산을 오르내린다. 벳부에서

           구마모또까지 액 3시간 요금은 3천엔 정도.

 

기차는 바다를 버리고 아소산 기슭을 기어오르기 시작한다. 같은 높이라도 섬에서 솟구친 산은 그 경사가 다르다. 바로 海拔 제로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모래산이나 민둥산처럼 보이는 아소의 불구덩이는 얼마나 잔주름을 이 섬에 만들었는가? 용암은 흘러 골짜기를 만들고 거기 물을 흘려보내고 절벽은 가파른데 장난감 같은 기차는 레일위에서 뒤뚱거리지도 않고 부드럽게 미끄러진다. 겨울산을 기차의 차창이 비데오 파노라마로 펼치는 정취는 한가하다. 그 사이 찬 맥주를 한 잔 마시고 아직은 따뜻한 김밥을 먹고 또 커피를 마신다. 언제부터인지 麒麟麥酒會社에서 만든 밀크&커피라는 패트병이 나를 따라 다닌다. 일본의 위스키와 맥주와 우유와 커피가 맛이 있다는 것이 이상한데 부단한 노력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창틀에는 커피병을 올려놓는 홈이 패어있다. 건너편 자유석은 오히려 텅 비어 있고 지정석도 거의 차지 않았다. 창밖엔 소리없이 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고 유채꽃이 피어 있는 것이 이채롭다. 굴을 지나고 또 강을 옆에 두고 달리다가 고원의 마을이 나타난다. 사람이 살 것 같지 않은 절벽의 틈바구니를 비집고 밭을 일구고 또 집을 짓고 사람들이 산다. 그리고 그 몇 사람을 위해 기차는 달린다.

 

시골 汽車는

사람 사는 곳에 선다.

한 겨울에도 

 

이런 생각을 문득 했다. 스위스 우편 박물관에는 암벽등반하는 그림이 걸려 있고 산악 동굴에서 커피를 끓이고 밤을 지새우는 포스터가 있다. 등산이 아니라 우편배달부가 한 장의 엽서를 배달하는 극적인 장면을 그린 것이다. 기차는 가끔 서면서 릴레이 선수처럼 마주 오는 기차와 엇갈린다. 오후 1시8분 다께다[죽전]라는 제법 큰 마을을 지난다. 그 사이 승무원은 밀차를 끌고 간단한 음료를 판다. 2시경 드디어 아소역에 기차는 선다. 불과 사흘 전 버스를 타고 이 역을 찍었는데 이번에는 레일 위에 있다. 오히려 이 높은 곳에 광막한 논밭이 펼쳐져 있다. 골짜기를 지나봐야 이곳이 넓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차는 비안개에 아소를 묻어 두고 내리막을 구마모또로 달린다. 마치 놀이열차를 탄 것처럼 기차는 기울어져 쏜살같이 내려가다가 신호를 기다려 차선을 바꾸고 약 600m를 후진한다. 그리고 2시16분! 다시 전진하기 시작한다. 스카이라인이 달라진다. 지그재그로 가는 이런 기차를 스위치백이라고 하는지? 차창이 수평을 이루며 녹색의 밭을 지나고 도심을 지나고 白川江을 건넌다.

 

 

               마루가 깔린 객차의 바닥과 너른 창문 넓은 의자! 신깐센에 비하는 것이지만 무엇보다 좀 천천히

                    달린다는 것이 마음에 든다. <기차가 관광인 규슈황단 특급열차>

 

  이곳은 규슈의 중심이다. 가고시마나 나가사키 등 다른 곳으로 갈 손님은 프랫폼을 바꿔 기다리고 있는 차를 타라고 안내 방송을 마치며 오후3시에 비 내리는 구마모또에 기차는 선다. 역에는 2일간 규슈열차 자유이용권이 65세 이상이면 둘이서 12,000円인데 3일이면 13,000円이으로 달랑 1000円원만 더 주면 하루 더 이용할 수 있다는 포스터가 있다. ‘푸웃’ 웃음이 터졌다. 노인들이 하루 쉬고 하루 가기도 힘든데 3일간 얼마나 돌아다니겠느냐 싶어서였다. 그러나 차 한 잔 마시면서 사흘간 해변을 따라 차창만 보아도 재미가 있을 것 같았다.

 

택시를 타고 KKR로 직행했다. 그들은 예약을 확인하고 바로 방을 내주었다. 110원 주고 朝日新聞을 한 장 샀다. 509호실에 들어서자 창에 비치는 구마모또 성은 한 장의 그림엽서였다. 부지런히 프런트로 나와 현관에 대기하고 있는 택시를 탔다.

