烏竹軒에서 이런 저런 생각[晩秋旅行10]
이 집을 지은 사람 : 江陵 崔氏의 始祖는 諱가 必자 達자 이시다. 최필달은 王建을 도와 918년의 高麗 開國에 이바지한 공으로 三重大匡 三韓壁上 開國贊化功臣에 올랐다. 그 후 강릉의 옛이름인 慶興府院君에 봉해지자 그 후손들이 강릉을 貫鄕으로 삼았다고 한다.
세월은 흘러 그 고려가 망하기 2년 전인 공양왕 말년 1390년에 이 가문에서 崔致雲이 태어났다. 그는 세종22년인 1440에 善逝하기까지 5차례에 걸쳐 明나라를 왕래하며 외교적 공적을 쌓았고, 예문관 제학(종2품) 등을 거쳐 뒷날 문종을 가르친 정2품 右賓客이 되었다. 그가 한 채의 집을 지은 것이 오죽헌이다.
보물 제165호인 烏竹軒은 강릉시 죽헌동 201번지에 있는데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앞면에서 보면 왼쪽 2칸은 대청마루로 사용했고, 오른쪽 1칸은 온돌방으로 만들었다. 지붕 처마를 받치는 부재들도 새부리 모양으로 빠져나오는 간결한 형태의 익공계 양식으로 꾸몄다.
우리나라 주택 건축물 중에서 비교적 오래된 건물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며, 유서 깊은 역사를 가진 건물이라는 것에 한번 더 눈길을 주게 된다.
그의 아들인 崔應賢[1428(세종10)-1507(중종2)]은 공교롭게 아버지의 제자인 문종2년인 1452년에 등제하여 대사헌까지 올랐는데 그가 지은 집이 지금 오죽헌의 본채가 된 셈이다.
이 집에서 태어난 母子 : 어떻게 崔씨가 주인이었던 이 집에서 1504[연산군10]년에 申師任堂이 태어나게 되었는지를 나는 알 수 없다. 사임당의 아버지는 申命和, 어머니는 용인 李씨 李사온의 딸이었다고 한다. 딸만 다섯인 가운데 둘째로 본명은 申인선이었는데 周나라의 기틀을 닦은 文王의 어머니 太任을 본받고자 師任堂이라는 號를 스스로 지었다는데 그렇다면 世襲王朝時代에 대담한 일을 했다고 할 수 있다.
1522년 덕수 李씨인 李元秀와 결혼하여 사위가 처가댁에 머무는 전통에 따라 강릉에서 계속 살다가 서울로 이사했다고 하는데 이런 연유로 4남 3녀의 셋째 아들인 栗谷을 이 방에서 낳은 듯하다.
사임당은 7살 때 안견의 그림을 模寫했고, 숙종과 송시열, 이형규 등이 그의 그림에 발문을 썼다고 한다. 또한 세력판도를 가늠하는 안목도 탁월하여 남편이 벼슬을 하지 못한 남편이 소윤의 영수로 을사사화를 일으킨 윤원형과 결탁한 이기를 찾아다니자 이를 만류하였다고 전해진다.
別世 당시 그녀의 나이는 48세였지만 지금 사용되는 5만원권의 지폐에 그가 그린 葡萄와 함께 부활되어 賢婦賢母의 表象이 되어 있다.
한편 1536년(중종 31)년에 德水 李씨 가문[忠武公李舜臣도 덕수 李氏다.]의 栗谷도 이 방에서 태어났다. 1548년(명종 3) 13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했으니 그야말로 弱冠의 天才少年이었다. 16세에 어머니 師任堂을 여의자 파주 두문리 자운산에서 3년간 侍墓했다. 1554년 成渾과 교분을 맺고 금강산에서 불교에 접하고 이듬해 下山하여 自警文을 짓고 다시 유학에 몰두했다. 1558년 23세 되던 해에 禮安의 陶山에서 당시 58세였던 李滉을 방문했고 이후 書信을 통한 교류는 계속되었다. 1564년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하기까지 모두 9번에 걸쳐 장원을 하여 세간에서는 그를 九度壯元公이라 일컬었다니 考試의 達人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1564년 호조좌랑으로 이어 예조좌랑 · 정언 · 이조좌랑 · 지평 등을 지냈다. 1568년(선조 1) 千秋使의 書狀官으로 明나라에 다녀왔으며, 부교리로서 춘추관기사관을 겸하여 明宗實錄 편찬에 참여했다. 이듬해 사직했다가 1571년 다시 청주목사로 복직했고, 다음해 다시 해주로 낙향했다. 1573년 직제학이 되고 이어 동부승지로서 참찬관을 겸직했으며, 다음해 우부승지 · 병조참지 · 대사간을 지낸 뒤 병으로 사직했다. 그후 황해도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다시 사직하고 石潭[아마 황해도의 고산구곡가에 나오는 냇가-그의 號 가운데 하나인가? 친구의 정정요청으로 우선 고쳐보는데...]에서 학문연구에 전념했다. 1581년 대사헌·예문관제학을 겸임하고, 동지중추부사를 거쳐 兩館大提學을 지냈다. 이듬해 이조 · 형조 · 병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1583년 당쟁을 조장한다는 동인의 탄핵으로 사직했다가 같은 해 다시 판돈녕부사와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정월 49세를 일기로 타계했으니 어머니 보다는 1년을 더 살았지만 母子 모두 50을 넘기지 못했다. 그의 초상은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지금 5천원 권 화폐에서 매일 볼 수 있다.
