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통신사 공식행로(朝鮮使行路) - 물길
통신사일행은 대개 여섯 척의 배를 운용했다. 세 척의 배는 정사, 부사, 종사관과 그 수행원 그리고 짐을 실은 세척의 배...선조이후 공식적인 12차례의 사행에서 여섯 번째인 1655년 효종6년의 사행에는 정사 조형의 부상일기와 종사관 남용익의 부상록이 전한다.
조형은 화방누선설(畵舫樓船說)이라는 글로 꽃그림을 그린 누각이 있는 배(?)를 묘사하고 있다. 길이가 40尺이고 넓이가 15尺이라니 어림잡아 12m×4.5m정도인데 이 배안에 150명의 인원이 몇 달동안 함께 생활을 할 수 있었다니?! 얼핏 상상하기 힘들다.
배 중앙은 좌우로 두 줄로 나누어 연꽃을 희고 붉은 칠을 한 방을 만들고 지붕의 다락에 난간을 둘러 배에서 일어나는 일을 살피게 했다. 방의 좌우 통로에 판자를 깔아 사공들의 왕래를 돕고 그 사이에 노를 설치했는데 좌우 합해 16이었다니 최소 격군[노젓는 인부]가 그만큼 있었다는 이야기인데 7차 숙종8년의 정사가 탄 제1선에는 30명의 격군이 타고 있었다.
문제는 이 배가 현해탄을 거쳐 대판까지 간 다음 다시 부산까지 되돌아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의 바다도 낯선데 일본의 해로를 그 시기에 어떻게 우리 선조들은 파악하고 있었을까?
통신사들은 前輩의 기록들을 몇 번이고 되짚어 보고 다시 새겨보고 했을 것이다. 물길은 몇 리나 되나?! 신숙주의 해동제국기에는 3,230里라는 기록이 보이고 이는 19세기말?까지 통신사의 기록에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다. 일본 이수로는 323里- 조선이수로는 3,230里.
부산포에서 대마도 都伊沙只까지 48리
都伊沙只→船越浦 19리
船越浦→壹岐島 豊本浦 48리
豊本浦 筑前州 博多 38리
博多에서 長門州의 赤間關[오늘의 下關 : 시모노세키]까지 30리
*豊本浦에서 赤間關 직행 46리
赤間關에서→ 竈戶關[四國]까지 35리
竈戶關→ 尾路關 35리
尾路關→ 兵庫關 70리
兵庫關→ 王城[京都]까지는 18리
이수를 합계하면 수로가 323里요 육로가 18里, 우리나라이수로는 수로가 3,230里, 육로가 180里임.
왕성은 당연히 동경 즉 에도가 융성하기 전 천황이 주재하는 京都를 일컫는 것인데 신숙주 생전에는 일본의 봉건 시대로 여기 저기 일본의 다이묘(大名)들이 중구난방으로 조선의 조정에 줄을 대고 있었으니 임란 이전 조선외교사절이 일본의 각지를 방문한 것만 62차례나 되었었다.
화방누선(畵舫樓船) 즉 꽃그림을 그린 호화외교선인 이 배는 생각만큼 단단하지 않아 제3선의 종사관 남용익은 대마도 앞바다에서 홍역을 치르게 되었다.
5월27일 해신제를 치르고도 순풍을 기다리다 6월9일에야 돛을 올리는데...1백여리쯤 가다가 ... 키(柁)가 부러졌다. 고쳐 꽃고 부지런히 앞의 여러 배를 따라 가는데...물마루를 지나며 또 꺽여졌는데...풍파가 더욱 급하여 소리는 뇌성이요...높기는 산과 같았다.
결국 배밑에서 솟구치는 물로 예물이 젖는 수라장을 겨우 수습하며 일방 대마도 왜선의 구조에 힘입어 지지견포에 불시착하게 된다. 이후에도 세 바다, 즉 부산-대마도, 대마-일기도, 일기-남도를 거쳐 겨우 세도내해에 들어서며 안정을 찾게 된다.