 

다시 구마모또 역사박물관 : 박물관에 이렇게 집착하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이번 여행이 오직 휴양이 목적이라지만 내면에 잠재되어 꿈틀거리는 욕망은 억제할 수 없다. 집사람에게 이 한 시간만은 내게 자유를 달라고 말한다.

나는 기록만 믿고 살아왔다. 서양인들은 몸이 움직인 삶의 흔적에 착안했고 동양인들은 글자의 기록에 집착했다. 그만큼 한자와 그 기록자인 사관이 얼마나 기록에 집착했는가 하는 증거는 事實을 적으며 제왕에게 불복하고 목숨을 바쳤다는 역사적 史實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지금은 고고학을 거쳐 민속과 인류학이 대세다. 이 삶의 축적에서 철학과 윤리와 미학을 찾으려는 보다 구체적이고 경험론적인 태도일 것이다. 그러면 언어는 어떤 자리에 있는가? 한글의 기록은 거의 500년-히라가나는 고려시대 口訣의 영향을 받았다면 천년 남짓...그러나 인간의 입술에 각인된 구전의 기억은 얼마나 될까? 하늘의 태양을 보고 ‘l'라는 기호를 공유한 것은 얼마나 될까? 적어도 고인돌의 시대보다는 앞서지 않았을까? 물론 언어의 전파는 매우 가까운 시대에 인터넷이나 전파를 이용하여 외래어로 전달되기도 하겠지만 그 옛날에는 적어도 외지에 여행한 사람이나 외래인이 전달했을 것이다. 물론 고유어는 외부의 영향 없이 고스란히 전승 보존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은 모든 풍속이 마치 비무장지대의 자연환경처럼 온전하게 보전된 점이 나에게 매력이다. 가락국기에 하늘에서 줄이 내려왔다는 이야기가 오늘 신사에 동아줄이 드리워 종이 울리는 순간에 부활하고 있음을 나는 본다. 그들의 신단과 제관의 복장과 걸음걸이에서 그모든 것을 본다. 언어와 생활이 역사의 실상을 재현해줄 수 있을까? 이것이 나의 의문이고 내가 못 풀면 이런 의문을 후세에 숙제로 남겨주고 싶다.

 

오늘 이 땅의 사람들이 규슈산맥이라고 부르는 척추가 이 섬을 종단하고 있다. 그 북쪽 즉 한국과 가까운 곳에...英彦山 - 중앙에 阿蘇山 그리고 가고시마에 韓國岳이라는 山이 있다. 이 세 산은 각각 히꼬[해]-아소[아침]-가라구니다께[나라]로 읽히는데 아소가 아사- 아자- 아침이라면 ‘해뜨는 아침의 나라[日出國]’라는 말이 된다. 물론 이 세 산에는 모두 나름대로의 신사가 있고 성산이며 주변에는 祖母山 國見山 등등 범상치 않은 이름들이 존재하고 있을 뿐 아니라 능선을 따라 지금도 희미한 길이 보인다. 박물관에서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등 역사적 지층의 줄거리를 잡아가며 이들 언어들에 대입하며 유적지와 대조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민족의 북쪽 가닥인 알타이 연구도 지지부진한 가운데 우리말의 꼬리를 확실히 잡을 수 있다면 알타이 뿌리도 되짚어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한국에서도 이런 연구의 축적은 엄청나지만 寡聞한 탓인지는 몰라도 딱 부러진 것을 아직 보지 못했다.

 

 

 

                             부산 동삼동의 조개탈과 너무 닮은 구마모또 조개탈 <熊本歷史博物館>

 

문제는 하나다! 과연 언어의 역사는 언제부터일까?

박물관은 1층이 자연사 2층에 역사와 민속으로 나뉘어 있다. 우선 선사시대의 역사적 흐름이 궁금했다. 우선 눈에 뜨인 것은 한 장의 지도로 고대에는 한반도가 규슈와 연륙되어 있었다는 것 - 그리고 구석기의 유적지도와 선사시대의 세석기와 토기들 ... 내 눈은 조개가면 앞에서 정지했다.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 상설 전시된 부산 동삼동 ‘조개탈’과 너무 닮았는데 해설에도 그 이야기가 그대로 전시되어 있다. 적어도 약 5천년 전 두 문하권의 교류가 있었다는 것은 인정하고 있는 것인데 그렇다면 어너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천천히 두 문화가 분화도이어가는 봉건시대와 개화기를 지나 민속관에서 의식주 그리고 어로와 농경과 수렵을 대강 훑어보았다. 무엇보다 부러운 것이 열람실의 신웅본시사인데 두 번에 걸쳐 신판이 나온 것이 아닌가 한다. 각각 10권과 8권으로 된 이 책은 부피가 만만치 않았다. 한국사전집과 거의 맞먹는 수준이었다. 더 부러운 것은 그 열람실에서 아이들이 부모와 함께 자료를 검색하는 진지함이었다. 질량의 양면에서 충실한 그 모습은 지금도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1시간은 너무 빨리 지나갔다. 첫날 여기 왔을 때 연구원들은 1페이지 'ㅎ'에 해당하는 ‘ひ’부분의 일부를 복사해 주었었다. 그 책을 볼 수 없느냐고 했더니 즉각 보여주었는데 ‘角川日本地名大辭典 43卷 熊本編1’이었고 昭和 62년에 출간된 것이었다. 다시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학예원 노리꼬 양이 퇴근시간을 마다 않고 조언을 해주었다. 그는 고구려와 한반도의 瓦當을 전공한다. 因緣이 이어졌으면 한다. 규슈를 일본 문화의 할아버지요 아버지라고 나는 부른다. 선사시대에 대륙의 문화가 그곳에 갔고 개화기에 나가시마의 데지마[出島]를 통해 서구문화가 들어갔다. 하멜이 가려던 곳도 제주도가 아니라 나가시마의 데지마였다. 도록을 한 권 사고 산책하던 집사람이 돌아와 함께 직원전용문으로 퇴근했다.

