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村의 詩 0004> 유치환의 행복
행복
ㅡ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 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더 의지 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방울 연련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ㅡ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ㅡ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이 시는 1953년 「「문예」지에 발표되었다고 한다. 청마 마흔 댓 쯤 쓰였을까? 이영도를 만난 것은 1945-6년쯤이라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는데...이미 5천여 통의 편지를 남겼으니 저승에서 이어지는 사연은 또 얼마이겠는가?!
내게는 표지가 뜯겨진 청마시집이 한 권 있는데 이제 삭아서 책장을 넘기면 부스러진다. 갑오 중추일은 단기 4287년 서기로는 1954년 추석이니 내전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어려운 시기였다. 필자는 부기에 “...나의 여덟권째 시집 「幸福은 이렇게 오더니라」와 다섯권째인 「祈禱歌」를 합친 것...”이라고 했는데 그가 열거한 시집들은 다음과 같다.
『靑馬詩抄』, 『生命의 書』, 『鬱陵島』, 『蜻蛉日記』, 『祈禱歌』, 『步兵과 더부러』, 『예루살렘의 닭』, 『幸福은 이렇게 오더니라』...
이 전란의 시기에 생명파로 불리운 시인의 시절이야기도 한 토막 보인다. 白凡의 悲報를 듣고「죄욕」, 二代 國會議員 候補 亂立을 보고 「人民을 팔지 않을 者를!」 , 「颱風警報」와 1952년의 「佈告」 등을 쓰기도 했다.
청마에 대한 이야기는 넘치도록 남아 있으니 오히려 그 시절 애틋한 시인의 감성을 담아낸 이슬같은 한 줄을 담아보자...
누가 뭐라 해도 청마의 부인은 1929년 4월 식을 올린 경성중앙보육학교 출신 안동 권씨 재순 여사이다. 갓 스물에 결혼한 셈인데 스물아홉 되던 해인가?! 1936년 5월 「신동아」에 이런 詩(원제는 병처부)를 남기고 있다.
病妻
아픈가 물으면 가늘게 미소하고
아프면 가만히 눈 감는 아내 ―
한 떨기 들꽃이 피었다 시들고 지고
한 사람이 살고 병들고 또한 죽어 가다.
이 앞에서는 전 우주를 다하여도 더욱 무력한가.
내 드디어 그대 앓음을 나누지 못하나니.
가만히 눈 감고 아내여,
이 덧없이 무상한
골육(骨肉)에 엉기인 유정(有情)의 거미줄을 관념하며
요료(遙蓼)한 태허(太虛) 가운데
오직 고독한 홀몸을 응시하고
보지 못할 천상의 아득한 성망(星芒)을 지키며
소조(蕭條)히 지저(地底)를 구우는 무색 음풍(無色陰風)을 듣는가.
하여 애련의 야윈 손을 내밀어
인연의 어린 새새끼들을 애석해하는가.
아아 그대는 일찍이
나의 청춘을 정열한 한 떨기 푸른 나무려니.
아아 가을이런가.
추풍(秋風)은 소조(蕭條)히 그대 위를 스쳐 부는가.
그대 만약 죽으면 ―
이 생각만으로 가슴은 슬픔에 짐승 같다.
그러나 이는 오직 철없는 애정의 짜증이러니.
진실로 엄숙한 사실 앞에는
그대는 바람같이 사라지고
내 또한 바람처럼 외로이 남으리니.
아아 이 지극히 가까웁고도 머언 자(者)여. <*>
아이를 잃기도 했던 靑馬는 『祈禱歌』에 아픈 아이로 애타는 어버이의 「病兒」를 남기고 있다. 그리고 이런 제목의 幸福(『靑馬詩集-祈禱歌 82쪽』)도 있다.
幸福
내 아무것도 가진 것 없건마는
머리 위에 항시 푸른 하늘 우러렀으매
이렇듯 마음 행복 되노라.
나종 죽어 서럽잖이 더욱 행복함은
하늘 푸른 고향의 그 등성이에
종시 묻히어 누웠을 수 있음이어라. <*>
그를 기념하는 문학관이 통영청마문학관literature.tongyeong.go.kr과 거제 청마기념관cheongma.or.kr도 있다는 것은 자유여행가들에게 크낙한 위안이 아니겠는가?! 근래 미술관과 문학관과 소규모 박물관들이 줄을 이어 세워지는 것은 文化富國의 디딤돌로 든든하기 짝이 없다.(*)
1954년 창마시집 『幸福은 이렇게 오더니라』의 행복
『幸福은 이렇게 오더니라』의 포고 186-7쪽
기도가의 病兒-병아
'시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山村의 詩 0006> 나태주의 행복 노래가 된 시... (0) | 2020.01.17 |
---|---|
<山村의 詩 0005> 韓龍雲의 행복 (0) | 2020.01.15 |
<山村의 詩 0003> 김종삼 행복 (0) | 2020.01.11 |
<山村의 詩 0002> 박인환의 행복 (0) | 2020.01.09 |
詩人과 農夫들... (0) | 2020.01.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