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다알프스의추억

기다알프스의 추억[6] 제4일 오후 - 마쯔모또의 天守閣

양효성 2010. 9. 3. 14:02

 

 

 

             기다알프스의 추억[6] 제4일 오후

                         마쯔모또의 天守閣

 

시골역 : 곽재구의 ‘사평역에서’라는 詩는 슬프다. 그 詩를 수첩에 적어 가슴에 품고 다니는 사람을 보았다. 그는 슬픔을 안고 있을까? 더 슬펐던 톨스토이는 방랑의 길 아스따뽀뽀라는 시골역에서 숨졌다. 역장이 겨우 알아보았다니 그는 행려병자로 생을 마감한 것이다. 그러나 딸네를 찾아가는 할머니, 방학에 돌아오는 손자를 기다리는 할아버지...참외도 올라오고 닭도 함께 타던 그런 북적거리는 시골역도 있었다. 세상과의 만남 - 호기심이 모여 있는 곳도 시골역이다. 멋진 역장의 금테 두른 모자와 차장의 손에 들린 두 개의 깃발...그 깃발의 흔들림은 새로운 세계를 여는 희망의 흔들림이었었다.

 

 

산에서 내려오자 맥이 풀렸다. 광장의 댓돌에 엉덩이를 붙여놓고 어디 먹을 것을 좀 찾아보라고 했다. 부인네들이 광장을 한 바퀴 도는 동안 12시35분 기차표를 사고 보니 달랑 만두 2개를 사들고 와서 먹을 데가 마땅치 않다고 한다.

‘역전에 식당이 없다고??’

알고 보니 대합실에 훌륭한 가게가 있었다. 국수 먹다가 기차를 놓친다는 대전역의 국수집처럼...驛舍는 가운데 출입구를 중심으로 오른쪽은 사무실 왼쪽은 대합실로 매우 합리적으로 나뉘어 있고 또 문밖에 자동차 오토바이와 자전거 주차장이 있었다. 한 사람의 아주머니가 카운터에서 부지런히 국수를 말아주고 있는데 이 패스트푸드점의 메뉴는 실로 다양했지만 모두 더운 물에 국수를 삶아내는 것이었다. 라면백화점이라고 해야 할지...메밀국수다운 메밀국수를 맛있게 먹고 출찰구를 통과했다.

 

 

여기는 나가노 현 시나노마치역 - 이제 알프스는 다 내려왔다 

 

 

버스는 신호등에 세워놓고 일직선으로 달리다보면 특별한 손님이 된 기분인데...

 

 

방금 내려온 알프스는 지금 구름에 쌓여 비가 내리는지도 모른다. 

 

개구쟁이 삼총사는 방학이 너무 즐겁다

 

 

도시 생활에 지친 사람들에게 田園風景만큼 위안이 되는 것이 없다. 전철의 차창에 비치는 방금 내려온 기다알프스의 봉우리는 칼로 자른 듯 일직선이었다. 다 돌아본 것은 아니지만 일본의 시골은 거의 비슷하다. 기와를 얹은 단정한 2층집들은 농가라는 느낌이 거의 없다. 추녀 밑 까지 심은 벼들은 네모반듯하다. 산과 계곡의 굴곡이 배경이 되지 않는다면 바둑을 두어도 좋을 만큼... 전망창과 냉방과 걷지 않고도 앉아서 화면이 바뀌는 이 시간은 휴식과 관광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순간이었다. 신문을 보는 중년과 방금 수련회를 마치고 커다란 배낭을 짊어진 고등학생, 햇빛이 눈부신 여인 그리고 세 명의 개구쟁이 소년들... 기차는 매우 매끄럽게 서고 또 떠난다. 차장인 어린 소녀는 정차와 출발을 돕고 또 시골역의 손님들 차표를 검사하고 표를 끊어주기도 한다. 기차는 너무 편하게 우리를 松本[마쯔모또]에 내려 주었다. 참! 카메라 케이스를 놓고 내렸는데 친절한 일본인이 등을 두드리며 건네주었다.

관광안내소는 여기서도 훌륭했다. 호텔, 시내지도와 민물장어를 잘 하는 집, 高山[다까야마]으로 가는 버스 정류장과 그곳의 관광 안내도...

에스칼레이터를 내려오자 역의 입구에 ‘松本’이라는 글자를 목판에 전각으로 새겨놓았다.

 

호텔찾기 : 오늘은 좀 편한 곳에서 자고 싶었는데 예산이 문제다. 스마일 이틀에35,000円, 어제 산장에서 38,000円이니 벌써 7만2천円을 썼다. 일주일을 자야하니 40만엔 예산에 2만엔씩만 해도 14만엔인데 교통비와 식대도 만만치 않다.