一衣帶水니 隔海相望이니 아무튼 현해탄은 공포의 바다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 바다를 직선으로는 요즘 약 200Km라는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오사카에서 동경...오사카에서 시모노세키 이웃 모지(門司)까지 等距離라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있다.
...오사카에는 메이지시대에 도로원표의 기준이 되었던 高麗橋라는 다리가 있다고 한다. 고라이[高麗]나 구다라[百濟]는 당시 선진국-외래인-외제-명품 등등의 일반명사가 되어있지 않았나 싶다. 백제교....백제소학교에 이르기 까지...
아무튼 오사카의 도로원표[梅田新町]에서 동경의 니혼바시(日本橋)까지 543Km, 후쿠오카의 모지[門司]까지는 534Km이니 오사카는 이 두 구간을 양분하는 셈이고 또 후쿠오카에서 부산까지 직선거리가 209Km라면 이래저래 서울에서 동경은 약 1,7-800Km쯤 되는 셈이다.
서울-부산과 후쿠오카-오사카, 京都-東京의 세 구간의 거리가 비슷하다면 부산과 후쿠오카의 대한해협만 남는 셈인데 당시의 항해실력으로도 아마 하룻밤 하루 낮이면 건너갈 거리라 할 것이다...물론 바람만 도와준다면!
대마도는 부산사람에게 일일생활권이 된지 오래고...후쿠오카나 시모노세키까지 대략 3-4시간이면 도착할 거리이다.
우선 이 뱃길을 오사카에서 부산까지 항해한 요즘 사람들의 블러그에서 만나보면...대충 700킬로의 거리를 3일만에 요트로 항해를 했다는 것인데,.. 남용익은 효종6년 1655년 종사관으로 약120명의 원역을 이끌어 제3선을 타고 오사카까지 항해를 하게 된다.
6월9일 부산포를 출항하여 당일 지지견포에 표류한 뒤 7월21일에야 대마도를 떠나 일기섬을 거쳐 9월5일 대판에 통신사선을 묶어 놓고 육로에 올라 에도까지 다시 500Km를 가게 되는 것이다.
그는 도로이수라는 항목에 뱃길을 적어두고 실제 여행할 때는 그 항구들을 지나치기도 하고 배에 주로 묵었지만 때로는 준비된 숙소(館)에 잠자리를 펴기도 했었다. 다음의 표를 자세히 살펴보면 그의 뱃길 여행 대강을 그려볼 수 잇을 것이다. 그는 이 뱃길에서 무수한 시를 남기기도 했는데 다음기회로 미루어 둔다.
이 뱃길로 고생을 하고 있을 때 최항순교수(서울대 조선공학 : 학술원회원)가 ‘통신사선 복원에 대하여’, 畏友 박완배 형이 항해의 경험을 살려 ‘조선통신사 해로’ 작성을 도와주기로 하였다. 이 두 분의 이야기를 소개할 기회가 있었으면 한다. <*>
조선통신사공식행로 [수로구간]*남용익 경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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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효종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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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
漢字 |
왜말 |
리수 |
누적 |
日 |
日 |
月 |
宿 |
|
|
州 |
港浦口 |
吏讀 |
|
|
着 |
發 |
|
|
|
|
|
釜山浦 |
|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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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6 |
|
|
* |
|
志志見浦 |
施施米于羅 |
530 |
|
9 |
13 |
|
뭍 |
不時着 |
1 |
對馬島 |
顎浦 |
完老於羅 |
480 |
480 |
13 |
14 |
|
館 |
|
2 |
西泊浦 |
尾申道萬里 |
동30 |
510 |
- |
- |
|
- |
| |
3 |
左賀浦 |
沙可于羅 |
남110 |
620 |
14 |
15 |
|
배 |
| |
4 |
船越浦 |
後羅古施 |
남30 |
650 |
- |
- |
|
- |
投米祭 | |
5 |
住吉灘 |
加毛世 |
남40 |
690 |
- |
- |
|
- |
漁村朝飯 | |
6 |
府中浦 |
後主于于羅 |
남60 |
750 |
15 |
21 |
7 |
館 |
長壽院 | |
7 |
平戶島 |
壹岐島 |
益其老施馬 |
동남500 |
1250 |
21 |
26 |
|
館 |
新築館舍 |
8 |
筑前州 |
藍島 |
我伊老施馬 |
