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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을 안은 백제의 부처[태안마애불]

양효성 2011. 12. 26. 01:28

 

보살을 안은 백제의 부처[태안마애불]

 

 

보살을 안은 백제의 부처는 태안 백화산 기슭의 바위에 돋을새김 되어있다. 천년의 세월을 묵묵히 서있는 부처는 서쪽바다를 등지고 해 뜨는 정동을 향하고 있다.

 

 

중앙에 본존불을 두고 좌우에 협시보살을 배치하는 것이 보통인데 이 부처는 가운데 작은 보살을 두고 좌우에 큰 여래상이 이를 옹위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약자를 감싸 지키는 衆生濟度의 부처의 거룩함을 생각하면서 가슴이 뭉클해진다.

 

천년이 넘는 세월을 비바람에 씻기면서 부처의 본 모습은 많이 훼손되었다. 처음에는 흙이 무릎까지 차올라 그 연꽃의 臺座는 볼 수 없었다고 한다. 근래에 더 이상의 훼손을 막기 위해 집을 지어 모셨는데 다행히 크게 원형을 다치지는 않아 보였다.

 

뉘엇한 겨울해가 바다를 비추는 동안 컴퓨터 영상으로 복원하듯 옛 모습을 그려보는 것도 운치가 있었다. 오히려 흐려진 부처의 모습이 더욱 무궁한 시간의 바다를 펼쳐 보이기에 좋았다.

 

안면도에는 여러 번 다녀왔다. 그러면서 정작 그 섬이 태안군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고 또 태안에 들리지 않아 이 부처를 만나지 못했다. 어쩐지 태안은 전라도의 부안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부안에는 죽막동에서 제사를 지낸 유적이 있고 동문 서문의 지명이 있고 또 돌로 만든 솟대가 있는데 이곳도 동문리와 남문리가 있고 이 불상은 동문리에 있는데 읍내에서 지척이다.

 

무엇보다 이 불상의 산기슭에서는 태안 읍내가 한 눈에 들어오고 서해가 고즈넉이 펼쳐져 보인다. 그 굴곡의 정삼각형 위치에 안흥성과 소근진 성이 있는 것도 왜구와 더불어 이곳이 범상치 않은 뱃길이었음을 알린다. 어쩐지 안면도를 바라볼 때 마다 대마도를 닮았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나의 망발일까?

 

길이 있는 곳에 교역이 있고 장사가 지나가는 길에는 불상이 있다. 그옛날 서해는 곳곳이 국제무역항이었을 것이고 가장 유명한 곳이 당진이었을 것이다. 당진에서 서산 공주로 가는 길에 안국사와 백제의 미소로 유명한 운산마애불이 있고 보원사절터와 수덕사 마곡사들이 길을 열었다. 더욱 이곳 태안을 비롯해 충청도에는 馬韓56국 가운데 16개의 나라가 충청남도에 있었고 태안도 그 하나의 나라였다니 감회가 새롭다. 신소도국(臣蘇塗國)과 고랍국(古臘國)이 그들인데 신소도국은 지금의 태안읍 동문리 백화산 기슭의 샘골(一名斜陽洞)이니 불상이 있는 자리이고 고랍국은 고남면 고남리에 있었다고 한다.

 

이 부처는 흔히 운산 마애불의 원조로 알려져 있다. 아무튼 이 불상앞에서 먼 뱃길을 헤쳤던 뱃살므이 안녕을 빌었던 아낙들의 정성을 다시 생각해본다. 산기슭에 봄이면 진달래가 피고 서해의 해넘이 더욱 장관을 이룰 것이다.

 

 

보살을 품은 부처

 이 부처님은 먼 바닷길을 떠나는 선원들의 안녕을 빌었을까?

 

천천히 그 모습을 응시하면 인자한 옛모습이 컴퓨터그라픽처럼 또렷리 그려진다.

 

세월을 말하며 바스라진 옷깃에서 오히려 따스함을 느끼는데...

 

흙속에 묻혔던 대좌는 이제 제 모습을 찾아 꽃피우고...

 

혹 여유가 있었다면 이 벽에 서쪽을 바라보는 부처를 또 새길 수 있었을까?

 

옆에서 보면 오히려 그 양감이 두드러져 보이는데...