역 앞이 번화가이니 내일 아침 떠날 버스터미널도 보아둘 겸 그 옆의 도뀨인과 또 다른 호텔을 돌아보니 1만5천円, 1만1천円인데 마땅치 않다. 할 수없이 길 건너 스마일호텔을 찾았더니 디자인은 비슷한데 이름은 다른 수퍼[ス-ペ-]호텔이다. 이 호텔은 가이드북에도 나와 있다. 마유미[삼정まゆみ]와 나오카[橫川奈穗子] 두 사람은 모두 한국에서 어학연수를 했고 한국어가 유창한데 오늘은 이 집도 만실이다. 스마일호텔에 전화를 걸어 예약을 해주며 시즌인데 다행이라고 제 일처럼 기뻐해준다. 정말 고마웠다.

‘이럴 줄 알았으면 가나자와 스마일호텔에서 잘 때 예약을 할 걸!..’

택시로 10분 거리의 호텔에 도착하고 넓은 방은 이미 없으니 기숙사같은 좁은 방에 짐을 풀어놓는데 이제 적응이 되었나? 오밀조밀하게 컵과 차와 浴衣와 깜직한 커피포트와...무엇보다 깨끗한 이부자리 ... 욕조는 유아용으로 적격이지만 반신욕을 할 수는 있다. 내일 아침은 다까야마로 가면 되니까...

 

이상한 물리학 : 좀 푹 쉬고 저녁이나 먹으면서 거리산책을 하면 좋겠는데 李선생은 젊다. 1시간만 쉬고 국보인 마쯔모또城을 보자고 한다. 네 명이 한 가지씩 다른 생각을 조합하여 의견 통일을 하려면 몇 가지의 경우가 생길까? 4×4일까? 잊어버렸다. fac·to·ri·al - 이것을 階乘이라고 번역했는데...한 계단씩 올라가며 곱한다는 뜻일까? 4×3×2×1=24가지 경우가 생길까? 4人4色은 식습관에서 이미 말했다. 그런데 왜 이 수학이 물리학 및 심리학과 관계가 있는 것일까?

40대와 60대의 걸음의 속도와 보폭과 지구력에 보고 싶은 기호가 모두 다른 조건들을 삽입하면 함께 여행하기란 실로 복잡한 경우의 수가 나온다. 人生縮圖라고 요약할 수 있을지? 이렇게 계산하면 역시 늙은 놈은 늙은 놈끼리 살아야 한다. 어떤 젊은이들이 일일이 그 걸음걸이를 맞추면서 살려고 할 것인가?

 

 

 

오늘밤 잘곳을 마련해준 수퍼호텔의 지배인들- 정말 한국어를 잘 한다.

 

 

 

봉건주의 상징 마쯔모또성 : 이 城은 마쯔모또의 랜드마크다. 엄밀하게 건축분야의 국보40호다. 프런트에는 택시를 부르는 전화가 있다. 걸어서 15분이라지만 이미 4시고 5시 30분 전에는 표를 팔지 않을 것이다. 5시까지 나와야 한다는 다짐을 받고 입장권을 샀다. 내심 이 천수각은 밖에서 보아도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했었다. 가릴 것 없이 성주위를 돌면 물위에 떠있는 성이 너무 잘 보이니까...

입구에는 우주선에서 싹을 틔웠다는 나무가 자라고 있다. 천수각은 6층인데 행랑채는 무너져 정원이 되어 있고 모란이 가지런히 심어져 있다. 봄날의 사쿠라와 초여름의 모란 등등 꽃이 피면 아름다울 것이다. 신발을 비닐에 넣고 계단을 오르자 길게 줄이 서있다. 단체관광객이 가이드의 설명을 듣는 줄 알았는데 계단을 오르려는 긴 줄이었다. 줄에 선 사람들은 아무도 말리지 않는다. 되돌아와서 맨 끝에 섰다. 줄은 정말 서서히 앞으로 끌려 나가고 그 사이 뒤에도 사람이 늘어난다. 도대체 어디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여기 모였는지...마쯔모도의 호텔들이 만원인 까닭을 여기서 알겠다.

2층에는 조총을 쏘는 창구들이 적의 탄환을 막기 위한 30Cm가까운 두터운 벽을 끼고 뚫려있는데 돌로 쌓은 유럽의 성에도 대포를 쏘기 위한 이런 창구들이 있다.

그러나 4-5층으로 대피한다고 해서 1-2층에 총알이 빗발치는데 적군을 막아낼 수 있을 것인가? 성을 지키는 동안 원군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으니 이웃 성과의 유대를 위해 성주는 부단히 외교에 힘을 쏟았을 것이다.

