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돌을 찾아서

고인돌2-모현지석묘[경기도 용인시]

양효성 2010. 5. 18. 14:04

 

 

         고인돌2-모현지석묘[경기도 용인시]

 

 

 

고인돌은 돌을 고여 놓았다는 말을 줄인 것인데, 북방식에서는 굄돌이 있고 장방형으로, 즉 네모의 공간으로 막는 막음돌이 있고 그 위에 뚜껑으로 덮개돌이 있는 비교적 단순한 구조물이다.

이 위에 흙을 덮으면 땅을 파고 시신을 모시는 요즘 흔히 보는 무덤 형태가 되는 것으로 보아 고대의 무덤일 가능성이 크다. 몇 년전 랴오닝 박물관에서 본 고인돌은 완전한 석탑 형태로 마치 석가탑의 1층을 잘라낸 듯한 모양이었다. 이에 비하면 강화의 지석묘는 인공이 거의 가해지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돌을 사용한 것인데...

 

 

용인시모현면왕산리498번지 외대가는 입구 냇가에 고인돌은 있다

 

좀 더 가까이 가보면 4미터가 넘는 거대한 두 개의 돌을 발견하게 된다. 

 

 

 

한강의 샛강인 경안천에서 본 이 고인돌은 정말 당당했다.

주변은 작은 공원으로 꾸며 이곳의 풍수가 자연그대로 인간이 살기 좋은 선지자의 땅이었음을 느끼게 한다. 역사 있는 곳에는 까닭이 있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한다.

 

다음 백과를 참고하면, 고인돌은 계급분화가 시작된 청동기 시대에 주로 만들어졌으며,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으로 추정되는데, 돌화살촉이나 간검돌, 민무늬토기, 청동 제품 등이 주요 부장품으로 발견된다고 한다.

 

다만 많은 고인돌에서 부장품이 아예 출토되지 않거나, 있어도 매우 미미해 이차장(二次葬) 또는 세골장(洗骨葬 : 1차로 가매장하여 살을 썩혀 없애고 뼈만 추려 묻는 장례)용의 무덤일 가능성도 추측된다고 하는데, 북방 민족들이 鳥葬(조장), 즉 시신을 도끼로 쪼아 독수리가 살을 발라냄으로써 부패를 막게 하는 방법인데 아직도 경상도의 일부에 화장한 고인의 재를 쌀밥에 비벼 산에 뿌려서 새들이 먹고 하늘로 날게 함으로써 昇天(승천)-往生極樂(왕생극락)의 기원을 하는 것을 보면 더욱 덮개돌 위에 시신을 안치하는 洗骨(세골)의 장소로 보는 설에 무게를 느끼게 한다.

 

중국에서는 고인돌을 ‘석붕(石棚)’ 또는 ‘대석개묘(大石蓋墓)’라고 부르는데, 켈트어(북아일랜드 언어로 영어의 고유어)로는 탁자란 뜻인 ‘Dol’과 돌이란 뜻인 ‘Men’이 합쳐져 ‘돌멘(Dolmen)’이니까 현대 영어로는 당연히 ‘Table Stone’이다. 한반도의 민간에서는 큰돌을 ’독’이나 ‘바우’라 함으로 ‘독바우’, ‘바우배기’, ‘독배기’, 모여있는 모습이 장기알 같다고 ‘장기바우’라고도 불린다 한다.

 

내게 관심이 가는 부분은 제주도와 울릉도를 포함한 한반도 전역에서 고인돌이 발견된다는 점인데 무엇보다 북쪽으로 지금의 중국 요동반도 일대와 길림성, 절강성에, 남쪽으로 일본 규슈 북서부에 고인돌이 있다는 점인데 나의 상상적 문화지도의 문명이동로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언어도 이런 길을 따라가지 않았겠는가? 더 멀리 러시아는 물론 뱃길 따라 인도네시아, 인도에서도 고인돌이 발견된다고 한다.

 

호남지방의 2만여기를 비롯하여 세계고인돌의 절반 이상에 해당되는 약 4만기의 고인돌이 있다니 그 숫자가 문헌이 남아있지 않은 역사 이전 한반도의 살림살이의 규모를 웅변하지 않는가?

전남 화순, 전북 고창 및 인천 강화의 고인돌들이 200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되었으며 그밖에 평양, 한반도 중남부에 위치한 고인돌이 세워진 연대는 대체로 기원전 11세기 이후로부터 철기 시대 이전의 기원전 3세기까지의 시기에 집중되며, 요동 지방은 그보다 앞선다고 한다.

 

 

 

왼쪽의 고인돌은 주저 앉아 납작하지만 ...

 

오른쪽은 고임돌이 반듯하고 앞은 막음돌이 유실되었지만 뒷부분은 꼭 닫혀 있다.

이 형태로 앞뒤가 뚫린 강화도지석묘의 원형을 유추할 수 있지 않을까?

 

 

 

청동기시대의 연대를 어떻게 보아야하는가?

어제 일도 잊어버리는 나에게 수백 년을 상상하기란 정말 힘든 일이다.

물론 이 돌은 수억 년의 세월을 이긴 것이다. 이 돌을 인간이 어떤 목적으로 이런 형태로 옮겨 놓은 것이 몇 년 전이며 그 기준을 어떻게 현대인들이 보느냐 하는 것인데,

 

참고로 다시 다음 백과에 의하면

 

민무늬토기와 간석기를 중심으로 이룩된 문화를 민무늬토기문화[無紋土器文化]라고 하는데, 이것은 앞 시기인 신석기시대를 가리키는 빗살무늬토기문화와 구분되며 넓은 뜻으로는 청동기시대를 포함하고 있다. 청동기 분포지역은 대체로 동검을 기준으로 문화권을 나누어 비파형동검이 많이 나오는 랴오닝[遼寧] 지역까지를 예맥문화권(濊貊文化圈)으로 설정하고, 이 지역을 고조선 영역으로 보고 있다니 이 범위에서 우리 유전자에 남아있는 문하의 흔적을 상상해보아야 할 것이다. ...

 

랴오닝 지방에 있는 우가촌(于家村) 유적의 위층에서 발견된 청동단추·청동날개촉·청동낚싯바늘 등은 의주 신암리유적의 위층에서 나온 청동유물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이러한 청동기문화의 기원문제는 중국 상문화(商文化)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견해도 있지만[이 시대의 청동기는 중국 박물관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어마어마하다.] 청동기 성분을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아연이 섞여 있는 점으로 보아 중국과는 달리 시베리아 청동기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청동칼의 자루머리에 동물 모양의 무늬가 장식된 점, 꼭지달린 단추 모양 장식, 안으로 굽은 청동손칼 등 청동기의 모양과 무늬에서도 시베리아 카라수크 문화와 깊은 관계가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니 그 맥을 잡아 가는 것에 호사가들의 관심이 집중되지 않을까?

 

아무튼 이 장소는 아이들과 거닐며 쉬며 상상하고 명상하기 좋은 장소다. <*>

 

 

 

자세한 것은 안내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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