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돌을 찾아서

仁川의 고인돌 - 나를 교도소로 보내다오!

양효성 2010. 4. 27. 19:25

 

 

仁川의 고인돌 - 나를 교도소로 보내다오!

 

                                                 * 이 글은 2009년11월24일 인천경향 독자투고란에 실린 글의 초고다.

 

인천의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가 항간의 화두다. 어느 도시건 시청이 도시의 중심인데 이전설이 나돈 지 오래고 조선조의 시청인 관아도 문학산 자락에서 갈수록 초췌해지고 있다. 산성이 있다는 인천의 鎭山(진산)인 문학산에 언제 올라보았는지 기억에 없다.

 

새롭게 성장하는 도시여서 그런지는 몰라도 내가 살아온 지난 30년 신포동-주안-부평역으로 번화가가 이동하다가 멀리 계양산으로 가는가 싶더니 강남 흉내의 연수동으로 휙 돌아와서 송도가 들썩이더니 벌써 청라이야기가 고개를 들었다. 이런 환경에서는 쫓아가는 시민도 앉아있는 시민도 편안하게 살 수 없다.

‘언제 우리집이 헐릴지?....언제 창문의 태양이 가려질지?!...아이의 친구가 갑자기 사라질지?!’

 

인천은 정치, 공업, 역사, 문화교육, 금융, 물류, 교통, 관광, 휴양 등의 도시특성 가운데 어디에 동그라미를 하고 또 몇 점을 주어야할까?

‘인천의 중심이 어디냐?’

이런 질문에 쉽게 대꾸할 시민이 과연 얼마나 될까.

‘인천 시민인 너는 인천이라는 보금자리에 행복한가? 너희 2세들이 여기 뿌리내리기 바라는가?’

이런 생각을 정리하러 맨 처음 정을 붙였던 신포동을 걸어보았다. 도시관광이 유행하면서 차이나타운에 어김없이 대형관광버스가 서고 구수한 사투리로 가이드는 인천 사람들도 잘 모르는 대불호텔 자리 안내판을 읽어주고 조계에 대한 설명을 한다. 그들은 자유공원에 올라 맥아더 동상을 우러르고 고개 숙여 자장면을 먹고 개항 100년을 되뇌이며 돌아갈 것이다. 그 근대화는 매우 수동적인 그리고 소극적인 우울한 느낌을 준다.

 

다시 생각해보면 도시나 인간이란 결국 ‘역사와 전통이라는 시간을 공들여 쌓아가는 보석의 탑’같은 것이다. 다시 청량산 기슭의 박물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거기서 강화의 구석기 유물인 多角面圓球라는 주먹돌을 보자 ‘아! 우리는 만년의 역사를 가진 시민!’이라는 자부심이 생겼다. 문학야구장에는 백제시대에 돌을 다듬어 물길을 튼 도랑도 있었다. 1989년 함부르크를 찾았을 때 ‘개항800주년’행사에 들러 보트로 내항관광을 했었다. 녹청자 도요지와 소래산의 물길을 보면 능허대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開港千年(개항천년)이라는 생각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박물관을 나서며 인천광역시 박물관·미술관 안내지도를 얻었는데 세어보니 대략 20곳이나 되었다. 그러나 인구15만 스위스 국경도시 베른에는 그 수가 30개를 넘었고 무엇보다 그 내용이 풍부했다. 일본의 시골마을 구라시키(倉敷)의 개울가 한 블록에도 그 같은 박물관과 미술관이 있었다. 안내데스크에서는 지난 1년간 10만명이 다녀갔다고 한다. 그 가운데 관광객도 있을테니 인천시민이 모두 이 박물관을 보려면 30년이 걸릴 것이다.

 

 

자유공원을 거쳐 송도로 이사를 다닌 고인돌은 해가 바뀐 2010년에도 컨테니너박스 모서리와 주차장 곁에 드난살이를 하고 있다.

검찰청에서는 돌려달라고 하는데도 말이다. 

 

 

 인천에 첫걸음을 디뎠을 때 인천역사의 1페이지 ‘학익동의 고인돌’이 어디 있는지 궁금했었다. 결국 달랑 들려져 제물포구락부로 이사를 갔다가 다시 송도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유적유물은 제 자리에 있을 때 의미가 있다. 무슨 재개발 불량주택도 아니고 그 크기가 인천시청만큼 큰 것도 아닌데 겨우 ‘합판 한 장 넓이’의 땅이 아까워 교도소를 새로 지으면서 그렇게 ‘달랑’들어 옮길 수 있을까? 일본교과서 역사왜곡 문제가 불거지면 민관 네티즌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선다. 더구나 이 고인돌은 조선총독부가 조사해둔 것인데 인천시민의 손으로 드난살이를 하게 되었으니 일본사람이 물으면 그 ‘새로운 등불들’은 무엇이라 대꾸할 것인가?

 

인천 주변에 약 250기의 고인돌이 있다고 한다. 학익동에 호적을 두고 주민등록은 인천시립박물관에 한 이 고인돌 주변을 맴돌다가 그 ‘만년의 돌’에게 지금 처지를 물었더니 이렇게 간단히 대답했다.

‘나를 교도소로 돌려 보내주오!’

 

고려의 王都였던 마니산, 인천의 관아와 향교를 품은 문학산과 부평의 계양산 - 이 삼각형을 중심으로 부족연맹처럼 광역시가 된 ‘개항백년(?)’의 정체성을 거론하시는 분들도 이 돌에게 지금의 처지를 물어보아주었으면 한다. <*>

 

 

 

 

 

 

* 이런저런 일이 있었는데 아직도 고인돌은 이 자리에서 꿈적하지 않고 있다. 돌을 두 개 얹어 놓으면 고인돌이라고 하는데 사람들의 의식이 변하지 않를 때 이런 말도 쓰고 있다. 그런 도시에는 변화의 물결이 쉬 일어나지 않고 또 살던 사람들도 정을 붙이지 못한다. 그러면 그저 그런 마을이 되고 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