 

3층에는 우리에게 恨이 되었던 임진왜란 시기의 조총이 진열되어 있다. 말 위에서 쏘는 총과 바주카포 비슷한 어깨에 메고 쏘는 큰 총과 피스톨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이 흉기는 유럽에서 인도양을 거쳐 규슈의 남단 種字島[다네가시마]를 거쳐 豊信秀吉이 살고 있는 오사카에 이르렀다고 지도로 그려놓았다. 탄환을 만드는 여인들은 거푸집에 납을 녹여 붓고 있다. 이 여인들도 또 총을 어깨에 걸고 앞머리를 밀어버린 맨발의 사무라이도 전쟁이 좋았던 것은 아니었다. 이들이 연대하여 전쟁을 반대하고 그 세력이 늘어나면 우리는 선동의 깃발에서 좀 더 자유스러워질 것이다.

 

封建과 地方自治 : 이 天守閣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오히려 우리 역사가 경험하지 못한 봉건주의의 상징성에 있다. 일본은 한국인의 고정관념에 각인된 것보다는 넓고 인구도 많은 나라다. 우리역사가 삼국시대-고려-조선으로 간단히 요약되는 것에 비해 중국은 正史로만 24왕조가 존재했고 교양역사의 도표에는 50이 넘는 나라가 있다. 어떤 역사학자는 자세하게 센다면 헤아리기도 어려울 거라고 한다. 馬韓에 56개의 나라가 있었다는 시절부터 매우 오랫동안 일본은 그런 상태를 유지하다가 7세기에 야마또를 중심으로 한번, 그리고 16세기에 도요또미에 의해 한번 연합국가체제를 만들었다는 것은 지방을 영주에게 맡겨 다스리게 함으로써 영주들의 경쟁을 통해 상생적 발전을 이룩했다는 의미다. 그래서 거의 모든 천수각이 이 시기에 건조되었고 그 시기는 임진왜란과 비슷한데 이 성은 임진란 이듬해인 1593년에 건조되었다.

이 역사는 明治維新을 거쳐 오늘에 이르게 되는데 그 뿌리에는 지방 또는 고향에 대한 일본인들의 애착이 있다. 그리고 그 의식의 원류에는 봉건제도가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우리가 오직 중앙집권의 왕 한 사람에게 매달리는 의식과도 견주어볼만 하다. 말하자면 일본사람이 영주와 군왕의 이중적 정치구조 가운데 살았던 복합적 지방분권주의라면 한국인은 단선적 중앙집권 구조 속에서 忠孝라는 정치의식을 축적해갔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일본인들이 겉과 속이 다르다[다떼와 혼네]는 말을 듣는다면 한국인은 어떤 말을 들을지 재삼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일기예보를 묻거나 또는 다른 현의 정보를 물을 때 ‘그곳에 가서 알아보라!’는 말을 자주 듣는데 이 사람들에게 자신의 고장이 곧 천하라는 의식이 있는 것은 아닌지?

 

가끔 틔어진 銃眼을 내다보고 또 벽에 전시된 역사를 음미하며 줄을 따라 돌기를 여러 번 드디어 천수각의 맨 위 전망대에 오른다. 이미 5시는 넘었고 1시간 더 연장한다는 안내가 있었다. 이런 경험은 처음인데 일본인도 외국인도 모두 정숙하게 나름대로 생각을 갖고 말없이 이 줄을 따라가고 있다. 천수각의 대들보에는 우리가 북어를 한지에 매달아 놓듯 여기서도 그 비슷한 장식물이 매달려 있다.

 

천수각은 일본에 모두 250[?]개소에 있었다는데 문화대혁명 비슷하게 明治維新의 구습타파운동 때 봉건유물로 치부되어 대부분 파괴되었고 한다. 이때 이 ‘封建의 殘滓(?)’를 역사에 남겨달라고 위험을 무릅쓰고 정부에 건의한 사람의 탄원서가 걸려 있는데, 明治2년 藩主의 소유였던 성곽이 모두 정부에 귀속되어 육군의 관할에 들어갔을 때 유지들이 이 천수각을 유지해서 박람회를 열자는 대안을 제시한 것 같다. 아무튼 이후 5차례의 박람회가 개최되고 그 수익금으로 천수각을 되사들이고 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니 그 열의와 성의에 생각이 많았다 .

 

드디어 6층에 오르자 기다알프스에 에둘러 쌓인 마쯔모토의 전경이 두루 보인다. 산과 흰 구름을 동반한 파란 하늘과 따가운 햇살!

 

600앤의 입장료를 내고 들어간 천수각의 입구

 

총구멍을 통해 평화로은 해자와 시가지가 보이고 공원에는 한가한 시민들

 

이 사람은 살아남았을까?

