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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명필- 피자간판[심양의 추억]

양효성 2012. 1. 28. 15:51

 

                      중국의 명필- 피자간판 [심양의 추억]

 

랴오닝[遼寗]대학의 구내아파트에서 1년간 지낸 일이 있었다.

 

  교수아파트 : 중국에서 본 간판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간판은 랴오닝대학 구내의 한 피자집 이었다. 간판만큼이나 稀罕(희한)한 것이 그 피자집이었는데 설명이 좀 복잡하다. 모두 다 알다시피 중국의 대학은 학생 교수 교직원이 모두 한 울타리에서 먹고 자고 공부한다. 심지어 학교를 찾아오는 학부형이나 손님도 마찬가지다. 학생은 기숙사에서 교수와 직원은 아파트에서 생활하고 식당도 여러 군데에 여러 층이 있다. 교수 아파트[公寓]의 크기도 여러 종류인데 젊은 교수는 당연히 12-3평 정도의 방 2개, 자녀를 기르고 부모를 모시는 중년층은 방3개의 2-30평 정도, 그러다가 노교수가 되어 아이들이 출가하고 모시던 부모님이 타계하면 다시 방 두 칸 정도의 작은 집으로 옮겨 종년퇴직이 된 뒤에도 그 집에 그냥 산다. 한 교수의 생활이 그의 학식과 함께 오롯이 그 캠퍼스에 남는 셈이다.

 

이러던 교수아파트가 개혁개방 이후 교수들에게 분양을 하고 급기야 신축되는 근교의 멋진 아파트로 이사를 하면서 교수아파트에 민간인들이 들어오게 된 모양새다.

 

없는 것이 없는 가게 : 각설하고 나는 승강기가 없는 7층 아파트의 방 두칸짜리 1층을 1년간 세로 살게 되었는데 어느 봄날 옆집에 가게가 차려졌다. 기이한 이 아파트는 입구에 들어서면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마주보고 정면에 그리고 좌우에 각각 하나 씩 3세대의 출입문이 있다. 중앙을 중심으로 좌우대칭의 집은 같은 구조로 출입구에 부엌 겸 손바닥만 한 거실이 있고 방 둘이 길게 잇대어 남북으로 각각 하나의 창문이 달려 있다.

이웃집 주인 즉 벽을 사이에 둔 이웃[隔璧(gé-bì)]은 여기 가게를 차렸는데 1층이 좋은 값으로 팔리는 이유가 여기 있었다. 연필-공책-휴지-치솔-샴푸-모기향-콜라-맥주[이 동네 맥주 이름은 雪花였던가? 매우 낭만적인 이름이었다]-각종 담배와 라이터 등등 없는 것이 없었다. ‘세상에 있는 물건은 다 판다’는 런던의 백화점이 떠올랐다. ‘코끼리도 살 수 있다’던 그 백화점은 들어가 보지는 않았지만 외양은 그럴 듯도 했다.

 

  북경자전거 : 나는 중고 자전거도 파느냐고 농을 건넸다.

  ‘번츠(Benz를 그렇게 발음했다)?!’

하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문 앞에 세워 둔 펑크 난 자전거를 가리켰다. 아무튼 나는 그 자전거를 60위엔 쯤 주고 샀고 그가 지시하는 대로 아파트 모퉁이에 가서 타이어를 10위엔 쯤 주고 갈아 신나게 대학구내를 휘젓고 다녔다. 튼튼한 열쇠까지 달려 있던 愛馬는 그 시대에는 누구나 그랬듯이 ‘需要가 供給을 導出한다’는 경제논리에 따라 보다 절실한 수요자의 손으로 넘어갔다. ‘전봇대에 자전거를 묶어 두면 전봇대까지 뽑아간다’던 괴담은 거의 비슷했다.

  ‘혹시 내 번츠 못 보았나?’

  ‘그러게- 남의 눈이 띄는 차는 모는 법이 아니라니까?’

그는 내게 老莊思想을 演繹한듯 한 處世術을 일깨워주었다. ‘자전거 도둑’이라는 이태리 영화를 떠올리게 하는 ‘북경자전거’라는 영화가 있었다. 나는 그 새로운 소유자가 내 자전거로 가치가 있는 창업을 하도록 기도했다.