 

1천5백년의 세월을 헤아리면서...

 

 

발견될 당시에는 이런 정도까지 흙에 묻혀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보호각을 지었지만 석굴암이나 광개토대왕비와는 달리 그 안에 들어갈 수 있다.

 

 

멀리서 본 마애불각

 

그 등성이를 잠시 오르면

 

태안 읍내와 멀리 서해가 한눈에 들어온다.

 

마애불과 정삼각형을 이루는 한 축인 소근진성터

 

말안장처럼 휘어진 곳이 성벽의 흔적이다.

 

전신주 위쪽에 문루의 흔적이 있다고 한다.

 

지금 어민회관의 바다에는 썰물이면 접안시설ㄹ로 보이는 말뚝이 보인다고 한다.

 

멀리 화력발전소의 연기가 솟아오른 이곳은 태안의 해변.

 

이어지는 글은 문화재청이 안내하는 불상과 소근진성의 상세설명이다.

 

[국보307호 태안마애불]

우리나라 마애불상의 초기 예로 부채꼴 바위 면에 사각형 감실을 마련하여 중앙에 보살상을 두고 좌우에 불상을 배치해 놓음으로써, 1구의 불상과 2구의 보살상으로 이루어지는 일반적인 삼존불상과 달리 2구의 불입상과 1구의 보살입상이 한 조를 이루는 특이한 삼존불상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2구의 불입상은 양감 풍부한 얼굴에 크게 번지는 미소, 넓게 벌어진 당당한 어깨와 장대한 체구, U자형 주름과 y형 내의가 보이는 착의법, 도톰한 듯 날카로운 대좌의 연꽃무늬 등 세부적으로는 거의 동일한 양식 특징을 보인다.

 

좌우 두 불상 사이에 끼여 있는 듯 뒤로 물러나 작게 새겨진 보살입상은 높은 관에 아무런 무늬도 나타나 보이지 않지만 본래는 장식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타원형으로 길고 통통한 얼굴은 잔잔한 미소를 머금어 원만상이다. 어깨를 덮어 내린 천의는 길게 내려와 무릎 부분에서 X자형으로 교차하며 묵중하게 처리되었으며 배 앞에 모은 두 손은 오른손을 위로 하여 보주를 감싸 쥔 이른바 봉보주인(捧寶珠印)을 나타내고 있다.

 

불신의 하반부가 노출되어 백제시대의 연화대좌가 확인됨으로써 그 도상적 가치를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다. 중국과의 교류상 요충지에 자리함으로써 6세기 중반 경 중국 북제양식 불상과의 영향 관계 파악에 매우 중요한 작품이며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국보 제84호)에 선행하는 조형양식을 지닌 백제 최고(最古)의 마애불상이란 점에서 국보로서의 가치가 인정된다.

 

[소근진성]

 

읍성이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행정적인 기능을 함께하는 성을 말한다. 충청남도 태안군에서 서북쪽으로 13.6㎞ 떨어진 해안가에 있는 조선시대 읍성으로, 조선 중종 9년(1514)에 쌓은 것이다. 이 곳에 성을 쌓게 된 동기는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였는데, 특히 고려 말부터 이 지역에 나타난 왜구의 침입으로 인해 지역 주민들의 피해가 심각했다고 한다. 이 성은 서쪽으로는 서해에 접하고 있으며, 동·남·북벽은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성벽을 구축하였다. 성의 둘레는 650m 정도인데 대부분이 무너지고 현재는 동문터 부근만이 남아 있다. 동문터의 북벽을 보면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은 바닥의 너비가 8m, 바깥벽의 높이가 4.4m, 안쪽벽의 높이가 2m, 윗면의 너비가 1.7m이다. 성벽 안쪽으로는 군사들이 통로로 이용하기 위하여 흙을 덧대어 쌓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바깥쪽에 비하여 얕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이곳은 중종 9년(1514)에 만들어졌으며, 성 주위가 2,165척(약 656m)이라고 했다. 『여지도서』에서도 영조 당시의 수군실태를 적고 있어 서해안의 방비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곳으로 추정된다.

 

다만 이 성이 조선초기의 축성이라고는 하지만 그 이전에도 해안을 방비하고 또 바갓길을 이용하는 선원들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장소였을지도 모른다는 의문을 나는 지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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