 

총알을 만들어 지아비를 전장에 보내는 아낙들은 영주앞에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했겠는가?

이들이 흔드는 깃발의 속내를 우리는 다시 생각해 보아야한다.

한편 우리 아낙들이 선거때만 되면 띠를 두르고 골목에서 허리를 굽힐 때 그 민주주의에 대한 경의의 수준은 어느 정도인지?

 

 

 

6층까지 오르는 계단은 그리 높지 않은데... 

천수각의 곁집 지붕

 

천수각 6층의 전망

 

밖에서 오히려 물에 떠있는 천수각이...

 

 

‘櫻家’의 저녁과 산책 : 이미 6시는 넘었지만 서산에 걸린 해는 시간을 잊게 했다. 성문을 나오니 성이 더 잘 보이는 것이 이상했다. 공원의 벤치에서 잠시 쉬면서 垓字 건너 시립박물관과 시청을 바라보다가 길 건너 수퍼에서 보리차를 한 잔씩 사 마셨다. 관광안내소에서 민물장어를 잘한다는 ‘櫻家[사쿠라]’를 소개 받은지라 한 골목을 더 지났다. ‘大手4丁目9-1’이 그 번지였는데 길가에는 옛집들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 大正9년[1919]에 문을 열었다니 100년 가까운 집이다. 청결한 입구와 작은 정원 그리고 그릇들이 이 집의 손때를 느끼게 한다. 정작 민물장어를 먹을 사람은 덴부라를 시키고 장어는 質이야 量이냐를 선택해야 했는데 역시 量보다는 質이 좋았다.

 

이제 한낮에 보았어야할 나까마치[中町通]를 산책삼아 걷는다. ‘女鳥羽川’은 메뚜기 비슷하게 메또바로 읽는 모양인데 이 또한 알프스의 자락에서 흘러 마을을 가로지르는 것이 분명했다. 냇물을 따라 하얀 집들은 소주의 항구 풍경을 찍은 사진처럼 아름다웠다. 다리를 건너자 모두 검은 격자무늬로 포인트를 준 하얀 집들이 줄을 이었다. 드문드문 새로 지은 집도 모두 흰색으로 조화를 이루었다. 전통여관도 보이고 찻집과 공예품들이 늘어선 민예의 거리에는 여기 시내 관광버스의 정류장들이 보인다. 겨우 8시쯤 되었는데 인적은 없다. 구라시키[倉敷]의 ‘白璧의 町’에서 유후인[由布院]으로 교토[京都]를 지나 가나자와의 히가시짜야[東茶屋]를 거쳐 이런 由緖깊은 거리를 걷는 것은 마치 역사의 중심에 서있는 것처럼 환상을 자아낸다.

 

나팔꽃 모양의 가로등이 비추는 길보다 더 부러운 것은 길가의 물이었다. 市정부 주관으로 수질을 개선하고 길가에 우물을 정비하여 오가는 사람이 언제든지 마실 수 있도록 수질검사표와 컵까지 마련해 놓았다. 한 밤에 그물을 한 모금 마셔보았다. 인천에도 동인천역 앞의 용동에 우물이 있었다. 정자를 지어 보존하더니 그물망을 치고 우물에 돌을 던지지 말라는 경고문이 마붙었다. ‘여기 우물이 있었다!’ 이 한마디만으로도 우리 아이들이 할머니의 우물 긷던 모습을 떠올리지 않겠는가?

 

‘어머! 저기가 호텔이네!’

산책하며 돌아오는 길은 15분은 훨씬 넘었지만 힘들지 않았다. 학교 기숙사를 닮은 예쁜 호텔의 운동장만한 주차장에 빈틈이 없다.

‘빈방이 없다는 말이 실감나는군!’

식당에는 횃불을 밝힌 나그네들의 얼굴이 붉어 보였다.

 

 

 

마실 물이 흐르는 거리의 표정

표주박이 놓여 있고

거리의 지도가 보인다.

 

1919년 창업 ...

 

그릇이 맛깔스러운...

 

나까마치의 여관

 

모두 흰 벽의 나카마치에는 ...

 

가다가 마실 물이 대나무 파이프에서 흐르고 있다.

 

그 수질검사표...

 

 

프런트에는 낮에 부탁했던 다까야마의 호텔 정보와 버스시간표가 준비되어 있었다. 내일은 아침 일찍 우유에 빵을 먹고 7시에 출발해서 7시45분 버스를 타고 11시쯤 다까오까에 도착할 예정이다. 일본 추석은 점점 가까워지고 호텔은 만실이라는데 현지에 가서 찾아보아야겠다. <*>

 

                                                             <계속 : 다음은 ⑦ 비내리는 다까야마>