동북350 |
1600 |
26 |
4 |
8 |
館 |
新築館舍 |
9 |
長門州 |
赤間關 |
施毛老西其 |
동240 |
1840 |
4 |
13 |
|
館 |
阿彌陀寺 |
10 |
元山 |
毛刀野馬 |
동70 |
1910 |
- |
- |
|
- |
*5-60戶 | |
11 |
向 |
武古于 |
동110 |
2020 |
13 |
14 |
|
배 |
*6-70戶 | |
12 |
宮洲 |
未也數 |
동90 |
2110 |
- |
- |
|
- |
*수십호 | |
13 |
室隅 |
武老苦未 |
동30 |
2140 |
14 |
15 |
|
배 |
姬,奴生,湯 | |
14 |
周防州 |
上關 |
加未老西其 |
동50 |
2190 |
15 |
17 |
|
뭍 |
樓閣 |
15 |
賀室 |
加無老 |
동70 |
2260 |
- |
- |
|
- |
| |
16 |
津和 |
卽訛 |
동50 |
2310 |
17 |
18 |
|
배 |
| |
17 |
加老島 |
加老島 |
동30 |
2340 |
- |
- |
|
- |
여울급물살 | |
18 |
安藝州 |
鎌刈 |
可亡加里 |
북50 |
2390 |
18 |
21 |
|
館 |
*風雨不順 |
19 |
高島 |
多可施馬 |
동90 |
2480 |
- |
- |
|
- |
| |
|
*忠海 |
|
東100 |
- |
21 |
22 |
|
배 |
*逆風 | |
20 |
田島 |
多施馬 |
동80 |
2560 |
- |
- |
|
- |
| |
21 |
備後州 |
鞱浦 |
刀毛 |
동북30 |
2590 |
22 |
24 |
|
館 |
福禪寺 |
22 |
白石 |
施羅伊施 |
동북30 |
2620 |
- |
- |
|
- |
| |
23 |
下津 |
施毛注 |
동70 |
2690 |
- |
- |
|
- |
*100여호 | |
|
|
*염표 |
|
東40里 |
- |
24 |
25 |
|
배 |
*風勢潮水 |
24 |
肥前州 |
牛窓 |
于施萬刀 |
동100 |
2790 |
25 |
26 |
|
館 |
本蓮寺 |
25 |
幡摩州 |
室津 |
無老注 |
동100 |
2890 |
26 |
30 |
|
배 |
관사 |
26 |
明石 |
阿可伊施 |
동130 |
3020 |
- |
- |
|
- |
| |
27 |
攝津州 |
兵庫 |
表雍古 |
동50 |
3070 |
30 |
5 |
9 |
館 |
관소 |
28 |
|
大坂城 |
五朔盖 |
북130 |
3200 |
5 |
11 |
|
館 |
本願寺 |
29 |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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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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住吉灘=鴨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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壹岐島=加沙毛道/風帆浦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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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 가까이 대마도에서 장수원, 船上, 해안사 등에 머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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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과 潮水의 영향으로 지체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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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목이 부러지고 교체하는 일이 빈번함 |
도모노우라[鞱浦]의 등대
일기도의 통신사숙소 舊址
일기도의 선사시대 유적
적간관-시모노세키의 통신사 도착지
겸예에서...영천문화의 달
도모노우라의 복선사 앞 ... 醉仙島
우시마도(牛窓)의 本蓮寺
우시마도의 통신사 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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