 

중국피자 : 그는 내게 맥주를 상자로 배달했다. 그리고 또 상자가 빈 병으로 가득 라면 새로운 상자로 바꿔주었다. ‘맥주!’ 이렇게 소리치면 ‘오케이’하면 그만이었고 월말에 계산하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집에 상품이 하나 더 늘었는데 피자를 지져[?] 팔기로 한 것이다. 강의실에 칠판 대신 스크린이 설치되어 대부분 파워포인트로 수업이 진행되자 이 친구는 헌 칠판을 한 장 얻어왔다. 그리고 ‘正宗燻肉大餠’이라고 力拔山氣蓋世의 기개로 개업간판을 써 내려 갔다. 正宗은 일본 술 이름이 아니라 정통이라는 뜻이고 燻肉은 아마 熏劑고기를 말함이고 大餠은 큰 밀떡이라는 뜻인데 한국-러시아-일본-미국-터키-아프리카 등등 온갖 유학생들이 지나가는 길목에 이 밀떡에 ‘중국식 피자’라는 해설을 덧붙였다. 曰 - ‘中國式 比薩’ - 比薩(비살)의 倂音은 [bì-sā]로 강하게 발음하면 ‘삐짜’정도로 읽힌다.

 

중국인들은 낙천적이다. 1푼이라도 남으면 장사를 한다고 한다. 또 끈기가 있다고 한다. 이 친구는 가게로 방 하나에 주방을 쓰고 있으니 생활공간은 입구의 반대편에 있는 방 하나가 전부다. 거기 노모를 모시고 있다는 것은 뒤에 알았다. 당연히 아내가 있었는데 그 방에 기숙사에서 사용하는 이층침대가 놓여있는 이유였다. 얼마 뒤 피자를 지지던 아내가 잠시 안 보여 물었더니 아기를 낳으러 병원에 갔다고 하더니 이내 건장한 아들을 안고 돌아왔다. 몸조릴 하는 동안 이 친구는 중국식 정통 피자를 지지고 한 손으로는 물건을 팔고 또 입으로는 싱글벙글하였다.

 

그의 간판에는 열정이 보이고 필세는 강인하다. 가족을 위해 혼신을 다 해 쓴 그 글씨를 나는 東坡나 王羲之의 글씨보다 더 좋아한다. 그 백묵으로 쓴 글씨가 여름 장마에 씻겨나가고 빛은 바래서 지금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리고 세월이 가고 : 요동반도를 가로지르는 5월의 바람은 따스했지만 난방이 끊기고 땅에서 올라오는 냉기는 견디기 어려웠다. 그 아파트는 방습 보온 등 기초를 제대로 하지 않고 땅위에 그냥 마루를 깐 셈이었다.

‘4-5월이 견디기 힘들 겁니다.’ 집주인의 염려는 사실이었다. 나는 다가오는 겨울을 생각하고 건너편 4층의 좀 더 넓은 집으로 이사를 했다. 그리고 急就章 번역에 전념하면서도 이 친구와의 거래를 끊지 않았다. 물 흐르듯 세월은 가고 급취장은 그런대로 출판이 되었다. 이 책을 들고 있으면 그 친구생각이 책 위에 덧칠해지곤 한다. <*>

 

    

그는 심양의 내 이웃이었다.

 

정통 중국 빈대떡이라는 글자를 칼로 새기듯이 써내려가는 눈빛에는 가족을 먹여살려애한다는 의지가 충만하다.

 

그는 한 칸 방에 아이와 노모와 아내와 함께 살면서 부엌에 가게를 차렸다. 이 길은 대학의 북문으로 이어진다. 

 

 

 

이사하기 전의 뒷방

 

이사한 집에는 비교적 큰 거실이 있고 두 개의 방이 있는데 그 하나를 연구실로 꾸몄다.

 

방이 추워 이동식 난로를 놓고 침대는 참고서적을 늘어놓는 간이 책상으로 쓰고...

 

정작 침실이 생겼는데 창밖으로 교수아파트의 외양이 조금 보인다.

 

날짜는 거침없이 가고 일은 더디고... 

이 또한 꺼비인 曾子의 후손은 사전을 찾는 일에 탁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