그는 理는 無形無爲한 존재이며 氣는 有形有爲한 존재로서, 理는 氣의 主宰者이고 氣는 理의 器材라고 주장한다. 栗谷은 理尊論의 退溪와 달리 理의 능동성을 부정하고, 理氣의 不雜보다는 不離를 강조하며 양자의 妙合 가운데 渾淪無間해서 先後와 離合이 없기 때문에 二物이 아니라는 논리라는데 나로서는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경지의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이 이론에 근거하여 인간을 바라볼 때 그는 七情은 四端을 포괄한다고 주장하며 本然之性과 氣質之性을 본래 하나의 性으로 파악했다고 보아 틀림이 없는 듯하다.
이어 栗谷은 모든 사물의 變化를 믿고 그 변화의 기초에 陰陽에 구비되어 있는 動과 靜의 속성과 그 운동변화의 원인을 氣 자체의 속성 대신 '所以然'으로 설명했다고 하는데 이 생각이 사회현상에 적용되어 변법사상의 기초가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매우 어려운 이야기다. 이 생각이 전제되어야겠지만 그가 관리로서 세제개혁과 구조조정에 관심을 보인 것은 조금 수긍할만하다.
그는 공물분배를 공평하게 하고 進上을 경감할 것을 주장했으며, 전답의 면적에 따라 쌀을 징수하는 隨結收米法을 전국에 시행할 것을 제안했다고 한다. 병역교대제와 陳田開墾을 장려하고 파산상태에 빠진 국가재정을 바로잡기 위해 관료기구를 간소화하고 낭비를 근절하여 국가재산의 손실을 방지할 것을 제안했다.
무엇보다 이런 개혁은 사회분위기조성[時勢]이 선행되어야하는데 군주의 개혁의지와 이를 뒷받침할 賢臣의 존재여부가 성패를 결정한다고 보았다. ‘人事가 萬事’, ‘伏地不動’, ‘제 밥그릇 챙기기’, ‘旣得權’, ‘財閥世襲’, ‘疏通不在’, ‘스폰서 檢事’ 등등 이는 오늘도 변함없는 과제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교묘한 ‘철밥통의 進化’라고 해야 할지? 우리 같은 사람은 알 수 없는 일이다.
특히 가장 이상적인 통치형태로서 道學이 행해지는 三代之治는 格致로써 善을 밝히고 誠正으로써 몸을 닦아 몸에 쌓이면 德이 되고 그것을 정사에 베풀면 王道가 이루어진다는 일종의 군주개조론인데 이를 바탕으로 牧民心書의 텍스트쯤 되는 聖學輯要를 저술하여 宣祖에게 올렸다고 한다. 한편 선조는 이 책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알 수 없지만 국가정보원의 일원의 제보를 믿었다가 율곡이 기름칠해둔 화석정의 기둥에 불을 지르고 夜半에 임진강을 건넜다는 것이 전해오는 이야기다. 그의 先祖가 回軍한 위화도에서 亡命을 企圖하다 挫折했다는 이야기도 곁들여서...
한편 선조가 ‘그래도 東人 西人 다투려느냐?!’고 한탄했던 朋黨에 대해 栗谷은 국가정치를 문란하게 하는 요소가 아니라 ‘뜻을 같이 하는 군자들끼리 집단’을 이루는 불가피한 정치현상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당정치의 萌芽라고도 볼 수 있는 이런 이론은 주자의 ‘君子小人辨’ 이라는 일종의 변증법 비슷한 붕당론에 근거한다고 한다. 붕당긍정론에 근거하여 군자당 · 소인당의 엄격한 분별과 진퇴를 강조하여 군자당으로 자부하는 사림의 정치활동을 정당화한 이 논리는 沈義謙 · 金孝元의 시비로 分朋의 조짐을 보이던 1575년 이후 東西人을 타파하는 방법으로 兩是兩非說과 保合調劑論으로 우회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사후 200년간 지속된 이런 기득권유지와 탈환의 혼란은 시스템이 바뀐 오늘날에도 별로 나아진 것이 없어서 ‘市民’이 깨어나지 않고서는 민주주의는 요원하다는 막연한 이야기로 한 100년 쯤 좀 미뤄둘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개혁안의 시행여부를 결정하는 經濟司를 설치하자는 건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栗谷은 天心인 民心의 교화를 위해 파주향약의 序文을 필두로 西原鄕約 · 海州鄕約 · 社倉契鄕約 · 海州一鄕約束 등을 만들어 지방사족의 주도로 농업생산층이 토지로부터 이탈하는 것을 방지하고 유교적 윤리 및 가치관 등을 향촌민에게 주입시켜 사족 중심의 향촌질서를 유지하려 하였다.
그는 聖學輯要 · 擊蒙要訣 · 小學集注改本 · 中庸吐釋 · 經筵日記 등이 저술을 남겼다. 문묘에 종향되었으며, 파주 紫雲書院, 松潭書院, 龜巖書院, 황주 白鹿洞書院 등 20여 개 서원에 배향되었고 諡號는 文成이다.
벌써 겨울이 오고 있다. 지난 가을에 잠시 이곳에 들렸었다. 언제 다시 이곳에 차분히 들를지 알 수 없다. 다녀가는 친구들이 좋은 이야기를 더 들려주기 바란다. 연평도 문제로 시끄럽고 또 율곡의 10만양병설이 제기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본문은 모두 다음 백과를 참고했다. <*>
오죽헌-오른쪽이 몽룡실
더 인상에 남는 것은 말없는 소나무다.
그리고 세월을 지키고 百日紅
오죽헌의 현판과...[송시열의 필세가 느껴지는데...]
烏竹
이 본채를 최응현이 지었다는데...
1910년대의 강릉
오죽헌 입구
사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