 

구마모또는 봄비에 젖어 :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오후 3시까지 비가 온다는 말은 아소의 저편 벳부 이야기였을 것이다. 날이 저문 古城에는 택시가 없다. 다행히 130원을 주고 차체에 고성의 지도를 만화로 그린 순환버스를 타고 이번에는 가미도리[上通]에서 내렸다. 지난번 시모도리[하통]에 비해 백화점 등 이곳은 더 화려했다. 서점을 둘러보고 백엔샵에서 우산을 사고 잔돈을 썼다. 叶家는 문을 닫았다. 다시 우동집을 찾아 이번에는 소매를 끌고 정문의 포스터를 가리켜 새우튀김이 들어간 것과 오뎅이 들어 있는 국물이 있는 우동을 시키고 생맥주를 시원하게 마셨다.

비에 젖는 구마모또의 성은 아름다웠다. 거리는 조용한데 성 아래 호텔 옆 공원에 있는 신사는 마쯔리로 불빛이 환하다. 성벽은 무서울 정도로 인적이 없다. 못내 호텔방에서 바라보는 구마모또성의 경치가 아쉬운 집사람이 한 마디 한다.

‘결국 세 시간 보는 것이구먼!!’

그런 방문을 열고 보니 솟구치는 야경이 더 아름다웠다. 집사람은 창가에서 떠날 줄을 모른다. 집사람은 아소에서 온천을 한 뒤 속병이야기를 더 하지 않는 것이 신기하다.

‘정말 괜찮은가?’

‘그럼요!’

이집 물도 내게는 온천과 다를 것이 없다. 반신욕을 하고 땀을 씻었다.

 

차를 마시며 창밖을 바라보다 朝日新聞의 TV 프로그램을 훑어본다. 이 이야기를 일본에 대한 찬미로 발아들일 사람이 많을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원한은 결국 당사자끼리 풀게 되지만 우선은 객관적 거리를 두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으로 우선 느끼는대로 보자는 것! 다른 하나는 우리 조상의 흔적이 여기 있다는 것인데 그 변화의 요인이 무엇인가 하는 것!

 

 

 

                               古城은 봄비에 젖어 - 겨울밤은 빨리 찾아온다. 더구나 비가 오는 날에는...

 

1월31일 NHK1에서는 저녁 9시 3만2천 명이 연고가 없이 고독하게 홀로 죽어가는 현실을 고발하는 1시간짜리 프로가, NHK2에서는 90분짜리 한일관계 특집이 방송되고 있는데 벌써 9-10회니 대형 프로젝트다.

오후3시 日本と朝鮮半島二千年<9> 朝鮮通信使-和解のために

오후10시 日本と朝鮮半島二千年<10> “脫亞”への道“坂の上の雲” が描か朝鮮進出かなかった征韓論から日淸戰爭へ▽福澤諭吉が支援した朝鮮王朝の留學生たち大桃美代子

 

조선통신사 문제는 부산시에서 문화사업회를 추진한지 오래니 홈페이지를 들쳐보면 될 것이고, “坂の上の雲”는 司馬遼太郞[시바료따료]의 소설로 ‘언덕위의 저 구름’으로, 또 ‘료마가 간다’와 함께 ‘後大望’이라는 이름으로도 묶어서 출판된 바 있다. 료마는 지금 NHK 8시 연속극 ‘龍馬傳’으로 인기를 모으고 있다. 福澤諭吉[후꾸자와 유끼지]는 聖德太子를 대신하여 대신 지금1만원권 지폐의 모델.

 

자정이 되면서 구마모또 성의 불도 꺼지고 맥주잔도 비었다.

 

<다음은   집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